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 선수, 당신을 어디서든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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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선수, 당신을 어디서든 응원하겠습니다!
  • 배영수 기자
  • 승인 2014.11.18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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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해외 진출 목전에 둔 김광현에게 보내는 감사의 메시지

신인 시절의 김광현. 다리를 높이 들어올리는 다이내믹한 모습은 지금도 그를 대표하는 투구폼이다.

2007년부터 인천 연고구단인 SK와이번스에서 8년을 뛰었던 김광현 선수가 해외 진출을 선언했습니다. 인천의 야구팬들에겐 정말 익숙한 이름이자, 인천 및 경기권 야구가 자랑하는 선수 중 한 명이죠. 축구선수 기성용과 언뜻 비슷하게도 생긴 수려한 외모로 인해 여성 팬들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있다고 하는데, 올해 미국 진출과 결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메이저리그 도전기가 시작부터 험난한 길을 만난 듯합니다. 프로 공식 7년차가 되면 구단 동의를 얻는 조건으로 해외진출 자격이 주어지는데, 생각보다도 한참 아래의 금액인 200만 불을 미국으로부터 제의받은 것이죠. 먼저 해외에 진출했던 류현진이 무려 2500만 불의 대우를 받고 건너간 것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금액입니다. 아마 많은 팬들이 “너무 헐값에 가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일단 선수 본인의 의지가 확고하고 일각에서는 “류현진이 워낙 대단한 선수여서 그와 비교할 때 큰 차이가 나는 것이지, 그 정도면 대우에 맞게 가는 거다”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저는 그가 해외에 진출하겠다는 뜻을 이전부터 접해 왔던 바이고, 또한 인천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선수로서의 그 역시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김광현 선수가 어떤 몸값을 받고 해외 진출을 하고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번 야구 인생에서 자칫 상처를 입고 선수로서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안산공고 시절의 김광현 (사진출처 = 리그베다 위키)

19K 삼진쇼, 이틀 간 220개 투구... ‘신화’의 시작
 
저는 선수로서의 김광현을 안산공고 시절부터 눈여겨봤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어떤 특별한 애정 같은 것을 갖고 보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재 우리 프로야구계가 지역연고제 바탕이 아닌 관계로 그가 다른 구단으로 갈 수도 있었으니 당시엔 ‘그냥 잘 하는 선수’로서 주목했을 뿐이죠. 그럼에도 그를 계속 주목했던 것은 우리 인천의 인천고 혹은 동산고와 달리 2000년 말 창단해 그리 역사가 깊지 않았던 안산공고가 그를 품은 이후 천지개벽을 한 듯 달라진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광현은 인천고에도 쓰라린 아픔을 주었던 선수였습니다. 2005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당시 인천고는 8강에서 김광현의 안산공고와 시합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삼진만 8개를 뺏는 그의 활약에 지고 맙니다(제 기억이 맞다면 당시 4강까지 올랐는데 당시 안산공고를 꺾은 학교가 역시 약체로 평가받았던 성남서고였고, 당시 김광현은 한 점밖에 주지 않고도 타선이 그 한점마저 지원해주지 않아 1-0이라는 축구 스코어로 지고 말죠.)
 
안산공고는 김광현이 재학하던 3년 간 그의 존재 하나만으로 ‘강호’의 타이틀을 얻게 되기에 이릅니다. 고교 선수 한 명이 팀을 이렇게 완벽히 지배했던 사례는 한국 고교야구 역사에서 사례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마 2006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가진 경동고와의 경기는 김광현의 고교야구 시절 최고의 경기였을 겁니다. 한 팀에게 한 경기에서 삼진만 19개를 뽑는 활약은 지금도 그의 초창기 시절을 언급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 소재이기도 하죠.
 
다만 김광현 선수의 고교 선수시절은 소위 ‘소년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던 팀의 사정 상 무리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6년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하루에 100개가 넘는 투구를 하며 이틀 간 220개가 넘는 투구를 했던 것은 그의 고교야구 시절 대표적인 ‘혹사’에 해당됩니다. 안산공고가 청룡기 고교야구 시절 16강에서 전주고와의 시합을 15회 연장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판정받는 바람에 한 경기에서 이틀간을 그렇게 무리하게 된 것이죠. 그날의 경기는 야구팬들에게도 굉장한 화제였는데, 모두들 그의 어깨 상태를 걱정하는 분위기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프로야구의 사례에서도 한 경기에 140개가 넘는 공을 한 경기에 던졌다가 후유증으로 선수 생활에 심각한 지장이 왔던 태평양 돌핀스 시절 김홍집이나 삼성 라이온스 시절의 박충식을 통해 증명되기도 한 만큼, 이는 너무도 당연했던 우려였습니다.
 

경동고와의 시합 당시 19개의 삼진을 잡아내던 김광현의 경기 영상.

험난한 프로생활, 최고의 반전으로 스타가 되다
 
계약금 5억 원이라는 거금을 받고 SK와이번스의 1차 지명을 받은 그 해, 그 후유증은 엄청났습니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첫 해 개막전에서 투구를 했지만 직구 최고구속이 140km에서 왔다갔다 하는 모습은 패기있게 공을 뿌려대던 고교 시절의 그와는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바로 김성근 전 SK 감독이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그를 2군으로 일찌감치 내려 보냈고, 여기서 그는 고교시절에 혹사당한 어깨와 신체를 다시 조정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김광현의 조기 1군 진입을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것은 경기보다 선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감독의 신념 덕분이었습니다.
 
그해 후반기서부터 서서히 회복해간 그는 데뷔 첫 해 3승 7패 방어율 3.62라는 평범한 성적을 올리는 데에 그쳤습니다. 그해 “명백한 신인왕 후보”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신인왕은 두산 베어스의 임태훈 선수에게 돌아갔고 그렇게 그는 분루를 삼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회복이 거의 완벽해졌음을 안 김성근 감독은 그를 위한 최고의 무대를 준비시킵니다. 바로 한국시리즈 4차전의 선발로 그를 낙점한 것이죠.
 
‘한국시리즈 선발투수’라는 건 한국 프로야구의 가장 큰 무대에서 가장 큰 임무입니다. 게다가 상대였던 두산 베어스의 선발 투수는 그해 그가 거둔 승수의 무려 7배를 넘는 22승 선발투수, 다니엘 리오스였습니다. 실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따로 없던 것이지요. 모두가 두산의 승리를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도 이 경기를 보러 갔었기에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7이닝 동안 삼진을 9개나 잡으면서 안타는 단 한 개만 내주고 무실점, 더 신기한 일은 그가 던지는 공에 두산 타자들의 배트가 왜 그리 딱! 딱! 소리를 내며 힘없이 부러지던지요. 현장에서 직접 본 기억을 더듬어 말씀드리자면, 인간이 던지는 공 같지 않았습니다. 마치 커다란 발석차가 돌 던지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나중에 이야길 들어보니 이날 경기를 중계한 KBS의 이용철 해설위원은 “삼진보다 던지는 공에 배트 부러지는 게 더 희열일 것”이라며 김광현의 힘 있는 투구에 칭찬을 보내기 바빴다고 하더군요. 김광현의 팬 치고 이날의 짜릿함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요.
 
스포츠 전문 주간지 [스포츠 2.0]는 그해 한국시리즈 최고의 MVP로 김광현을 뽑기에 이릅니다. 당시 저는 서울 소재의 한 음악 관련 잡지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제가 사용하는 책상 바로 옆이 [스포츠 2.0]의 기자와 편집진들이어서(동일 회사의 매체였죠), 이 내용에 대해서는 스포츠 기자가 아님에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2010년 수훈선수로 선정된 경기에서의 김광현(사진 가운데).

커리어 하이, 그리도 찾아온 슬럼프와 극복기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그의 성적은 최고의 ‘커리어 하이’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2008년 16승 4패 방어율 2.39, 2009년 부상으로 시즌아웃을 맞는 상황에서도 12승 2패 2.80, 그리고 복귀해 다시금 구단에게 우승 깃발을 안겨준 2010년 17승 7패 2.37 등 3년 동안 45승이라는 괴물급 활약을 하며 이중 두 해를 다승왕으로, 한 해를 방어율왕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2011년 뜻하지 않은 부상이 그를 덮칩니다. 이번엔 ‘안면 뇌경색’이라는, 투수에게는 희귀하게 찾아오는 병증이 그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비록 털고 일어났지만 후유증으로 인해 투구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지며 그해 4승, 이듬해 8승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실제 김광현이 부진했던 그해 SK는 번번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게 덜미를 잡혀 연속 2년 준우승에 머물게 됩니다.
 
비록 전성기 시절인 2점대 방어율을 탈환하지는 못했지만 2013년부터 그는 서서히 제 기량을 찾아갑니다. 2013년에는 서서히 몸이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점점 나아지는 투구를 보이며 그해 10승 투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10승 9패 4.47). 그리고 올해 그는 13승 9패 3.42의 성적으로 20대 초반의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기량을 거의 회복하며 올 시즌을 마쳤습니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작년과 올해 SK는 중하위권 순위를 기록하며 결국 포스트 시즌을 치르지 못해 그가 가을야구에서 싱싱하게 공을 뿌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죠.
 
이미 그는 ‘인천 야구인’
 
언제나 야구에 대해서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던 그가 이제는 더 큰 무대에서 뛰고 싶어 합니다. 그의 바람대로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SK 소속으로 시즌을 치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너무 이른 포스팅 응찰과 부상 경력을 중요시 생각하는 미국 현지 관계자들의 반응 등으로 인해, 현재 강정호나 양현종 등 미국 진출을 선언한 몇몇 선수들보다 더 낮은 몸값을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가 어디서 야구를 하던 용감하게 공을 뿌리고 삼진을 잡을 때 싱긋 웃는 그의 모습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마디로 그가 경기하는 모습이 미디어에 많이 비춰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마 인천 연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타인들은 동산고 출신의 포수 정상호 혹은 송은범 등 지역이 낳은 스타들에게 더 애정을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릴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는 8년을 인천에서 뛴, 인천 야구가 사랑하는 스타입니다. 그 역시 SK구단과 인천에 대한 사랑이 엄청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 마당에서 안산공고를 나왔다 하여 인천야구인이 아닌 사람으로 외면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오랜 기간 인천에서 활약한 선수를, 이제는 어디서 야구를 하든, 정말 이역만리 타지에서 야구를 하게 되더라도, 인천시민인 저는 열정적으로 응원하겠습니다. 김 선수! 파이팅!
 

역동적인 투구폼을 보여주는 김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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