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별을 따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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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별을 따줄 수 있다."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4.01.0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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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팝 포엠 12월 시낭송회, <길 위의 식사> 이재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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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팝 포엠 2013년 12월 시낭송회에 초청된 시인은 이재무 시인이었다. 시종일관 우스갯소리와 농담을 섞어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시 낭송회를 진행했다. 약 30명이 모인 낭송회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서로 준비한 1만원 상당의 선물도 교환했다. 이 날 참석한 사람들은 두 시간가량 시에 흠뻑 빠져 시와 인생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재무 시인은 각박한 현실의 삶과 그 고뇌를 인간적인 사랑으로 끌어안고, 이를 정신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시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일상의 현실에 빠져들기 쉬운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깊이와 무게를 지닌 서정시의 본연의 모습을 지켜오고 있는 시인의 노력은 매우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27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이재무 시인은 <길 위의 식사>를 비롯해 아홉 권의 시집을 냈다.
 
시 낭송회는 이재무 시인이 쓴 시 열 편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시와 마지막 시는 시인이 직접 읽고, 나머지 시는 참석자들이 시를 읽었다. 시 한 편을 낭송하면 시인이 자신이 그 시를 쓰게 된 동기와, 시에 얽힌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시인은 참여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비유와 재치있는 입담으로 시 낭송회 내내 웃음과 즐거움을 주었다.
 
다음은 낭송회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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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
 
갓 지어낼 적엔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서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중 2 교과서에 수록된 시다. 구태여 설명 없이 쉽게 소통되는 시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음식’과 관련된 시를 30편정도 썼다. 한 번도 의도하고 쓰지는 않았고, 쓰다 보니 많이 쓰게 됐다. 무의식중에 음식에 대한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나는 농사꾼 출신이고 먹는 것이 풍족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백석 시인과 안도현 시인도 음식과 관련된 시를 많이 썼더라. 어떤 연구자가 내가 쓴 음식에 관한 시를 작은 논문을 썼는데, 그가 말하기를 다른 시인들이 쓴 음식에 관한 시는 단순히 소재로 썼는데, 자화자찬이지만, 뭔가 사회적인 문제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더라고 했다.
 
내가 쓴 시에 <라면을 끓이다>라는 시가 있다. 그 시도 <밥알>과 일맥상통한다. 라면을 끓이기 전에 상태는 견고하고 사각이다. 라면가닥이 서로 스크럼을 단단히 짜고 있다. 이 라면을 100℃에 넣자마자 스크럼을 풀고 깍지를 푼다. 따로 풀리면서 자기 몸을 불린다. 이는 어찌보면 이 사회에 나타난 지표일 수도 있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단단한 결속력을 강화하고 과시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익 앞에서는 깍지도 풀고 스크럼도 푼다. 반성적인 성찰 속에서는 나도 포함된다.
 
마찬가지로 <밥알>도 초심을 잃으면, 이기주의 현상을 가져올 수 있다. 그걸 경계하는 차원에서 썼다. 애초에 맺었던 초심, 순수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차원에서 썼다. 이를 둘러싼 해석은 각자 다양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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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서 본 사람은
알리라 바람의 속도와
비의 깊이를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흔들리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정확히 알리라
세상 옳게 이기는 길
그것은 바로
바르게 서서 푸르게 생을 사는
자세에 있다는 것을
 
-어렸을 때는 보리밭을 자주 만났다. 사립문만 나서면 만났다. 하지만 요새는 힘들다. 10년 전인가, 목포를 놀러갔다가 강진만을 둘러봤다. 남도1번지, 다산초당을 비롯해 유적지가 많다. 우연히 보리밭을 만났는데 참 반가웠다. 어릴 때 추억이 많이 어린 곳이다. 요샌 밥집에 많다. 누군가 쓴 시에 있을 뿐이고, 만나기 힘들다.
 
보리는 다른 식물과 다르게, 가을에 파종해 겨울에 자라고 초여름에 수확한다. 6월초에 수확한다. 동의보감에 보면 음의 식물이기 때문에 양의 계절인 여름에 먹어야 효능이 있다고 했다. 보리밭은 겨울보다는 여름에 먹는 게 좋다고 한다.
 
보리는 농사꾼의 속성과 닮아 있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곡식이다. 겨울에 살기 때문에 인내심이 강하다. 밟아줘야 더 푸르게 자란다. 대단히 생명력이 강하다. 추수할 때 보면, 꺼끌꺼끌한 게 옷 속에 들어오면 파고든다. 농사꾼의 성깔이 아닌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 보리는 농사꾼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박용래 시인의 <점묘>라는 시를 꼭 한 번 읽어봐라. 점묘는 어떤 고정된 대상을 사실에 가깝게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박용래 시인은 보리 추수하는 광경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마치 언어로 그림을 그리듯이 표현한 게 있다.
 
<밥알>과 주제는 차이가 없다. 나이가 들수록 속물화하고, 자기합리화, 자기변명이 늘어난다. 거기에는 자기이익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밥을 둘러싼 싸움이 많다.
 
그리고 시인이 쓰는 시가 시인의 삶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어떤 경우는 시인이 그렇게 살지 못해서, 자기가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복원하기 위해 쓰기도 한다. 물론 자신의 삶과 시가 같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자신을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경우가 많다.
 
지금 내 나이가 많지만, 이 시를 쓸 때는 나름대로 그린벨트 수준이라고 생각할 때 썼다. 지금이야 재건축, 리모델링하는 수준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할 때 쓴 시다.
 
 
감나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감나무와 한국 사람은 친하다. 감나무, 참나무는 한국 사람과 친하다. 나는 감나무, 참나무와 친하다. 미루나무도 많이 썼다. 무려 네 편이나 쓴 시는 팽나무다. 감나무는 두 편, 참나무는 두 편을 썼다. 여러분과 추억이 두껍게 많은 시를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시는 자기와 가장 친숙한 소재를 정할 때 잘 써준다.
 
어느 시인은 감나무로만 쓴 시를 두 권으로 묶기도 했다. 거기에 수록된 시말고도 많을 것이다. 제목이 다 감나무더라. 러시아 형식주의에서처럼, 여러분도 ‘낯설게 하기’ 즉, 친숙하고 낯익은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서 쓰면 된다.
 
최종천 시인이 쓴 <15촉>이라는 시도 있다. 우리 집에 열린 감알은 5촉인데, 이웃집 감은 우리 울타리를 넘어왔어요, 남의 집 감나무가 금기의 대상이야 따먹기 힘들다. 그 감알을 15촉이라고 표현했다.
 
도시를 떠나서 도시의 주변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쓴 시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했다.
 
 
신도림역
 
검고 칙칙한 지하선로
살찐 쥐 한 마리 걸어간다
누군가 검붉은 침을
아직 불이 살아 있는 담배꽁초를
그의 목덜미께로 뱉고 던진다
쥐는 동요하지 않는다
전방 오백 미터 화물열차가
씩씩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그는 동요하지 않는다
선로를 가로질러 태평하게 저 갈 곳을 가는
그는 나보다도 서울을
잘 살고 있다
한 무리의 쥐들이 열차에 오르고 있다
 
-신도림이 참 상징적인 역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역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종말론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다. 혹시 이름과 상관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신이 도림한 역이다.(웃음) 이 시는 20년 전에 수원 변두리인 율전에 살았을 때, 밤밭골이라고 불리우는 곳이다. 그때 영등포에서 입시학원 강사를 했다. 한때 잘 나가는 강사여서 돈을 좀 벌었다. 6년 동안 열심히 벌어서 소형아파트를 샀다. 그러고는 딱 때려쳤다. 그런데 시 때문에 너무 괴로웠다. 돈을 벌어도 마음 한쪽이 불안했다. 아파트를 구입하고는 때려치고, 동대 대학원을 갔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40만원을 벌었다. 그후 유혹이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손을 씻어도’ 계속 유혹이 왔다. 그 당시만 해도 시인이 학원강사를 하면 안 좋게 생각했다. 시 쓰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신도림에서 수원행 전철을 기다리는데, 쥐 한 마리가 선로를 가로지르는데 참 여유있어 보였다. 쥐가 나보다 서울생활을 잘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마지막 행이 사실 전달에 멈추지 않고 표현해서 시를 살게 했다. 신도림에서 차를 갈아타는 수많은 사람들이 상경파였을지도 모르고, 마음은 언제나 서울에 진입하고 싶은 소시민의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서울쥐처럼 서울 삶의 논리에 재빨리 적응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썼다.
 
지금은 서울에 살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다. 내가 쓴 <똥파리>라는 시가 있는데, 똥파리에는 나도 들어간다. 시골 뒷간에 보면 구더기들이 올라오는 걸 볼 수 있다. 그 구더기들은 마침내 파리가 된다. 하지만 결국 떠나지 못하고 측간을 떠돈다. 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찬가지로 나도 수원에 살면서 서울 진입을 꿈꿨다. 아이들한테 열정을 품고 강의하는 것같지만, 아이들이 돈으로 보이고, 날개를 달자, 결국 아파트를 사고 서울 사람이 되었다. 시인은 모든 사람이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낙원이라고 하는 곳을 정말 그럴까 하고 생각해야 한다. ‘시비’를 거는 존재, 삐딱한 존재가 시인의 사유 방식이 아닌가. 플라톤의 이상국가 건설에서도 시인은 방해요소가 있다고 봤다. 시인은 출세하는 자보다는 비정규직이 많다.
 
 
꽃그늘
 
꽃그늘 속으로
세상의 소음에 다친 영혼
한 마리 자벌레로 기어갑니다
아, 그 고요한 나라에서 곤한 잠을 잡니다
꽃그늘에 밤이 오고
달 뜨고
그리하여 한 나라가 사라져갈 때
밤눈 밝은 밤새에 들켜
그의 한 끼가 되어도 좋습니다
꽃그늘 속으로
바람이 불고
시간의 물방울 천천히
해찰하며 흘러갑니다
 
-이 시는 현실도피적인 경향이 있다. 정서적으로 보면 시인은 변덕이 심하다. 아침에는 꽃을 보고 환희를 느끼다가 저녁에는 절망을 느끼기도 한다.
 
이 시는 패배적인 정서가 있다. 시대상황과 연결이 됐다. 세상 사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어떻게 바라는 세상이 되질 않나. 불의에 대해 싸워볼까 하고 의기충천했다가도, 갑자기 무기력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것이 반복된다. 수시로 변덕을 부린다. 현실 도피적 정서가 많았을 때 쓴 시다. 꽃그늘 속에서 현실과는 상관없이 나만 자족하고 살고 싶다, 시대상황과 연결해 해석하면 된다.
 
 
위대한 식사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러 널브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드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기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뿐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시인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별을 따줄 수 있다. 일반인은 따줄 수 없다. 시인은 날이 좋은 날 바가지 하나만 있으면 별을 따줄 수 있다. 기차를 타고 시골에 가면 된다. 시골 벌판에서 바가지에 물을 담아 서 있으면 바가지에 별이 뜬다. 연인에게 그 별을 먹으라고 하면 된다. 한 바가지의 물을 마시면 별을 마시는 것이다. 별은 소화가 되지 않아 너무 많이 마시면 탈이 난다.(웃음) 여름날에 논두렁을 걷다 보면, 바짓가랑이에 이슬이 묻어 있다. 이슬이 묻은 바짓가랑이를 잘 보면 별이 매달려 있다. 집에 와서 마루나 뜰방, 지금으로 따지면 현관 같은 데서 바짓가랑이를 털면 별이 우수수 쏟아진다.
 
시인은 면책특권이 있는 거짓말쟁이다. 종교인이나 정치인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만,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여름날 농사꾼들이 일을 끝내고 저녁을 먹는 광경을 표현했다. 반찬종류가 많은 것같지만, 파김치, 물김치 등 김치종류다. 밥상 한가운데 민물새우탕이 있다. 저수지에 가서 잡은 것이다. 소쿠리 밑에 된장주머니를 달고 나중에 건져올릴 때 튀지 않게 돌멩이를 매달아 놓는다. 부지깽이도 일할 만큼 바쁜데 애들이라고 그냥 놀기만 하면 안 된다. 민물새우는 다시 된장을 넣고 끓여야 맛있다. 말하자면 된장 밝히고 죽은 민물새우는 다시 된장에 끓여야 맛있다. 이때 애호박을 돌팍으로 팍 찍어 넣어서 맛있다. 하지만 자기 집 애호박은 맛이 없고, 남의 집 애호박은 맛있다. 남의 집 담장을 땀을 뻘뻘 흘리며 기어오른 애호박을 꼭지를 비틀어 몰래 소쿠리에 담아온다. 사립문을 딱 들어서다가, 뜰방에서 식구들을 위해 미리 오신 엄마가 몸빼를 수건으로 먼지를 탁탁 털다가 애를 본다. 그때 소쿠리에 애호박이 있는 걸 보고 우리 집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이눔의 새끼, 급살할 놈, 남이 농사 지은 걸 따오면 어떻게 하냐.” 하지만 표정이 상당히 밝다. 악동이 안다. 엄마의 말 뜻은 왜 세 개만 따왔냐, 내일 또 따오너라….(웃음) 그런 게 반어법이다. 시에서 많이 쓰인다.
 
시에 우렁된장이 들어 있다. 우리만 식사에 참여한 게 아니다. 별, 달… 우주의 구성요소가 다 들어있다. 어려서 내가 산 곳은 행정구역상 부여지만, 실제로 물리적 거리는 논산이나 강경이 가까웠다. 옛날 기차가 오가면 기적소리가 들렸다. 개구리 울음소리도 들어 있다. 이걸 다 먹었다. 실제로 풍요로운 식사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식사인가. 지금은 기름진 식사가 얼마나 많나. 하지만 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다.
 
가을날 사과나 배는 맛있다. 농사꾼의 노고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과일에 맺힌 이슬 속에는 별도 들어 있는 것이다. 별맛도 들어가 있고 새 소리도 들어가 있다. 과일맛은 모든 우주가 참여해서 만든 것이다. 그게 시인의 상상력이다. 인간 위주, 인간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자연의 관점에서도 바라봐야 한다.
김용택 시에도 과일 속에 벌레가 있다는 시가 있다. 벌레를 탓할 일이 아니라, 과일이야말로 벌레의 집이자 벌레의 양식이다. 우리가 벌레의 집이나 벌레의 양식을 침탈한 것이다. 시골에서 멧돼지가 나타나면 멧돼지를 혐오하고 싫어한다. 멧돼지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뉴스에도 나오고 총으로 쏴죽이지만, 멧돼지 입장에서 보면 삶의 영역을 빼앗긴 것이다.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 너무 익숙하다. 물론 멧돼지가 나타나면 총으로 쏴죽일 수밖에 없지만, 시를 쓸 때만큼은 그 입장이 돼야 한다.
 
 
국수
 
늦은 점심으로 밀국수를 삶는다
펄펄 끓는 물 속에서
소면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
신혼 적 아내의 살결 같구나
한결 부드럽고 연해진 몸에
둥그렇게 몸 포개고 있는
결연의 저, 하얀 순결들!
엉키지 않도록 휘휘 젓는다
면말 담긴 멸치국물에 갖은 양념을 넣고
코 밑 거뭇해진 아들과 겸상을 한다
 
친정 간 아내 지금쯤 화가 어지간히는 풀렸으리라
 
-이 시를 쓰려고 사전을 찾아봤다. 다 아는 말이지만, ‘국수’를 찾았더니 ‘결연’이라는 말이 있더라. ‘맺을 결’, ‘인연 연’… ‘인연을 맺어라’는 뜻이다. 국수를 먹고 그릇을 포개놓으면서 인연을 맺는다. 생일날에 먹는 이유는 오래 살라는 뜻이다. 두 가지 차원에서 국수를 먹는다.
 
밥알, 국수 라는 시가 발상이 비슷하다. 먹다 남긴 면발은 퉁퉁 분다. 관계의 면발이다. 오래 되면 먹게 될 수 없다. 사물 속에서 삶의 원리, 관계의 현상을 말할 수 있다. 홍상수 감독처럼 ‘생활의 발견’처럼 내 시는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구한 게 많다. 낯익고 진부하지만,낯설게 하기를 사소하지만 찾아본다. 사실 경험을 재현한 게 아니라, 재구성한 것이다. 없는 사실은 굴절시킨 것이다. 얼마든지 상상 속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국수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잔치국수지만, 대충 양념해서 먹을 정도로 국수를 좋아한다.
 
 
좋겠다, 마량에 가면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 장단에 철 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에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 냈으면,
 
-중년들이 많이 좋아하는 시다. 일부일처제는 서구 유럽에서 약 300년 전에 생겼다. 세계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윤리가 된 것이다. 미래사회는 예측하기 힘든 결혼제도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아무튼, 문학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못한 걸 상상할 수도 있다. 시는 윤리나 도덕이나 종교가 아니다. 문학은 윤리가 아니다. 일종의 일탈 욕망, 탈주 욕망을 드러나는 게 문학이다. 최근에는 자기검열이 심해서 이런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 걱정을 많이 한다. 그러다보니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좋은 얘기만 쓰는 건 재미가 없다. 시는 고통의 산물이고 부재의 산물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시로 쓰는 것이다. 마음 속에서는 무엇이든 저질러 봐라. 마음에서 못하면 현실에서 저지르게 된다. 윤리는 비행기를 타고 다섯 시간만 가면 비윤리가 된다. 티베트에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은 형수를 데리고 살아야 한다. 그게 윤리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러면 큰일난다. 이게 윤리다. 윤리는 상대성이고 가변성을 띤다. 공간이나 시간에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칸트의 <미학이론>에 보면 절대윤리가 있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끔찍한 장면을 봤을 때 즐거워해서는 안 된다. 그건 비윤리다. 사유는 자율적으로 해야 한다.
실재 현실에서 가능하지 못한 일탈 욕망을 시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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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식사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작년에 소월시문학상 받은 시다. <위대한 식사>는 가난했지만 식사공동체를 이루고 나름 풍요로운 식사였다. <길 위의 식사>는 혼자서 먹는 외로운 밥이다. 실제 소재는 비닐에 든 삼각김밥이다. 제 직업이 비정규직이다 보니까 길 위에서 식사를 많이 하고, 길 위에서 시를 많이 썼다. 기차 안에서,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썼다. 그동안 9권의 시집을 내고, 한 권은 준비 중이다. 지금까지 쓴 시를 돌이켜보면, 길에서 차에서 시를 많이 썼더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책을 읽지 못하고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지방대학에 가서 빈 시간에 시간을 때우면서 시를 썼다. 어찌보면 설움이 들어있는 시다. 비정규직은 참 많다. 밥은 사상이고 철학이고 계급이다. 밥에 대한 인식과 의미는 남다르다.
 
우리 식구는 식사하는 시간대가 다 다르다. 일주일 동안 함께 먹는 경우가 많지 않더라. 여러분은 가족 구성원은 일주일에 한 번은 밥을 먹어야 한다. 이 시는 밥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면서 썼다.
 
 
클라우드
 
나 한때 구름을 애모한 적이 있지
하늘 정원에서 장엄한 몽상이 감미롭던
황금의 시간대에는 지상의 가난이 슬프지 않았지
신전에 꿇어앉아 세상 주유를 설교하는 구름의 복음 새겨들었지
변신의 귀재인 그녀들을 재빠르게 마름질해
입은 바지로 숨차게 들길 달리던 시절
갑작스럽게 찾아온 열애로 내 몸은 자주 꽃을 피웠지
구름밭엔 얼마나 많은 비밀의 씨들이 살고 있는지
날마다 다른 형상을 꽃피우는 공중을
꿈꾸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자유로이 넘나들었지
그러나 나 이제 구름을 꿈꾸지 않네
이교도처럼 불신하여 구름에 속지 않으려 애쓸 뿐이네
2011년 3월 11일* 이후
구름은 내게 저주의 신이 되었네
내 마음속 어머니의 나라에서 평화롭게 뛰놀던 몽상의
아이들 한꺼번에 자취 없이 사라져버렸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있던 날
 
-순수한 우리 말 ‘구름’이 있는데 왜 ‘클라우드’라고 썼을까. 이 시를 처음 썼을 때는 2011년 3월 11일을 쓰지 않았다. 엉뚱한 해석들이 많아 할 수 없이 주를 달았다. 이 시를 쓰기 두 달 전에 <클라우드>라는 제목의 독일 영화가 있었다. 원전의 피해를 가상해서 만든 시다. 원전의 재앙이 이토록 무서운지를 보여준 영화다. 제목을 <클라우드>라고 정한 건 상호 텍스트로 사람들이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 있다.
 
 
 
다음 달은 박관서 시인이 철도노동자로 살아온 시인의 이야기와 철도민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 낭송회는 1월 28일(화) 오전 11시에 구월동 모래내시장 옆에 있는 리스팝 포엠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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