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도 보물선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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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도 보물선을 찾아라
  • 김용구(인천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 승인 2014.12.04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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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 새로운 발견] 9
 

“우리나라 바다는 보물천국이다. 배가 바다속 갯벌로 침몰되면 그대로 보존된다. 서해안은 약 3,000여개의 배가 침몰되어 갯벌 속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침몰된 배를 인양하는 것은 모래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역사적 자료와 주민들의 증언 등 통해 사전에 매장유물의 경제성을 파악하여 발굴을 결정하지."(편도영, 61세)
 
덕적면 울도리 고승호
 
“원래 청나라 배가 보물 실고 가다가 가라앉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얼마 안 되어 배에 실려 있던 보물은 이미 인양해 갔다는 말을 어르신들한태 자주 들었지. 그 후로 보물선이라 해서 다른 잠수부들이 많이 왔지.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가져갔는지는 모르지” (울도주민, 김상식)
 
울도 보물선에 대해 크게 알려지지 시작한 것은 2001년이다. 당시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은 ㈜골드쉽이 덕적면 울도 근방에서 침몰한 것으로 알려진 ‘청나라 고승(高升)호’에 대해 내 매장물 발굴 신청을 조건부로 승인한다. 그해 4월 4일 대아건설은 ㈜골드쉽에 10억 원을 출자, 지분 33.33%를 취득했다고 공시했다.

발굴 작업은 1차는 2001.03.01-6.30까지, 2차는 2001.06.17-7.18까지, 3차는 2002년 10.01-10.31까지 총 3차례 시도하였다. 보물선 인양을 시작한 후 ㈜골드쉽은 은화 외에도 은수저, 소총, 아편 파이프, 동전류, 맥주병, 와인병 등의 부장품들이 발견하였다고 알려지자 대아건설 주식은 폭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굴사업보다는 이를 이용한 주가 상승 및 매장물 소유권 문제로 발굴 작업은 중단된다. 그 후 2011년에 보물선 발굴을 다시 시도한다.
 
발굴팀장 편도영
 
당시 ㈜골드쉽이 고승(高升)호를 인양할 때 발굴팀장을 역임했던 편도영(61세)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고향이 안면도이고 현재 ㈜씨러브 대표이사와 한국해저탐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편도영 대표
 
“고승호가 침몰된 장소는 덕적면 울도 서남방 1.8km지점(위도 N 37°00′, 경도 E126°59′)인데, 주변은 수심이 깊어요."
 
 
“잠수부가 들어가서 보니 주변이 무덤식으로 되어 있었고 제일 높은 지점 3-5m 파다 보니 고승호가 나왔지. 수심이 약 22-30m이고 모래가 1.3m로 쌓여 있고 뻘 6.7m 밑에 고승호가 있더라고."
 
사진 제공=편도영
 
고승호를 상상해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배는 1, 2, 3층으로 구분돼 있고 맨 아래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증기기관이다.
 

사진제공=편도영
 
“우선 배의 침몰위치를 파악한 후 부표로 표시하지. 그리고 설계도면을 보고 조사하여 시카줄(다이버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줄)을 설치하고 발굴 방법에 대해 다이버들과 논의했지. Hood Pump 임대해서 모래와 진흙을 하루에 10,000루베(가로, 세로, 높이를 곱한 체적) 정도 뽑아냈지.

모래와 진흙은 바다로 흘러 보내면 부피가 큰 것들이 걸리는데, 캐러멜 크기 한 냥(37.5g)정도의 납찌거기가 나오더라고. 나중에 잘 세척해서 보니 은괴이더라고. 유골도 10구 정도와 총기도 많이 나왔지“(편도영)
 
 
“2차 작업할 때 맥주 및 포도주병도 나왔는데, 타이타닉호에서 발견된 포도주 1병이 1억에 경매된 것처럼 이런 포도주는 고가로 취급되지.”(편도영)
 
 
“3차는 2002년 10.01-10.31까지 한 달 정도 작업을 진행했는데 조류 때문에 약 일주일 정도 작업을 했지. 3차 발굴에는 모든 비용을 내가 우선 지급하고 사후에 정산하기로 하고 일을 진행했지. 그러나 나중에 돈을 받지 못했어. 그래서 비용을 지불하느라 내가 무척 힘들었고 지금도 서운한 생각이 들어.“(편도영)
 

고승호 발굴 동영상 보기
 
고승호에서 발굴된 유물은 다음과 같다. 은괴, 은화 이외에도 금·은수저, 소총, 아편 파이프, 도자기 파편, 와인병, 맥주병 과 청나라 병사로 추정되는 유골 수십 구도 함께 발견되었다.
 

사진제공=편도영
 
 
고승호 발굴 결과 동영상 보기
 
고승호가 울도 앞바다에서 침몰된 이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농민군은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한다. 그리고 전주성을 함락시키자 다급한 정부 측에서 청국에 파병을 요청한다. 1894년 6월 청국은 조선정부의 파병요청을 받고 북양해군 제독인 정여창에게 ‘제원(濟遠)’, ‘양위(揚威)’, ‘평원(平遠)’ 등 함선을 파병하여 청국상인 보호하라는 임무를 내리고, 직예총독인 엽지초와 섭사성에게는 2,000여명을 군인을 이끌고 동학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일본은 한반도 지배를 위해 7,800명의 대병력을 동원할 계획을 가지고 6월 대본영을 설치하고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청국은 2차로 영국선박을 이용하여 총 3,000여명의 지원군을 아산에 파병하려고 하였다. 바다에서 일본 해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제원(濟遠)’, ‘광을(廣乙)’을 함께 파견하여 지원하기로 한다.
 
7월 20일 청국이 병력 수송선을 아산지역으로 증원하는 계획은 그러나 일본 첩보에게 누출되어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는 비밀작전을 하달 받고 전함 15척, 수뢰정 6척을 이끌고 풍도 앞바다로 향하였다.
 
7월 23일 ‘제원’, ‘광을’ 두 함대는 아산 앞바다에 도착하였고, 그 다음날 병력수송선도 아산에 도착하여 청군과 군마, 군량, 마초 무기 등을 육지로 실어 날랐다.
 
7월 25일 새벽 '제원', '광을' 두 함대는 아산만에서 여순으로 귀향하던 중 풍도 앞바다에서 잠복 중이던 일본 함대 ‘길야(吉野)’, ‘추진주(秋津州)’, ‘낭속(浪速)’ 등 3척 순양함에 기습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이 먼저 청나라 '제원' 함대를 포격하였고 청국 군함도 이에 반격하였다.
 
이를 풍도해전이라 부르는데, 이 해전에서 청나라 ‘광을’ 함대는 침몰하였고, ‘조강호’는 노획당했으며, ‘제원호’는 부서져서 여순항을 돌아갔다.
 
고승호도 포를 맞고 배에 있던 병사 1000명 중에서 700명이 사망했으나 영국 선장은 일본국에 의해 구조되었다.

풍도해전 이후 일본은 청 군함이 일본군함에 대해 포격을 했다는 구실로 청국에 선전포고를 하자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경기도사> 제6권, 경기도사편찬위원회, 2004)

1894년 7월 25일 일본 해군의 어뢰공격을 받고 침몰하고 있는 고승호 모습
 
“학자들은 고승호를 군함이라 하는데, 고승호는 로이드 해상보험이 가입되어 있는 상선이었어. 군함은 보험을 가입할 수 없다. 물론 고승호는 독일제 구리(동)로 만든 대포 14문을 장착하였지. 당시 배에는 중대장, 장군, 한성전기(주), 독일인 등이 타고 있었고 생존자 중에서 태안까지 헤엄쳐서 나온 이들도 있다고 해. 이들 생존자 중 일부는 홍주성에서 의병들과 합세하여 일본군들과 싸운 기록이 있는데 내가 그 자료를 찾아냈어.”(편도영)
 
고승호 발굴 역사
 
고승호 발굴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매일신보>는 1925.8.10자에 “지금부터 30년 전 인천 근해 울도 근처 바다에서 일본군에 격침된 청국 군용선 고승호를 지난 6일부터 잠수부 10명과 인부 30명을 현장에 파견하여 인양작업에 착수하였다. 선체를 잡아맬 지점을 표시할 부표작업은 8일 새벽 일곱시 반 기관부 후문에 있는 주방에 한 줄을 무사히 잡아매어 선체가 있는 지점은 누구든지 알게 되었다.”고 처음으로 보도하였다.
 
<동아일보> 1935년 2월 24일자에는 “3천만 원의 시가를 가진 은괴가 바다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며 작업이 착착 진행 중이며, 고승호는 영국소유 상선으로 청국 임대권으로 보증금 4만 파운드를 걸고 사용한다. 로이드북이라는 역사자료에 의하면 이 병선은 멕시코 은과 마제은 합하여 5톤(현 시가로 환산하면 3천만 원), 병정과 무기를 실고 7월 21일 중국을 떠나 25일 인천항으로부터 서남 40마일의 지점에 있는 울도의 남방 동경 126도 북위 37도의 지점에 침몰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79년 6월 15일에는 오승환이라는 사람이 인천항만청에 ‘고승호 매장물 발굴승인 신청’을 제출했다. 철재 앵글 3개, 철판 1개, 납덩어리 2kg, 와이어 2m를 인양했다고 한다(김종길, ‘보물선 고승호 발굴신청’, <해양한국> 2001,7).
 
1979년 11월 28일에는 한국우선기업(주) 강오현 대표이사가 고승호 발굴 승인신청서를 인천항만청에 접수시켰다. 그러나 1983년 5월 26일 발굴을 포기한다. 그 외 3인이 발굴을 시도하였다.(김종길, 같은 글)

 
“2001-2002년 총 3차례 ㈜골드쉽이 발굴을 시도하였지. 당시 발굴단장이던 내가 우여곡절 끝에 2008년 고승호 매장물 허가를 받았지. 현재는 나(편도영) 외 1인이 공동으로 매장물 허가를 받은 상태지. 2011년 고승호 프로젝트를 다시 진행했는데 나는 군산 앞바다 발굴하느라 다른 사람이 진행했어.”(편도영)
 
“여기 울도에 숙소를 정하고 보물선을 파냈나 봐요. 거기서 뭐가 나왔네 하더라고요. 그런 소리만 들었죠. 그 사람들이 무슨 작업을 했는지 밝히지 않아요. 여기 주민들은 몰라요. 근데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와서 바다 속을 뒤지고 가요. 지난 2011년에 작업을 하다가 갔어요” (울도 주민, 김상식)
 
울도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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