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대금업은 절도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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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대금업은 절도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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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5.2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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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 '돈과 구원'

현대 세상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뭘까?

지난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 사건으로 야기된 금융위기는 이후 지금 유럽의 유로화 위기로 확대되어 전 세계가 경제침체와 금융위기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금융위기의 본질은 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돈이 돈을 낳는 시스템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금 전 세계의 99%는 부의 편중과 과도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면 이 문제의 근원을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보자. 자본주의 이전 중세시기는 돈, 특히 이자 또는 고리대금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알아보면 그 후 자본주의 시대를 이해하는 데 많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성경에서는 돈놀이에 대한 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자.

"너희 가운데 누가 어렵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 주게 되거든 그에게 채권자 행세를 하거나 이자를 받지 말라."(출애급기 22:24)

"너희 동족 가운데 누가 옹색하게 되어 너희에게 의탁하게 할 신세가 되거든, 너희는 그를 몸붙여 사는 식객처럼 붙들어 주고 함께 데리고 살아라. 너희는 그에게서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한다. 너희는 그에게 이자돈도 놓지 못하고 그에게 양식을 장리로 꾸어 주지도 못한다."(레위기 25:35~37)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 (루가복음 6:36~38)

이외에도 교회법전에서도, 설교집에서도, 돈놀이와 고리대금에 관한 지적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1187년 교황 우르바누스 3세의 교령(콘술루이트)에 나온 내용이다. 

- 고리는 대부의 대가로 빌려 준 것을 초과하여 요구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 고리를 취하는 것은 구약과 신약이 금지한 죄악이다.

- 준 것 이상의 것을 돌려받기를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죄악이다.

- 고리는 그것의 진정한 소유주에게 완전히 반환되어야 한다.

- 외상 판매에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는 것은 암묵적인 고리 대금이다.

그럼 왜 이렇게 중세시기 교회는 돈놀이나 고리대금을 죄악이라고 평가했을까.

첫째, 소득이나 부는 기본적으로 '노동'에 의해서 창출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둘째, 간단히 이야기해서 집회서(31:5)에 나온 "황금을 좋아하는 사람은 의로울 수가 없고 그것을 따르는 자는 속속들이 썩게 된다"고 하는 것과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24)의 내용을 통해 재물에 대한 교회의 관념이 크게 작용하였다.

셋째, 이런 인식들 즉, "죄(罪)들도 가끔은 잠들기 마련인데, 고리돈은 쉬지도 않고 죄를 짓는구나. 주인이 자고 있을 때도 고리돈 자신은 잠들지 않고 쉴 새 없이 불어나고 올라간다."와 창세기에 나온 하느님도 일주일 중 6일을 일하고 하루를 쉬었는데, 이자돈은 일요일도 쉬지 않고 일한다는 생각에 따라 이자가 하느님 뜻에 어긋난다는 생각을 하였다.

넷째, 돈놀이 또는 고리대금에 대한 기본적 인식은 절도 행위 또는 노략행위라는 생각이 매우 컸다. 무엇을 훔쳤을까? 그것은 고리대금이라는 돈놀이는 하느님의 소유물을 훔쳤다는 점에서 유난히 가증스럽기에 더욱 하느님앞에 커다란 죄를 지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그는 돈을 빌려 주는 시점과 이자를 붙여서 되돌려 받는 시점 사이에 흘러간 시간 말고 무엇을 판다는 말인가? 시간은 오직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므로 시간을 훔치는 고리대금업자는 하느님의 재산을 훔치는 것이 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고리대금업자가 채무자에게 파는 것 중 자신이 소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단지 하느님에게 속한 시간을 팔 뿐이다. 남의 재산을 팔아 이득을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이외에도 요즘 동성애자를 비난하는 기독교인들의 생각처럼 수나귀가 수나귀를 낳거나 암노새가 암노새를 낳은 것이 신의 뜻에 어긋나듯이 돈이 돈을 낳는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어긴다는 생각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하였기에 고리대금업자는 일반적인 죄보다 더욱 큰 죄를 하느님에게 저지른 것이 되기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은 점점 약화되어 간다.

그 이유는 12세기 이후 경제규모가 커지게 되고 13세기와 14세기에는 화폐경제가 활성화되기에 이르른 시점에는 무조건 돈놀이를 악으로 규정짓기에는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그 이전까지는 기독교인들보다는 유대인(예수를 죽인 민족이기에 고결한 행위를 하기보다는 돈놀이를 능히 할 수 있는 민족으로 간주되었다)이 주로 하던 고리대금업에 기독교인들도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더불어서 약간의 이자를 받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 아니겠냐는 인식이(돈을 빌려주고 그것을 받기 위해 열심히 장부정리하고 투자를 고민하고 등의 행위) 들면서 이자가 비싸지만 않으면 서로 이익이 되기에 충분히 돈놀이는 가능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시대 인식에는 돈놀이는 철저히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 처하는 죄악이었기에 아무리 선량하게 돈놀이를 하였더라도 죽은 후 가게 될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 고리대금업자로 하여금 엄청난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것을 일거에 즉, 하느님을 섬기면서도 재물을 탐할 수 있고 게다가 지옥에 빠지지 않을 길이 열리게 되는 역사적 전환점이 일어나게 된다.

바로 연옥의 탄생이다. 아니 연옥의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있는 사후세계에서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그 이전까지는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의 구분이 명확하면서 애매한 점이 있었다. 선한 사람은 천국으로, 악한 사람은 지옥으로라는 단순한 것으로 인간 사회는 구성되어 있지 않다.

선인이 악한 일도 하고 악인이 선한 일도 하는 경우에 죽음에 이르러서는 판단이 애매할 수 있었다. 죽자마자 바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테스트 기간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이때 이들이 하느님의 판단을 기다리는 동안 머무르는 곳이 바로 '연옥'이었다. 이 연옥에서는 세상에 남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착한 일을 하고 그를 위해 기도를 하게 되면 일정한 수습기간을 거쳐서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이용하여 가톨릭에서는 '면죄부'를 많이 팔아 커다란 이득을 챙겼지만 말이다. 성경 어디에를 봐도 '연옥'이라는 개념은 전혀 없다.

하여간 이 연옥을 발명한 후에 아무리 고약한 고리대금업자도 남은 가족들이 벌어놓은 재산으로 선행을 하거나 그를 위해 교회에 막대한 돈을 바치면서 기도를 하게 되면 그는 연옥에 머물다가 천국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이것만이 아닌 당시 경제상황에서 투자규모가 크고 불확실성에 대한 계산들이 어우러져서 그에 대한 보상의 차원으로 이자에 대한 개념도 함께 바뀌게 되는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적 경제가 비로소 도덕적, 종교적 정당성을 얻어 중세의 경제체제를 흔들면서 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재물을 탐하는 것은 하느님을 섬길 수 없는 일이며, 하느님의 재산인 시간을 훔친 자이다. 지옥에 떨어질 고리대금업자는 아무리 죄인이라도 연옥을 통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생겼기에 돈놀이 또는 고리대금업은 활성화하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돈과 구원은 양립할 수 없었지만 연옥을 통해 구원을 받을 길이 열렸고, 이 길을 통해 자본주의는 비로서 날개를 달았던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기독교인들은 고리 대금업을 하면서, 아니 요즘시대에 금융업을 하면서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연옥에 들어가서 그에 상당한 고통을 당한 후에 천국에 가야 한다. 따라서 금융을 통해 돈을 번 기독교인들은 죽기 전에 그렇게 해서 번 돈을 모두 돌려주거나 남은 가족들이 선행을 통해서 그가 죽은 후에 열심히 기도를 해야만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까?

아니면  이미 신은 죽었고 천국은 없기에 돈만 많으면 이 세상이 천국이니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약탈적 대출을 통해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가중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다른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굳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더라도 돈놀이에 대한 우리 인식에 중세인들이 갖고 있었던 생각을 한 번 해봐야 하지 않을까.

돈과 구원/자끄 르 고프/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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