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인물탐구> 안상수와 송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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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인물탐구> 안상수와 송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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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5.13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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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역경을 딛고 오늘까지 왔다"

   


   인천시장 선거는 이른바 '창과 방패'라는 표현으로 압축된다. 그만큼 팽팽한 접전으로 '공격'을 하는 쪽과 '방어'를 하는 쪽이 맞선다는 의미다. 안상수 대 송영길. 두 사람의 '열전'은 숨막히게 진행된다. 안상수와 송영길을 들여다 보자.

   ◇ 안상수

   한나라당 안상수 인천시장 후보는 6.2 지방선거를 통해 3선 시장에 도전한다.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의 성공적 개최, 인천경제자유구역 2단계 사업, 구도심 활성화 등 인천의 각종 현안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지방선거 출사표를 던졌다.

   1946년 충남 태안에서 가난한 어부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2살 되던 해 인천 서림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후 안 후보는 인천중, 경기고, 서울대에 진학했으나 가정교사, 신문배달, 월부 책 판매 등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렵게 학사모를 썼다.

   안 후보가 학창시절 겪었던 어려움은 사회진출 이후 경영전문가로서 역량을 쌓는데 밑거름이 됐다.

   안 후보는 1975년 제세산업에 입사해 회장 비서실장을 지냈고, 1980년 동양증권에 들어가 채권투자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며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1990년대 도미, 당시만 해도 생소한 선물분야 국제거래사 자격증을 획득했고, 동양선물 미국 시카고 현지법인 대표이사, 데이콤 이사, 동양그룹 종합조정실 사장을 지내며 성공한 전문경영인 반열에 올라선다.

   미래가 보장된 기업을 떠나 정치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96년. 신한국당 전문경영인 영입케이스로 정치권에 입문했지만, 그의 정치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15대 총선에서 인천 계양.강화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98년 인천시장 선거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1999년 6.3 보선에서 현재 민주당 인천시장 후보인 송영길 의원을 누르고 국회에 입성했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선 송 의원에 밀려 낙선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권토중래 끝에 그는 2002년,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인천시장 후보로 나서 재선에 성공했고, 이번에 3선에 도전한다. 그는 "인천 백년대계 사업을 이끌기 위해선 전문경영인 출신 현직 시장이 적임자"라는 점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3선에 도전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정치인생을 지탱해온 배경에는 병석에 있는 아내와의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안 후보는 "아내를 보며 가슴 아팠던 기억이 오늘의 저를 바로 세웁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안 후보 부인 정경임씨는 결혼 1년6개월 만인 1984년 희귀질환인 `모야모야병'으로 쓰러졌고, 한때 병세가 기적적으로 호전됐지만 1999년 여름 과로가 겹치면서 또다시 재발해 현재 식물인간 판정을 받고 병석에 누워 있다.

   안 후보는 현재도 시청 앞 병원에 입원 중인 아내를 수시로 병문안하며 애틋한 정을 나누고 있다.

   ◇ 송영길

    "꼬마전구일지라도 스스로 빛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민주당 송영길 인천시장 후보가 항상 자신에게 되뇌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큰 힘에 연결돼야 빛이 들어오는 전등이 아니라 역사와 민족 앞에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자주적인 인물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실제로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송 후보는 이른바 운동권 출신의 인권변호사였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4년 연세대 초대 직선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그는 이듬해 집시법 위반으로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이후 인천에서 건설현장 배관용접공, 택시기사 등을 하며 7년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나이 서른에 사법시험에 도전,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인천에서 인권.노동 변호사로 뛰며 노동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1999년 인천 계양에서 재보궐 선거에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돼 처음으로 금배지를 달았고, 2008년 18대 총선에서 386 의원들이 줄줄이 낙선하는 가운데 3선에 성공했다.

   2001년 정풍운동, 2005년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출마, 한미FTA(자유무역협정) 찬성과 대북송금 특검 반대 등 정계 입문 후 이어진 그의 거침없는 소신 행보는 그를 386의 대표선수로 만들었다.

   하지만 당 안팎을 가리지 않고 화살을 겨누며 쓴소리를 하는 그에겐 "건방지다.", "지나친 비판이다."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에 그는 옳다고 믿는 것은 밀고 나가는 `황소'같은 스타일 때문이라고 반론을 편다.

   그는 최근엔 `신(新)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공개적으로 대권의 큰 꿈을 얘기했다. 그리고 그 징검다리로 서울시장 출마를 생각했다. 하지만 당의 요청에 인천시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후보 수락 연설에서는 "야권의 단합으로 이명박 정부를 심판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을 바꿨듯 인천을 바꿔 한국의 심장으로 만들겠다."라고 했다.

   인천을 변방이 아닌 대한민국의 경제수도로 만들겠다는 구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민족경제공동체'라는 큰 그림의 일부이기도 하다.

   송 후보는 동북아 지역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정치인이 되겠다는 포부로 앞서 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일어일문학과에 편입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치인으로서 스스로 빛나겠다는 원칙은 생활인 송영길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그는 딸과 아들에게 "너희들에게 남겨줄 유산은 없다. 다만 자립할 수 있는 공부는 시켜준다."라고 얘기한다. 스스로도 "전세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행복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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