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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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든 책
  • 박병상
  • 승인 2011.12.2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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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박병상 /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소년, 갯벌에서 길을 묻다》, 윤현석 지음, 뜨인돌, 2011.


윤현석(사진 오른쪽) 군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2005년부터 올해까지 7년 동안 매년 여름방학 때 전북 군산 비응도에서부터 부안 해창리에 이르는 새만금 갯벌 해안길 180㎞를 걸어왔다. 윤 군은 그동안 보고 느낀 새만금의 모습을 책 <소년, 갯벌에서 길을 묻다>로 펴냈다.

한동안 뜨거웠던 새만금 간척사업. 지금은 조용하다. 환경단체에서 제기했던 커다란 문제들이 말끔히 해결되었기에 조용한 걸까. 반대 논리가 거셀 때, 언론들은 찬성과 반대 목소리를 균형적으로 다루었는데, 요즘은 아니다. 당연히 개발되어야 하는 간척지인 듯 보도한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은 다만 국가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 지지부진할 뿐, 개발을 기정사실로 돌린다. 그런 새만금. 개발의 타당성까지 거머쥔 듯 당당한 자세이지만, 사실상 쉽지 않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네덜란드처럼 다시 바다로 돌려줄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새만금.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는 시대에 감당할 수 없는 개발이 되었다. 갯벌이 드넓을 때 들이치는 해일은 오랜 세월동안 완충되었지만 앞으로 장담할 수 없다. 뜨거워진 바다에서 에너지를 받은 너울성 파고가 되어 제방을 넘어 들어온다면? 바닷물보다 낮게 설계될 예정인 간척지는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상의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간척지 내부를 바닷물보다 높게 올릴 흙을 육지에서 구하기 어려우므로 바닷모래나 개펄을 준설 매립한다면? 인근 바다 생태계는 초토화돼 어패류 수확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일 개과천선해서 제방을 전부, 또는 일부라도 헐어낸다면? 좀 시간을 걸리겠지만 바닷물이 어떻게 들고 나는가에 따르는 갯벌의 복원력에 힘입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2000년 어린이날, 전국에서 새만금 간척 공사장으로 모인 200명의 미래세대는 ‘미래세대 환경소송’을 제기해야 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을 《소년, 갯벌에서 길을 묻다》의 저자 윤현석 군은 그 자리에 없었다. 선조가 온전하게 물려준 드넓은 갯벌을 당대 어른들이 독차지하며 후손의 환경과 생명권을 위협하는데 저항했던 미래세대 소송은 안타깝게 법원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아직 어른이 아니므로 당사자가 아니라는 법 해석이 장애였다. 그렇다면 새만금 갯벌의 당사자는 누구였을까. 맨손어업에 종사하는 계화도의 주민들? 법은 미진하든 말든 어업보상을 받은 어민들을 소외했다. 정작 당사자는 새만금 갯벌에 사는 백합과 짱뚱어와 같은 생물이겠지만 그들은 인간이 만든 법정에 서지 못한다.

조류독감, 생명공학, 4대강 사업, 핵발전소와 핵폐기장, 그리고 광우병과 한미FTA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안이 줄을 이어 그런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새만금 간척사업은 자꾸 희미해 가는데, 19살 윤현석 군이 새만금 반대운동에서 쓴맛을 본 이들의 가슴 통증을 다시금 느끼게 했다. 새만금 간척사업에 저항했던 환경단체 활동가들은 여전히 바쁘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도 막아내기 어려운 막무가내 개발 사업이 어디 한두 군데에서 벌어지던가. 새만금 간척사업이 워낙에 규모가 크고 그 여파가 후손에 막대하게 미칠 것이기에, 법원에서 패소한 이후 현장에 나서지 못하고 있더라도 잊지 못하고 가슴 한 컨에 오롯이 남겨두었는데, 현장을 떠나지 않은 윤현석 군이 7년의 고통스런 기억을 다시금 꺼내지 않았나.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조사모임’, 줄여서 ‘환생교’는 결코 새만금 갯벌을 잊지 않았다. 2003년 환생교 열혈 회원인 엄마를 따라 환경캠프를 찾았던 윤현석 군은 성직자들의 ‘삼보일배’에 무언지 모르는 감동을 받았고, 2005년부터 최근까지 새만금 간척지를 발로 해마다 돌았다. 아직 갯벌이 살아 있을 때에는 갯벌 옆으로 이어지는 둑을 따라 걷었고, 바깥의 제방이 완공돼 해수 유통이 차단되면서 막대한 면적의 갯벌이 죽어 딱딱해졌을 때에는 그 안을 걷기도 했다. 죽어나간 조개와 칠게들의 흔적, 그리고 생계를 잃고 떠나버린 주민들의 폐가를 바라보며 눈물겨워했다. 갯벌의 생명들과 주민들은 소년의 오랜 친구요 이웃이 아니었나.

컴퓨터와 텔레비전과 휴대전화를 잠시 밀어두고 찾아 나선 새만금 갯벌. 서울내기 소년이 흠뻑 취할 수밖에 없는 자연이었다. 이제 바다가 막히고 마른 갯벌 위를 걷는다는 거,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었다. 1년 전까지 건강했던 갯벌이 비참하게 말라비틀어진 모습을 보고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기에 19살이 된 그 소년은 써야 했다. 자신이 느낀 고통을 친구들에게, 그리고 갯벌의 가치를 모르는 이에게 새만금에 관한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해야 했다. 눈 감고도 숱한 백합을 잡던 그 지점에서 사망한 류기화 아주머니의 한을 전해야 했다. 그 많던 도요새와 물떼새의 눈부신 군무, 풍부하고 깨끗했던 소금과 염전들, 붉은 노을의 아름다움을 모르면 안 될 일이 아닌가.

그 새만금을 지키려 세 걸음 걷고서 크게 절 한번 하던 성직자들의 피와 땀, 새만금 간척공사의 문제점을 알리려 자전거와 도보로 서울과 새만금을 다니느라 애를 쓴 주민들, 수많은 장승을 세우고 반대 목소리를 높인 전국 환경단체의 행동이 있었다는 걸, 내일도 이 땅에 살아갈 사람들은 알아야 했다. 그런 풍요로움과 경관과 애환과 고통이 어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개발된 새만금 간척지만 본다면, 원래 그러려니 오해할 게 아닌가. 자연이 살아 있기에 사람의 건강한 생명이 보장되었다는 진리도 모르고, 태풍과 해일로 망가지는 간척지에서 제 잘못이려니 하고 망연자실할 게 아닌가.

윤현석 군은 의젓하다. 문장력도 보통을 넘는다. 자연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망가진 우리 자연을 되살리려는 의지로 공부한다. 《소년, 갯벌에서 길을 묻다》를 읽으면 그 소년의 의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자연을 되살리려면 개발 이전의 모습과 그 생태계, 그리고 그 지역에 문화를 형성하며 살던 주민들을 기억해야 한다. 《소년, 갯벌에서 길을 묻다》를 쓴 윤혁석 군은 새만금 갯벌에서 자신이 갈 길을 물었고 답을 찾았다.

윤현석 군은 미래세대다. 우리 조상이 그랬듯, 당연히 미래세대 생명을 지켜야 했던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던가. 미래세대 생명을 건강하게 보장해줄 갯벌이 황망하게 매립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나는 《소년, 갯벌에서 길을 묻다》를 읽으며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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