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 '살곶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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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 '살곶이다리'
  • 이창희
  • 승인 2013.10.0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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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대로 재 복원 공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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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곶이다리는 1967년 12월 15일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12월 23일 보물 제1738호로 승격되었다.

한천(현재의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 한강을 약 2km 앞둔 곳에 놓여졌으며, 현재의 서울 성동구 행당동과 성수동의 경계에 있다. 조선시대의 가장 긴 다리였다고 하며 원래 이름은 제반교였고 일명 살곶이다리라고 한다.

1420년(세종 3) 세종의 명령으로 영의정 유정현과 공조판서 박자청이 감독하여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강의 너비가 너무 넓고 홍수를 이겨내지 못해 교기만 세우고 중지하였다가 63년 후인 1483년(성종 14)에 완성하였다. 길이 78m(258尺) 너비 6m(20尺)였다. 높이 1.2m인 기둥을 네 줄로 세운 위에 받침돌을 올리고 대청마루를 깔듯 세 줄의 판석을 빈틈없이 깔았다. 가운데 두 줄의 교각을 낮게 하여 다리의 중량을 안으로 모았으며, 돌 기둥에 무수한 흠집을 새겨놓아 물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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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도성에서 동남쪽으로 경상도 봉화에 이르는 간선로 위에 놓여 있었다. 즉 동대문이나 광희문을 통해 도성을 벗어난 후 만나는 큰다리로서 그 후 송파진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충주 방면으로 연결되었다. 국왕이 군사훈련 참관 등을 위해 뚝섬으로 행차할 때도 이용하였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다리 절반의 석재를 가져다 쓴 후 버려져 있었는데, 1972년 서울시에서 복원하였으나 원형 그대로 복구되지는 못하였다.



위 하천은 중랑천 개울이 성동구 행당동과 뚝섬 사이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다가 방향을 돌려서 서쪽으로 접어든 곳에서 얼마 안되는 지점에 사적 제160호인 살곶이다리가 남아 있다. 애초에는 제반교라고 하였다. 다리 구조는 기둥을 가로 4열, 세로 22열로 버텨 세우고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위에 다시 동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하고 좌우의 가장자리를 장대석으로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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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둥돌 아래에는 네모난 돌주초가 있고 그것을 물 속 맨 밑바닥에서 받침돌이 받치도록 하였다. 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하여 마름모꼴로 다듬었다. 전체적으로 같은 모양의 돌다리인 수표교에 의하면 공법이나 기법에 있어서 조잡한 법이지만, 교각의 횡방 종방, 교관석의 구성과 형태가 조화롭고 건실하게 짜여졌다.

또 각부의 석재가 길고 크며 질박해서 수표교보다 호쾌한 기품을 풍긴다 지금의 보존 상태는 몹시 좋지 않은 상태이다 일제 시기인 1913년에 보수를 한답시고 바닥에 콘크리트를 15cm나 깔았었고 1925년 을축년 큰 장마에 그 일부가 유실된 채 방치되었다가 1971년경에 겨우 유실된 부분을 꿰맞추고 바닥에 입혔던 콘크리트를 걷어낸 상태이어서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가장 크며 480년의 역사가 어린 돌다리이건만 제모습을 잃어가고 있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왕의 살곶이다리는 광나루로 해서 강릉으로 가거나, 삼밭나루, 송파나루로 해서 태조의 헌릉과 순조의 인릉을 참배하고자 할 때 또는 뚝섬나루를 거쳐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과 봉은사를 찾아 가자면 반드시 이 돌다리를 건너야만 했을 만큼 교통상 매우 긴요한 길목이었다. 살곶이다리는 성종 때 시공하였으나 완공된 것은 중종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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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총화』권9에 "어느 중이 살곶이다리를 놓을 때 돌 만석을 떠다가 큰 내를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다. 그 길이가 300보 남짓 되며 튼튼하기가 집덩이와도 같아서 사람들이 마치 평지를 밟는 것처럼 걸어 다녔다.
 
성종 임금이 그의 재능을 알고 이 다리를 놓게 하고는 관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곡식과 포목을 많이 내려 주었건만. 비용만 들이고 몇 해가 지나도록 겨우 다리 가둥을 세웠을 뿐 공을 이루지 못해서 성종 임금께서 끝내 이 다리를 밟아보지 못하였다. 모든 관리들이 이를 가슴아파하였다. 그 뒤에야 살곶이벌에 큰 다리가 완성되니 다리 이름을 제반교라 하였다.

또 동대문 밖 왕십리벌에 새로 놓은 큰 다리를 영도교라고 하였는데 모두 임금께서 친히 붓으로 써서 지어 주신 이름들이다."라고 한 글을 통하여 그 당시의 경위를 알 수 있다. 한편『동국여지비고』교량조에서도 "제반교가 살곶이에 에 있는데 길이가 300여 보나 된다. 영도교와 함께 두 다리 모두 중종 임금께서 이름을 지었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살곶이벌 큰 다리가 중종 때에 준공되고 어명으로 이름을 "제반교"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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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리 서쪽 가운데에 걸친 장대석 표면에 병자년이라고 새긴 간지가 눈에 띈다. 중종 11년(1516)이 병자년에 해당되는 만큼 이 해에 다리를 완공하였다는 표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그 옛날 다리 언저리에 도요연이라는 웅덩이가 있었다.『동국여지비고』산천 조에 "살곶이다리에 도요연이 있다."라고 적고 있다. 이 웅덩이에 물고기가 많아서 낚시터로 유명하였다는 듯 웅덩이에 얽힌 일화가『청파극담』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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