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샌 '밥보다 된장이 많아서' 걱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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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샌 '밥보다 된장이 많아서' 걱정이야!"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4.01.21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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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헌책방거리 64년을 지켜온 <집현전> 오태운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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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보다 된장이 많다’고, 요새 사람들은 책을 사러오는 것보다 책을 많이 팔러 와요. 사람이 밥을 많이 먹어야지 된장만 먹으면 너무 짜잖아요. 책을 사가서 읽어야 하는데…, 요샌 살기가 힘든가 봐요.”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헌책방을 하고 있는 오태운 할아버지(88) 말씀이다. 올해로 64년째 <집현전> 헌책방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나면서 배다리거리는 참으로 북적댔다고 전하신다. 전쟁통에 책이 없어져 헌책을 구하러 온 사람이 참 많았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를 만나 배다리 헌책방 거리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들어봤다.


-이 골목에서 오랫동안 헌책방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가게를 시작하셨나요.
“1951년도, 전쟁 중에 책방을 시작했어요. 창영교회에 있던 장로 한 분이 하라고 소개해준 거죠. 그 분은 지금 돌아가셨지만, 고향사람이고, 우리 형님의 친구였어요.” 

-1951년이면 전쟁 중이었을 텐데, 이 주변은 어땠나요.
“그때는 책방이 없었죠. 이 주변은 다 잿더미였죠. 건물 저런 게 어딨어요? 배다리 건물 쪼르르 지은 거 전부 다 불타서 잿더미였어요. 전쟁이 끝나면서 이게 네 땅이다, 내 땅이다 하면서 잿더미 위에 말뚝 박아놓고 새끼줄로 네모다랗게 쳐놓고 ‘내 땅이다’ 했어요. 그렇게 해서 건물 잡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때는 땅임자가 없어요. 배다리 건물이 지금이야 많지만 그때는 다 타고 없었죠. 그때만 해도 내가 욕심도 없었고, 그걸 몰랐어요. 잿더미 위에 말뚝 박고 새끼줄 사각으로 쳐놓고 내 땅이다 하고 차지할 건데.”

“처음에는 점포가 없어서 노점장사를 했어요. 문화극장 있던 데 앞으로 개천이 있었고, 개천 앞 신작로에서 가마때기 놓고서 거기서 책 팔았어요. 한 2년 했을까. 그 다음에 생활이 조금 나아지니까 가게 얻어서, 점포 얻어서 장사했죠. 그때는 창영학교 앞쪽이었어요. 거기에 책방이 참 많았어요. 창영학교 앞에서는 하꼬방(판잣집) 짓고 장사를 했어요. 거기서도 한 2,3년간 했을 거예요. 그러다 큰 길 있는 한미서점 자리에서 하다가, 그후로 몇 번 이사다녔죠. 그러다 지금 이 자리로 와서 2,30년 동안 하고 있죠. 창영학교 앞에 노점상이 참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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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을 시작하실 때는 손님들이 많았나요. 
“1951년에 시작했으니까 64년 했죠. 문화극장 앞 신작로에서 가마때기 펴놓고 할 때는 송림동에서 살았어요. 낮에는 장사하다가, 밤에는 가게 가진 사람한테 책을 맡겼어요. 그때는 헌책이 참 많이 팔렸어요. 헌책장사가 아주 잘 됐어요. 난리를 겪으면서 학생들 책이 다 불타고 잃어버리고 없어졌으니까. 헌책을 살려고 2.30m 쭉 줄을 섰어요. 난리통이지만 내 일생에서 그때가 가장 괜찮았어요. 일하는 맛이 나고 재미있었어요. 전쟁이 막 끝나면서 배다리거리는 사람들로 북적댔어요. 특히 학생들이 헌책방으로 책을 구하러 다들 많이 나왔죠. 책이 있어야 공부를 하니까요.”

“창영학교 앞에서 할 때는 점포가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점포가 없는 사람이 더 많았거든요. 그러니까 다 노점상들이 했죠. 하나둘 동인천 대한서림 뒤로도 노점상이 또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대한서림은 그때도 점포가 있었어요. 노점상 하는 사람들은 다 빈한하고, 가진 건 주먹밖에 없으니까 다 노점상이었죠. 대한민국에 헌책방이 제일 많은 데가 부산 보수동, 인천 배다리, 서울 동대문, 이렇게 전국적으로 굴지에 들었어요. 부산 보수동은 지금도 헌책방이 많아요. 없어지기도 했고. 새 책방, 헌책방 한 70% 없어졌어요.”

-배다리헌책방거리가 예전과 비교해서 요즘은 어떤가요.
“예전에는 거리에 책 사러 오는 사람이 많았어요. 책이 필요하면 여기 아니면 서울로 가야 하니까 많았죠. 그때가 지금보다 경기가 좋았어요. 근데, 세월이 지나면서 변화가 커요. 사람들이 많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사러 나오는 사람보다 팔러 나오는 사람이 더 많아요. 예전에도 책을 팔러나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요즘은 아주 많아진 거죠. 그래서 그런지, 좋은 책은 더 많이 나와요. 학생들도 그렇고 일반인도 많이 팔러 나와요. 그나저나 사러 나오는 사람이 많아야 할 텐데, 팔러 나오는 사람이 더 많아요. 다들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언젠가 인천에서 대홍수 난 때가 있었어요. 그때 1200권을 인천신문사를 통해서 섬 지방에 보내줬죠. 헌책을 팔아야 몇 푼 남나, 이왕 할 바엔 섬으로 보내자고 했죠. 대홍수 난 지는 몇 십 년 됐어요. 섬에서는 책이 귀하잖아요.”

“여기 배다리도 예전에는 비만 오면 난리가 났어요. 비가 얼마만큼 왔다싶으면 길에 빠케스(양동이)가 동동 떠다녔어요. 이젠 하수도 고쳐서 물이 들어오지 않죠. 문 넘어서 물이 들어왔지만, 다행히 책은 젖지 않게 했죠. 여기가 배다리지대가 좀 낮아요.”
 
-철로를 중심으로 가게가 아주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들이 한번에 수십명이나 됐다고 했는데 정말 사람이 많았나 봅니다.
“예전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죠. 이쪽에서 장사하다가 저쪽으로 넘어간 사람도 많죠. 철길 건너를 ‘하인천’이라고 했어요. 여기는 ‘동인천’이에요. 전철 다니는 철길을 기준으로 하인천, 동인천으로 나눈 거죠. 지금은 잘 살고 돈이 좀 있는 데를 하인천이라고 해요. 인천에서 지역상으로 동구가 가장 빈한해요. 빈민이 많아요.”

-<집현전> 책방에는 도감이나 사전 종류 책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도 책방이 여럿 있지만, 도감 있는 데는 많지 않았어요. 손님들이 우리로 왔죠. 대한서림은 새 책을 취급하니까. 갖고 있었죠. 그런 걸 아는 손님은 꼭 찾아와서 식물도감, 곤충도감 등을 사가죠.”

-헌책방을 오래하시면서 세상이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언제인까요. 손님들을 보면서 그걸 알 수 있나요.
“한 15년부터 헌책방은 하향선을 이뤘어요. 지금은 ‘밥보다 된장이 많다’고 사가는 사람보다 팔려고 오는 사람이 더 많아요. 야,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죠. 이렇게 된 게 10년 됐죠. 상행선이 하행선이 돼서, 팔러오는 사람이 많아요. 학생들이 참고서, 교과서, 대학교재를 팔러 와요. 대학교재는 우리가 팔아야 하는데, 사러 나오니 반대가 됐어요. 사서 공부해도 시원찮을 판에 책을 내다파니까요. 책을 봐야 하니까, 토플, 토익 같은 책은 웬만해선 학생들 안 팔거든요. 그런데 막 가지고 와서 팔아요. 밥보다 찬이 많으니 잘못 된 거잖아요. 밥을 많이 먹어야지 힘 쓰고 살지. 밥보다 된장이 많아요. 먹을 때 밥이 많아야지 된장이 많으면 너무 짜잖아요.”

-이북에서 내려오신 지 꽤 되셨네요. 어떻게 혼자 내려오셨나요.
“내 고향은 이북이에요. 1950년에 월남해서 군대 갔다가 와서, 책방을 하기 시작한 거죠. 평남 순천이 고향인데, 대한민국에서 B29 폭격이 제일 많은 데가 거기였어요. 거기서 경의주도 가고, 블라디오스톡도 가고, 함경북도로 가고… 거기가 교차선이거든요. 대한민국에서 폭격을 제일 많이 받은 곳이에요. 이북에서 내려올 때 난 혈혈단신으로 내려왔어요. 국군이 위로 갔다가 중공군에게 밀렸잖아요. 앞으로 앞으로 해서, 국군이 진격했다 후퇴하는 바람에 모르겠다 하면서 국군 따라 왔죠. 그때가 스물넷다섯살이었죠. 우리가 삼형젠데, 형님은 돌아가시고, 부모님은 거기 계시고… 혼자 내려왔어요. 그후로 연락이 안 닿았죠. 이산가족상봉에도 신청한 적 없어요. 집사람은 군대에서 휴가왔다가 만났어요. 집이 있어, 친척이 있어 그래도 사람들이 나를 잘 봐서 소개해 줬죠. 결혼한 지 오래됐죠. 집사람이 여든네살이니까. 애들은 4공주에 아들 하나에요. 인천에도 살고 미국에도 가 있고. 지금은 집사람하고 둘이 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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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에 헌책방이 새로 생기기도 하고, 사람들이 들어오고 좀 활기차 보이는데 어떠세요. 예전처럼 거리가 살아날 수 있을까요.
“예전에는 문화극장, 애관극장, 미림극장, 동방극장이 있었어요. 극장이 있을 때만 해도 사람이 엄청 많았죠. 지금 여기 거리는 죽었어요. 그때처럼 손님들 왕래가 많아야 살아나거든요. 근데 잘 안 돼요. 발전할 데가 없어요. 문화극장 있던 데 근처로는 다 헐려서 빈터가 많잖아요. 누가 들어오고 싶어도 발전할 데로 들어오지, 죽은 데를 누가 오겠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문화극장 있는 데 개천이 있었어요. 복개되기 전이었죠. 바케쓰가 붕붕 떠돌아다닐 정도로 물이 많았어요. 하수도 다 고친 거죠. 비만 왔다하면, 화수부두 쪽에서 물이 들어오거든요. 물이 들어오면 물이 내려가지 못하고 넘쳐난 거죠. 나가는 물보다 들어오는 물이 많으니까 난리가 나는 거죠. 지금이야 양반된 거죠.”

“오랫동안 풍경도, 건물도 없어지고, 사람도 드나들고… 배다리는 발전될 가능성은 없거든요. 집을 팔고 떠나고 싶은 사람도 많거든요. 밥이 많아야 할 텐데, 된장이 많다고, 짠 걸 어떻게 먹어. 예전에는 앞날에 희망을 걸고 살았는데, 지금은 희망을 걸 수가 없어요. 근래에 이 동네를 살려보려고 젊은 사람들이 와서 모임도 있고 애써도 당장은 발전가능성이 없어요. 손님들이 더 많이 와야 하거든요. 죽어가는 거리를 활성화시키려고 수고들 하는데 안쓰럽죠. 예전에는 정말 살아있던 거리죠.”

-앞으로 계획은 어떤 게 있으신가요.
“나는 즐겁게 살아서 그런지 건강한 편이에요. 여기 책방은 우리 집사람이 다 정리하고 손질하고 청소하는 거예요. 먼지도 털고 책도 차례대로 잘 꽂아요. 나는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죠.”

“요새 사람들은 책을 많이 안 읽어요. 밥보다 찬이 많다고, 사가는 사람이 많아야 할 텐데,  팔러오는 사람이 더 많아요. 반대가 된 거죠. 독자 자체가 싹 갈렸어요. 또 요새 사람들은 욕심이 많아요. 아무리 싸게 줘도 싸게 주는 걸 몰라요. 더 싸게 달라고들 해요. 더 싸게 하면 내 입에 들어오는 게 없거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야, 계속 가게를 지키는 게 계획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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