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를 거역하라 - 배봉기 장편동화 [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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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를 거역하라 - 배봉기 장편동화 [나는 나]
  • 이한수 선생님
  • 승인 2015.04.2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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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 선생님의 교실밖 감성교육] 제23회
 
아비는 늙게 마련이고 자식은 아비를 딛고 세상으로 나가는 게 자연의 이치랍니다. ‘청어람(靑於藍)’이라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비와 아들의 갈등을 그린 전형적 이야기 ‘오이디푸스 설화’는 이런 순리를 거역하는 탐욕의 산물이 아닐까요. 아비를 죽이고 아비의 자리를 빼앗은 자식이 저주를 받아 자멸한다는 이 이야기는 아비의 권위를 강화하는 전통과 보수(保守)의 메타포(은유)로 수용되어 왔는데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의해 ‘성장통’이라는 의미로 변용되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학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엄마와 애착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아비를 경쟁자로 적대시하게 되고 아비를 통해 사회적 위계질서에 편입되어 들어가는 과정을 밟는 과정에서 생기는 열등감 또는 패배감을 의미하는 말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두루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를 계승 발전시킨 심리학자들이 ‘콤플렉스’ 개념을 또 다른 의미로 확장시켰습니다. 사회심리학자 ‘칼 융’은 콤플렉스를 ‘심리적인 생명의 핵’이라고 말했으며 ‘프로이트’의 제자 ‘아들러’는 열등감을 ‘모든 행동의 동기이자 추진력’으로 봤습니다. 아비를 부정하는 것은 자아 형성의 단초이자 성장의 동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병증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신세계가 열리는 개벽의 징조로 환영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문화는 축적되고 진보하게 마련이니 이전 세대는 다음 세대에 비해 모자라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식이 아비를 능가하는 게 합자연(合自然)하거늘 이에 역행하여 구시대의 권위를 온존시키려는 발상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아닙니까. 은유적으로 말하여 아비는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는 게 당연한데 이를 도덕률로 억압하려는 권력 의지가 오이디푸스 설화의 본질적 의미가 아닐까요. 아비에 대한 반발 심리가 개인적으로는 성장의 에너지요 사회적으로는 진보의 씨앗이라는 생각을 불경스럽게만 볼 일이 아닙니다.
 
오이디푸스 설화를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관점으로 읽어 온 아비들에게는 불편한 얘기일 수 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비와 자식 사이의 심리적 갈등이 아이의 자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데 대해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이가 성장하여 사회화 될 때 첫 타자(他者)로 대면하게 되는 사람이 아비이며, 아비는 아이가 사회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거나 부수어야 할 장벽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 아비가 초라해지는 건 불가피한 것이요 아비가 자식에게 권위를 내세우는 건 자연의 이치에 거역하는 불온한 짓이 되는 겁니다. 아비의 권위에 도전하는 아이가 불온한 게 아니라 아이의 거역을 용납하지 않는 아비가 불온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아비들의 자기 부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시대 아비들, 남자들의 권위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윤수’는 참 감성적인 아이입니다. 방안에서 그림 그리기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사내아이들이 즐기는 육체적 놀이에 섞이지 못합니다. 아빠는 사내다운 동생과 비교하며 ‘윤수’를 못마땅해 합니다. 사나이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극기 훈련에도 보내고 등산도 시킵니다. ‘윤수’에게는 이보다 더한 고역이 없습니다. ‘윤수’는 참다못해 아빠에게 ‘나는 그냥 나’이니 그만하시라고 대듭니다. 아빠가 무섭게 혼낼까봐 너무 걱정이 되지만 용기를 내었습니다. 결국 아빠는 ‘윤수’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고 더 이상 사내다움을 강요하지 않게 됩니다.
 
보통은 이렇게 원만하게 화해가 되지 않지요.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어린 아이는 부모의 권위에 맞서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싫어도 억지로 참으며 속으로 곪겠지요. 억지로 하는 일이니 부모 보기에는 마땅치 않을 것이고 아이한테 역정을 내기가 쉽지요. 이렇게 아이는 아이대로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되고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와의 유대감을 차차 잃게 됩니다. 사춘기가 되어서 불화가 겉으로 드러나게 되면 일이 좀 심각해집니다. 가족 구성원 전체가 스트레스를 받으며 견디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는 경우도 생깁니다. 보통은 일이 이렇게 악화됩니다. 이 소설처럼 아비와 아들이 원만하게 화해하면 좋겠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얼버무리고 넘어갈 문제인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남자 아이가 너무 여성적인 성향이면 나중에 사회화 과정을 밟을 때 자아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될 것 같거든요. 아이의 성향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더 늦기 전에 성정체성이 바르게 형성되도록 이끌어야 할지 고민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 문화에 내포되어 있는 성역할 관념에 대해서도 궁리를 하게 됩니다.
 
남자답다는 게 뭘까요. 우리 사회의 성역할 의식은 바람직한 것일까요. 여권이 많이 신장되어 가부장제 인습이 많이 극복되었다고 하지만, 성취와 권위를 지향하며 위계질서를 강화하려는 남성성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 폐해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라는 문제의식은 여전합니다.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경쟁심이 우리를 점점 불행하게 만들고 있으며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상생 협력하는 대안문화가 빨리 자리 잡아야 한다고 다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뇌과학의 성과도 우리의 성역할 고정 관념을 반성적으로 고찰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은 좌뇌와 우뇌의 신경망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공감 능력이 높은데 비해 남성은 뇌의 앞쪽과 뒤쪽이 주로 연결되어 공간지각 능력과 결단력이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는 연구 결과는 남성성의 의미를 고찰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집중력과 결단력을 높이는 작용을 한다는 연구 결과도 이에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남성 호르몬의 분비량과 자폐증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게 입증되었으니 생리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남성성은 목표 지향적이며 독단적 경향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남성성이 지금 우리가 앓고 있는 문화 지체 현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조금씩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쟁을 조장하는 만큼 비인간적인 차별과 양극화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사회구조적 문제의식이 비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가 알게 모르게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으며 나 또한 예외 없이 정서적으로 메말라 가고 있다는 자기 성찰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자식에게 가르치려는 진취적(進取的) 삶의 자세가 결국 우리를 이토록 비정하게 만든 건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장 위주 물질 만능 문화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배 욕구에 찌든 남성성을 지양하고 정서적 공감과 협력 상생의 대안 문화를 일구기 위한 모성(母性) 회복에 힘을 쏟아야 마땅한 이 마당에 공감 부재의 여성 지도자라니요. 


인성여자고등학교 이한수 선생님
블로그 http://blog.daum.net/2ha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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