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친구여
상태바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친구여
  • 이희인 여행가 겸 작가
  • 승인 2015.04.10 11: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희인의 <길 위의 책, 길 위의 맛> 7. 부산
 



['2015세계 책의 수도 인천' 기획] 길 위의 책, 길 위의 맛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친구여
- 찾아간 곳 / 부산
- 읽은 책 / 염상섭 <만세전>, 김동리 <밀다원 시대>
 
이태 전 봄, 일본 규슈를 짧게 여행한 뒤 페리를 타고 현해탄을 넘어오는 바닷길에서 부산을 만났다. 거친 바다를 건너 이제 막 우리 국토의 관문인 부산을 바라본 풍경은 몹시도 낯설었다. 항구이긴 한데, 병풍처럼 막아선 낮지 않은 산들과 그 산들 위에 빼곡 들어선 집과 삶의 풍경이 이물스러웠다. 부산이 나를 반기지 않고 다시 등을 떠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 풍경을 떠올리면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 동경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한 조선의 지식인이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마지못해 일본의 몇몇 도시를 거쳐 부산으로, 김천으로, 서울로 올라가던 여정을 담은 소설 <만세전>이 떠오른다. 거기서 부산에 대한 인상을 담은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이다.
 
부산이라 하면 조선의 항구로는 제일류요, 조선의 중요한 첫 문호라는 것은 소학교에 한 달만 다녀도 알 것이다. 사실 부산은 조선의 유일한 대표이다. 조선을 축사(縮寫)한 것, 조선을 상징한 것은 과연 부산이다. 외국의 유람객이 조선을 보고자 하면, 우선 부산에만 끌고 가서 구경을 시켜주면 그만일 것이다. 거룩한 부산! 조선을 짊어진 부산! 부산의 팔자가 조선의 팔자요, 조선의 팔자가 부산의 팔자였다. (염상섭, <만세전>에서)
 
 
1920년대에 쓰인 소설이라고 보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자의 침착한 서술과 사실적인 문체가 돋보이던 소설에서, 부산을 예찬하는 이 장면은 조금 과잉된 감정이 느껴진다. 부산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부산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진술 같다. 소설의 화자인 1910년대 지식인이 그랬듯이,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부산이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을 웬만한 한국 사람이라면 한두 번은 가봤을 테고, 설사 가보지 않았더라도 무수한 영화나 뉴스, 책으로 접해 일정한 이미지가 생겼을 터다. 당신에게 부산은 어떤 도시인가? 나에게 부산은 어떤 도시인가?
 

 

부산에는 내 군대 ‘쫄다구’가 산다. 병영에서의 인연이 제대한 뒤에도 이십여 년 가까이 이어져왔는데 군대 있을 때나 사회에서나 언제나 더 어른스러운 쪽은 그 친구였다. 녀석이 서울에 올라오거나 내가 부산으로 내려가면 미리 연락을 해 모처럼 만나 밤새 통음(痛飮)을 하니 일 년에 한두 번은 얼굴을 보는 셈이다. 그런 친구가 부산 같은 도시에 있으니 남쪽 끝 부산도 내겐 늘 멀지 않은 도시다.
 
은사로 모시는 사진 선생님이 부산의 유명 미술관에 초대를 받아 전시회를 하게 되어 그 오프닝에 참가할 겸 부산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타지 사람의 눈으로 부산의 풍광을 1년 넘게 담아 오신 선생님의 사진에도 항구도시 부산의 봄 냄새가 가득 묻어났다. 해운대에서 있던 전시회 오프닝을 마친 뒤 남포동으로 넘어가 후배를 만났다. 녀석을 만나면 틀림없이 1차는 곰장어요, 2차는 고래 고기다. 녀석과 함께 몇 번 녀석의 단골집을 찾아갔더니 주인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오랜만에 맛본 깻잎 곰장어에 소주가 각자 1병반이요, 고급 부위를 내오던 고래 고기에 또 소주가 각자 1병반씩 비워졌다. 안주가 좋아서일까, 바닷바람이 좋아서일까, 꽤 마셨는데도 쉽게 취하지 않았다. 여관을 잡으려던 나를 후배가 또 끌었다. 제수씨가 친정에 가 오늘 제 집에 가서 자도 된다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서울서 찾아온 불청객을 위해 후배 내외가 그렇게 작당을 한 모양이었다. 부산의 바다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영도 언덕의 22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우리는 소주를 한 병씩 더 마셨다. 창밖으로 펼쳐진 건너편 산 그림자의 풍경은 현해탄을 넘어올 때 만났던 그 풍경과 흡사했다.
 



이튿날 일어나 해장을 한 뒤, 녀석이 차를 몰고 부산 구석구석을 여행시켜주었다. 일전에도 종종 부산의 몇몇 장소를 구경시켜주곤 했는데 그날은 내가 지난 밤 술자리에서 호기심을 내비친 장소들로 안내해 준 것이다. 가장 먼저 간 곳은 광복동의 번화가였다. 지난 밤 얘기한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시대 (蜜茶苑時代)>의 실제 장소였던 광복로 68번지, ‘밀다원’ 다방이 있던 자리를 알려주겠다는 거였다. <밀다원시대>는 읽어보지도, 그런 소설이 있는 것도 알지 못한 녀석이지만 최근에 그 부근에서 소설가 김동리와 관련한 행사들이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저게가 그 다방이 있던 데라 하데얘” 그가 가리킨 자리엔 텔레비전에서 무수히 보았던 유명 화장품 브랜드가 큰 매장을 열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광복동 일대에 성업을 한 다방만 해도 줄잡아 50여개가 넘었다고 하는데 그 다방들 한 구석에 화가 이중섭도 있었고 소설가 김동리며 피난 문인들이 모여든 풍경을 상상하자 역사의 준엄함이 새삼스러웠다.
 

부산의 소설, 혹은 부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 떠올리면 손창섭의 <비 오는 날>이나 김정한의 <수라도> 같은 소설을 먼저 거론할 만하다. 동래 종점까지 가서도 거기서 장마에 진득진득해진 흙길을 따라 산동네 판자촌에 살던 친구 남매를 찾아가던 <비 오는 날>의 주인공이나, 쪽배를 타고 섬 개발이 한창이던 을숙도의 섬으로 가난한 제자를 찾아가던 소학교 선생님의 발자취는 이제 부산 어디에도 볼 수가 없다. 모두 한국전쟁의 비극과 근대화의 이면을 증언하는 소설들이다. 하지만 그 소설들은 굳이 부산이 아니어도 상관없을 시공간을 보여준다. 역사적 공간이 아닌 보편의 공간의 느낌이 큰 것이다. 내게 부산이라는 구체적 장소를 곧바로 연상시키는 소설이 있다면 단연 김동리의 <밀다원시대>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밀리며 전황(戰況)이 불리하게 돌아가던 1.4후퇴 당시, 서울서 피난을 온 문인과 예술인들이 부산에 속속 모여들었고, 그들의 아지트가 되었던 곳이 문인 단체인 ‘문총’의 임시사무실과 같은 건물에 있던 밀다원 다방이었다. ‘광복동 로터리에서 시청 쪽으로 조금 내려가서 있는 이층 다방’ 밀다원을 중심으로 피난 내려온 문인들의 좌절, 궁핍, 절망이 담담하게 그려지는 소설에서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화가 등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삶은 아름답거나 거룩할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모두 삶과 전쟁에 쫓겨 가족을 두고 피난오거나 남의 집에 얹혀살며 비참과 수치심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삼삼오오 작당을 하여 우동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나간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 초라하기는 매한가지인 예술가들의 소소한 일상에 중심이 되는 사건이 있다면 피난 온 한 시인의 예기치 않는 자살 사건이다. 벌집을 찾아 붕붕거리는 벌떼처럼 ‘밀다원’에 모여들어 전황을 걱정하면서도 또 무리를 만들고 사소한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인간사의 여느 그늘진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부산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끝의 끝’인 것이다.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는,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 같은 것에 중구의 의식은 완전히 사로잡혀 있은 듯했다. 그것은 승객의 거의 전부가 종착역인 부산을 목적하고 간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산이 이 선로의 종점인 동시, 바다와 맞닿은 육지의 끝이라는 지리적인 이유 때문만도 아니었다. 또, 그 열차가 자유의 수도 서울을 출발지로 하고 항도 부산을 도착점으로 하는 마지막 열차라는 이유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를 다 합친 그 위에 또 다른 이유가, 무언지 더 근본적이며 더 절실한 이유가 있는 듯했다. (김동리, <밀다원 시대>에서)
 
작가, 예술가들이 모여든 밀다원 다방이며, 화가 이상섭이 즐겨 찾았다는 다방 자리 등을 알려준 후배가 차의 시동을 걸고 일찌감치 벚꽃과 개나리가 흐드러진 산복도로를 지나 광안대교를 건너 해운대로 나를 태워다줬다. 거기서 선생님의 전시회를 다시 방문해 함께 사진 속 부산 풍경을 감상했다. 해운대에서 또 차를 몰고 부산의 동북쪽 끝에 위치한 기장까지 달렸다. 멸치잡이 풍경으로 유명한 대변항은 무엇보다 멸치들 비린내가 가득했다. 해지기 전 다시 차를 몰아 기장에서 부산의 반대편인 부산 서쪽의 감천 문화마을까지 달렸다. 과거 부산의 대표적인 빈민촌이던 산비탈 마을에 빼곡하게 들어찬 삶들이 울긋불긋 화려한 페인팅과 호기심 가득한 여행자들을 맞아 활기를 띠고 있었다.
 


 
송도로 내려와 회국수로 저녁을 먹은 뒤 남포동에 차를 두고 한 잔을 더 마시기로 했다. 몇 시간 뒤, 그 밤에 나는 심야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되어 있었다. 심야버스를 타기 전까지 자갈치 시장에서 또 디저트 같은 음주를 하자는 것이었다. 영화 하나로 명소가 된 국제시장에는 일요일 밤임에도 취객들과 관광객들이 북적였다. 가을에 큰 영화제가 열리면 발 디딜 틈이 없다는 극장 거리에는 수많은 포장마차가 불을 밝히고 연기를 피워 관광객과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분명 십여 년 전보다 훨씬 활기가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어떤 도시가 전에 없던 활기를 찾는 까닭은 비단 봄 때문일까?
 
광복동에 있는 후배의 또 다른 단골집에서 소고기 냉채를 안주로 조촐한 음주를 하는 동안 저절로 노래 하나가 흥얼거려진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이 노래 하나만으로도 부산은 전 국민의 애향(愛鄕)이 되는 것이다. 맛난 안주를 앞에 두고 좋은 친구와 마주하고 있으니 노래는 저절로 입에서 뱉어진다. 게다가 세상은 어쩌자고, 지금, 봄이 아니던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