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씨 이허겸의 재실, 원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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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씨 이허겸의 재실, 원인재
  • 디비딥 장윤석 블로거(인천in 객원기자)
  • 승인 2015.04.14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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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비딥의 인천이야기] 22

 

인천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생긴 원인재역은 역사 바로 앞에 인천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의 재실 원인재가 있어 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중시조란 기울어진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을 말하고 재실이란 묘소에 딸려있는 전각이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 또는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집을 말한다. 원인재 옆에 실제로 이허겸의 묘소가 있어 이곳에서 제사를 준비한다고 한다.

 

지금의 원인재는 원래 있었던 것을 인천시가 도시계획을 빌미로 철거해 버림에 따라 <인천 이씨 대종회>에서 5년여간의 공사를 벌인 끝에 지난 1999년 10월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원인재의 <원인>이란 인주이씨 곧 인천이씨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이허겸대 이후에 인천 이씨가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음을 뜻한다.

 

1970년대 초반의 원인재 모습

 

인천시 시사편찬위원장을 지낸 고 박광성 교수는 지금의 새 건물이 지어지기 이전의 원래 원인재는 순조7년(1807년)이나 고종4년(1857년) 아니면 1927년 을묘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인주이씨 종친회에 따르면, 이허겸의 선조는 가야국 김수로왕의 둘째아들이었다고 하며 어머니의 성을 따서 대대로 허씨성을 썼다고 한다.
 

그러다 신라 말기에 이 집안 사람 중 하나가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당의 황제 현종에게 잘보여 황제의 성인 이씨를 받았고 그 뒤 자손들이 통일신라 말기인 8~9세기쯤에 소성현(지금의 인천)으로 이사를 와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허겸의 집안은 이 같은 조상들을 자랑스럽게 여겨 이씨와 허씨를 함께 성으로 쓰고 이름을 겸으로 짓곤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 집안의 전성시대여서 이허겸의 외손녀 3명이 모두 현종비가 된 것을 시작으로 7대에 걸쳐 왕비나 재상을 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려 숙종은 이전까지 소성현이라 불리던 지금의 인천을 <왕비가 태어난 경사의 근원>이라는 뜻에서 경원군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또 인조는 다시 <왕비의 친정인 고을>이라는 뜻에서 인주로 바꿔 볼렀다고도 전해진다.

 

원인재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이 집안의 묘자리는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연꽃이 물에 떠있는 형세, 곧 연화부수형인 땅이어서 집안이 흥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처음부터 흥하지 않았던 집안이 묘자리를 쓰면서 번창했다는 것이고, 이허겸의 묘지도 여기에 있다.

 

문학산의 남동쪽 산줄기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동네는 연화부수형이라는 말을 따서 부수지마을로 불려왔으며 연화사거리란 지명도 여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토록 번창하던 인천이씨 집안도 이자겸이 스스로 왕이 될 마음으로 반란을 꽤하다 실패해 자신은 귀양을 가고 그의 소생인 왕비도 폐위돼버렸다. 그 뒤 공양왕이 이 집안에서 태자비를 맞아들임으로써 다시 한번 재기를 하나했으나 곧 고려가 망하면서 그 영화도 함께 막을 내렸다. (조우성의 인천이야기,경향 인천이야기 참고)

 

 

인천 이씨의 시초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인천의 연수구 아파트가 즐비한 도심에서 이런 옛 가옥과 함께 잠시 시간을 거슬러 여행을 떠날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어 다행이다.
 

진짜 묘를 잘써서 집안이 흥한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딱딱하고 직선적인 도심 속에서 느끼는 옛 흔적의 느낌을 찾는 것도 좋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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