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의 표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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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의 표절에 대하여
  • 최일화
  • 승인 2015.06.2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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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칼럼] 최일화 / 시인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건이 불거짐으로써 문학작품의 표절 문제가 각종 매스컴의 화제 뉴스가 되면서 문단 안팎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문학작품의 표절은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지는가. 시나 소설의 어느 대목을 그대로 옮겨다 자기 작품에 사용하는 경우, 또는 원작의 여러 문장 표현에 변형을 가해 자신의 문체처럼 꾸며 작품에 도용하는 경우, 원작의 주제나 줄거리를 자신의 작품처럼 재구성하는 경우 등 여러 형태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사건의 경우 문단 내에서 작가가 차지하는 비중, 작가의 두꺼운 독자층을 감안할 때 그 파장은 크고 대단히 충격적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 과연 번역된 외국 소설의 번역체 문장 몇 구절을 따다가 자신의 작품에 의도적으로 사용했겠는가 하는 의구심 또한 강하게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런 유사한 표현이 어떻게 해서 상이한 두 작품에 나타나게 되는 걸까. 나는 두 작품을 읽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읽어보려고 인터넷서점을 방문 검색해보았으나 구할 수 없었다. 매스컴을 통해 두 작품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작가 자신의 해명을 들어보자.

“문제가 된 '우국'의 문장과 '전설'의 문장을 여러 차례 대조한 결과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나는 작가의 이런 해명을 변명이라고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책임을 면했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경로로 그런 표현이 나타났건 그로 인해 독자들이 받은 충격으로부터 작가가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신 작가가 습작 시절 필사를 많이 했다고 하니까 필사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구절이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다가 소설 구성의 어느 시점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문장처럼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가정해 볼 수 있다. 신 작가는 또 해명한다.

"어떤 소설을 읽다보면 '어쩌면 이렇게 나랑 생각이 똑같을까' 싶은 대목이 나오고 심지어 에피소드도 똑같을 때가 있다"

그러면서 의도적으로 특정 대목을 따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시를 쓰는 나도 경험하는 일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작품 속의 그 부분에서는 꼭 그 구절이 떠올라 넣으려다가 다른 시인의 유사한 표현이 떠올라 어떻게 해야 할지 진땀을 흘리는 경우가 있다. 더군다나 방대한 문장들이 의미의 연결망을 형성한 채 직조되어 있는 소설에서는 부지불식간에 그런 표현이 삽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됐건 출판사나 작가는 표절 사실을 인정했고 그 작품을 작품 목록에서 삭제하고 해당 작품이 실려 있는 작품집을 전량 수거하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한 독자로서 또 같은 문단에 속해있는 한 사람으로써 작가의 표절에 어떤 불순한 의도성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작가의 해명을 믿고 싶은 것이다.

한 작가가 타인의 작품 한 구절, 경우에 따라서는 유사한 단어 하나를 차용하더라도 그것은 타인의 영혼에 타격을 가하는 일이 되고 내 영혼을 탁류의 강으로 흘려보내는 파괴 행위임에 틀림없다. 나아가 작가로부터 영혼의 위안과 안식과 평안을 구하려는 독자를 기만하고 독자의 정체성에 일대 혼란을 가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시점에서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나도 종종 어떤 시어를 생각할 때 자꾸 타인의 언어 같기만 해서 많이 망설이며 사용 여부를 놓고 고심할 때가 있다. 나의 작품 중에 ‘걸어 다니는 새’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내가 쓴 시에 제목을 붙여놓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 제목을 사용할까 말까. 시의 내용으로 보아서 이 제목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걸 확신했지만 내가 망설였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십오륙 년 전이다. 인천 항동의 조그만 화랑에서 여류화가정진영의 작품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채성병 시인, 강만수 시인과 함께 전시회 관람을 갔었다. 새를 주제로 한 작품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작품 중에 하나의 제목이 ‘걸어 다니는 새’였다. 왜 이십오륙 년이 지나 내가 시를 한 편 썼는데 금방 떠오른 제목이 바로 ‘걸어 다니는 새’였다. 나는 무심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시의 제목으로 ‘걸어 다니는 새’를 채택했다. 분명히 그 화가의 그림 제목인 걸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걸어 다니는 새는 보편적인 새의 한 모습이지 굳이 그 화가의 그림의 제목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림의 주제와 시의 주제는 달랐지만 시와 그림의 제목이 같다는 특수 상황은 보편적인 것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표절이란 단어가 대두되는 작금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내 시 제목에 아무래도 문제점이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전혀 표절이란 생각도 의식조차도 없었지만 어느 누군가 이걸 표절이라고 지적하고 나서면 나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생각이 복잡해진다. 옛날에 보았던 ‘걸어 다니는 새’라는 회화작품, 그리고 25년 후에 내가 쓴 ‘걸어 다니는 새’라는 제목의 시는 표절일까 아닐까.

만약에 제 3자 입장이라면 분명히 표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매스컴은 나를 표절작가로 표현하며 기사화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경각심을 갖게 된다. 창작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구설수에 오르거나 논란이 될 만한 표현은 심사숙고하여 사용 여부를 결정하고 꼭 써야할 경우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나중에 전집을 내거나 시 선집에 이 작품을 수록하게 된다면 제목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꼭 밝혀야 할 것 같다.


참고로 졸시 ‘걸어 다니는 새’를 소개한다.



걸어 다니는 새
                                                           최일화


사람들 분주하게 오가는 공원 한 모퉁이
참새가 통통 뛰며 모이를 쫀다
비둘기가 옆에서 아장아장 걸으며 모이를 찾는다

통통 뛰는 새와 아장아장 걷는 새
어떤 새가 더 예쁘다던가
어떤 새가 더 촌스러운 새인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참새와 비둘기가 같이 모이를 쪼는데
언뜻 보니 참새는 통통 뛰고 비둘기는 아장아장 걷더라는 것이다
걸음걸이가 좀 다르면 어떠냐
깃털의 빛깔이 좀 다르면 어떠냐

고양이가 다가오면 깜짝 놀라
참새는 울타리로 비둘기는 지붕으로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같이 모이를 쫀다는 것뿐

날아오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세상이 변해도 때까치처럼 세상을 등지지는 말아야 할 텐데
기아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이거나
사람들 눈 밖에 나지는 말아야 할 텐데

땅으로 내려와 걷는 배고픈 새들이
깜짝 놀라 달아나게 해서는 안 된다
신록으로 눈부신 공원에
참새와 비둘기가 나란히 모이를 쪼고 있다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 『천년 은행나무도 운다』(詩와에세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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