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의 2.1 독립선언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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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의 2.1 독립선언도 기억해야 합니다"
  • 이한수
  • 승인 2016.02.0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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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팩션]⑧김연수 장편소설 '밤은 노래한다' - 독립선언을 짓밟은 민생단 사건

3.1만세운동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근 한 달 앞서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2.8 독립선언이 있었고 뒤를 이어 조선 반도 전역이 대한독립 만세 함성으로 일어섰습니다.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1918년에는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선언되는 등 세계정세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해외 동포들이 먼저 알았고 이 기운은 국내로 전파되어 반도는 요동쳤습니다. 3.1만세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에 영향을 미친 세계사적 사건입니다.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무오독립선언서.jpg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50pixel, 세로 463pixel사진 찍은 날짜: 2015년 01월 31일 오후 11:10
<무오독립선언서>
 
그런데 그보다 앞선 독립 선언이 만주에서 먼저 있었다는 것은 다들 잘 모릅니다. 기미년 바로 전 해인 무오년의 일이라 ‘무오독립선언’이라 불립니다. 음력으로 따져 1918년이지만 양력으로는 1919년 2월 1일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무오독립선언에 가담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가히 조선 독립운동의 구심이라 할 만합니다. 상해 임정 설립의 핵심이었던 조소앙이 선언서를 쓰고 김규식, 김좌진, 박은식, 신채호, 안창호, 이동녕, 이시영 등 독립운동 지도자 대부분이 서명했습니다. 39명의 선언자 중 한 분의 변절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3.1독립선언뿐만 아니라 2.1독립선언도 기억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1930년대 용정>                                                              <일송정에서 내려다보이는 용정>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곳은 북간도 길림성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길림(지린)은 익숙하지 않을 테지만 윤동주, 문익환 선생이 공부한 용정 명동학교는 다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가곡 ‘선구자’가 탄생한 곳이 바로 길림성(지린) 용정입니다. 1930년대 시가지를 보면 꽤나 번화한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일송정에서 내려다보면 도시를 관통하는 해란강이 보인답니다. 이곳은 우리 민족에게는 참 유서 깊은 곳입니다.
 
앞에서 경술국치 직후 서간도에 이주해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신 이회영 선생 얘기를 했는데 북간도 용정 명동촌에 세워진 명동학교는 1906년에 세워진 서전서숙을 김약연 선생이 계승하여 1908년에 세운 학교입니다. 나라가 망한 경술국치(1910년) 이전에 이미 뜻 있는 독립투사들이 대거 이주해 와 꾸린 마을로 주민들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며 청산리 봉오동 전투가 벌어진 곳도 여기에서 멀지 않으며 용정에서 멀지 않은 어랑촌 등 근처 산악지대는 항일 유격 근거지로 조선인 소비에트(해방구)가 건설되기도 한 조선 독립운동의 심장이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민생단 사건으로 독립투쟁 근거지 대부분이 붕괴되고 마는 처참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명동촌에서 멀지 않은 청산리에서 2만 5천 규모의 일본군 토벌대를 격퇴한 김좌진 홍범도 독립군의 규모가 약 3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제가 대륙 침략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무장 세력으로 조선독립군을 상정하였을 것을 짐작할 만합니다. 이 전투에서 엄청난 타격을 입은 일제는 간도지역의 조선 민간인을 참혹하게 학살합니다. 이 비참한 사건을 경신대참변이라고 하는데 이 때 무고하게 죽어간 조선인이 3만에 달했다고 합니다. 잔학한 일본군들이 갓난아기를 허공으로 던져 서로 총검으로 찌르며 시시덕거렸다는 증언도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악귀들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과가 클수록 죽어나가는 동포가 많으니 불굴의 투지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영화 『일송정 푸른솔은』에서 북로군정서 서일 총재가 “일본군 한 명을 죽이면 동포 열 명이 죽어 나간다.” 하면서 전투를 반대하는 장면은 이런 비참한 현실을 여실히 담은 것이었습니다.
 
간도, 연해주 조선인에게 1920년대는 그야말로 끔찍한 시대였습니다. 여러 독립군 부대가 무차별적인 토벌(경신참변, 4월참변)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집결하는데 거기에서도 참극이 벌어집니다. 러시아 공산당이 조선 독립군을 볼셰비키 군에 편입시키려고 하고 이게 불응한 조선 독립군을 적으로 몰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간도 땅에서는 일제가 노골적으로 만주 점령을 추진하자 만주 군벌 대부분이 친일로 돌아서고, 일부 조선인도 이 기회를 틈타 만주 조선인 자치를 추진하기 위해 ‘민생단’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게 되는데, 중국 공산당은 ‘민생단’을 대일 항쟁 연합전선을 무너뜨리는 친일 주구(앞잡이)로 보고 색출 처단에 나섭니다. 러시아 자유시에서 벌어졌던 일이 간도에도 또 벌어진 겁니다. 중국 공산당에 절대 복종하지 않는 조선 혁명가들을 친일 첩자로 몰아 대대적으로 숙청해 버렸습니다. 이때 숙청된 조선인이 10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자유시 참변과 민생단 사건은 우리 역사의 굴곡을 집약적으로 드러낸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은 민생단 사건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팩션)을 접하는 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문인들과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인들의 작품 중에는 그 비극적 사건을 형상화한 작품이 다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자를 그 시대 그 현장으로 데려가 가슴이 뜨거워지게 하기에는 감성이 좀 부족하다 싶어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김연수 님의 『밤은 노래한다』를 만났습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순간을 이토록 절절하게 그려낸 작품을 이제야 만나게 되다니 너무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끔찍했던 역사의 현장이 소설의 배경이지만 이야기는 젊은 청춘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풀려나가 독자로 하여금 더 가슴 아리게 만듭니다. 주인공 ‘김해연’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용정지부에서 측량기사로 일하면서 일본군 장교 ‘나카시마’와도 가깝게 지내는, 제 나름으로는 엘리트입네 합니다. 그가 매력적인 지성인 명신여학교 음악선생 ‘이정희’를 만나 한눈에 반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김해연’, ‘나카시마’, ‘이정희’는 자주 어울리며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김해연’은 속으로 ‘이정희’를 연모하게 되는데 느닷없이 이정희가 자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으로 인해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수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정희’가 공산당 프락치였으며 일본군 장교 ‘나카지마’에게 접근하기 위해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망국의 아픔을 갖기는 커녕 일제 주요 기관의 요직에 진출한 것에 대해 은근히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자신의 철없음을 자각하면서 자신이 조선 독립운동의 미끼로 던져지는 초라한 신세였다는 심한 자괴감에 빠집니다.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용정(대성)중학교.jpg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716pixel, 세로 414pixel
<일제시대 대성중학교>                                                <일제시대 명신여학교>
 

‘김해연’이 흠모했던 ‘이정희’는 일찍이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연해주로 건너온 지사의 집안에서 태어나 명신여학교에서 공부하여 지식인 풍모를 가졌으며 음악에도 유능한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이정희’의 할아버지는 “1920년 4월 볼셰비키가 장악한 극동공화국에 맞서 블라디보스토크를 기습한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데리고 간도로 넘어와 용정에 자리잡은 지역 유지입니다. 이런 사연을 갖고 있는 북간도 독립운동가 실존 인물은 참 많았지요. ‘이정희’는 1926년 명신여학교 재학 시절 안세훈, 박도만, 최도식 등 대성중학교 학생들과 독서회 활동을 하며 사회주의 사상에 눈뜨고 동만(東滿)청연동맹의 지도를 받아 용정 내 여러 학교 학생들과 ‘평우동맹’을 결성하는 것으로 소설은 그리고 있는데 소설이 그리고 있는 용정 지역 청년 사회주의 단체 ‘평우동맹’ 결성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들 청년들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고 나중에는 민생단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렇듯, ‘이정희’는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정치의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김해연’하고는 출신과 성장과정의 격이 다릅니다. 그녀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이정희’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느끼고 사랑에 빠진 ‘김해연’은 그녀가 나를 이용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살려내기 위해 자살한 것인지 혼란에 빠지고 결국 그녀 뒤를 따르기 위해 자살을 시도합니다. 죽지 못하고 살아나지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 벙어리 귀머거리 행세를 하며 지냅니다. ‘만주철도’ 측량사 일을 그만두고 사진관에 취업하여 하루하루 덧없이 지내다가 사진관에서 같이 일하는 ‘여옥’이라는 여성의 눈에 들어 차츰 말문이 트이게 됩니다. 차츰 생의 기운을 회복하게 되고 동료들과 친해지고 사진관 일도 재미가 붙게 됩니다.
 
하루는 사진관 사람들이 유격대에게 물품을 전하기 위해 함께 용정 유정촌(어랑촌)에 들어갔다가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여옥’과 ‘김해연’ 둘만 살아남습니다. 여옥은 다리 하나를 잃고 ‘김해연’은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에 잡혀가 토벌대 첩자 혐의로 취조를 받게 됩니다.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김해연’이 만주철도 대련 본사에 다닐 때 알고 지내던 친구 ‘니시무라’가 중국 공산당에서도 잘 아는 일본 공산당원임이 드러나 혐의를 벗게 되고 유격대의 일원이 됩니다. 일본인 친구 ‘나카지마’ 때문에 첩자로 의심받다가 일본인 친구 ‘니시무라’ 때문에 공산당의 신임을 받게 되니 너무 아이러니하고 복잡한 세상입니다. ‘김해연’은 유격대 일원이 되어 교육 받고 활동하면서 정치의식에 눈뜨게 됩니다.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무지하게 살았는지 자각하게 되고 조국 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치고 있는 동지들을 존경하게 됩니다. 진실에 눈뜨게 된 사연이 참 기구하다 싶은데 또 다시 비극에 휘말립니다. 동지들끼리 서로 죽이는 민생단 사건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어랑촌.jpg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25pixel, 세로 292pixel
<용정현 바로 옆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곳>

 
‘김해연’이 어랑촌 소비에트(해방구)에서 유격대로 가담할 무렵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가 항일 통일전선을 추진하면서 조선인 당원들에게 반민생단 투쟁을 벌이고 중국 공산혁명에 집중할 것을 강요하게 됩니다. ‘이정희’와 함께 ‘평우동맹’을 결성한 동지였던 안세훈, 박도만, 최도식, 박길룡은 반민생단 투쟁에 휘말리면서 갈가리 찢어집니다. ‘안세훈’은 토벌대한테 죽고 ‘최도식’은 일제 비밀경찰로 변절했으며. 유격대 안에서 ‘박길룡’은 ‘박도만’을 민생단 첩자로 몰아 죽입니다. 조국 독립과 혁명을 위해 청춘을 바친 이들이 이렇게 서로에게 총질을 하며 죽어가는 비극을 목격하는 ‘김해연’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랑도 잃고 친구도 잃고 나 자신마저도 잃어버리는 처참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김해연’은 토벌대의 포위망을 뚫고 용정으로 나가 만주철도 시절 친구였던 일본인 장교 ‘나카시마’를 납치하여 유격구로 돌아와 ‘박길룡’과 ‘여옥’을 구출합니다. ‘박길룡’은 ‘나카시마’에게 접근하여 첩보를 수집하도록 ‘이정희’를 ‘김해연’에게 소개했던 자입니다. ‘김해연’이 이런 비참한 삶을 겪게 된 건 바로 ‘박길룡’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랑도 잃고 친구도 잃고 혁명 정신도 잃었습니다. 그런 자를 목숨을 걸고 살려내었으니 이런 악연이 또 어디 있겠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싶지만 그만큼 민생단 사건에 휘말린 북간도 사정이 너무나 복잡하고 비극적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봅니다.
 
중국 공산당의 반민생단 투쟁은 당내 친일분자를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진행되었지만 중국 공산당이 일제 괴뢰 만주국과 대결하기 위한 통일전선을 구축하려고 구국군(괴뢰 만주국에 반발한 만주 군벌)과의 합작을 추진하면서, 이에 대해 반발하는 조선공산당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 만주국을 세우려고 할 때 만주의 조선인들도 일제에 편승하여 조선인 자치국을 세우려는 의도로 만들었으니 민생단이 친일 주구(앞잡이)인 것도 맞습니다. 또 한편으로 조선인 공산주의자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당노선에 복종하라는 ‘일국 일당 원칙’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조선 혁명을 도모하는 민족주의 노선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1933년 9월 동만특위 확대회의는 다음과 같이 결의했습니다.
 
“조선국 파쟁주의자와 민생단 분자들이 하나로 되어 당내에서 일본간세 계통을 건립하고 당의 령도 기관을 차기함으로써 중앙에서 온 편지(1.26 반만항일 통일전선 지시 서한)에서 제출한 당면의 임무를 완전히 집행할 수 없게 하였으며 당과 혁명운동이 매우 큰 손실을 받게 하였다.”
 
민생단 사건은 연해주 자유시 참변과 본질적으로 같지 않은가요. 볼셰비키 군에 편입되기를 거부한 조선 독립군을 공격하고 연해주 조선인을 일제 간첩으로 의심하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킨 소련이나,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워온 투사들을 일제 간첩 또는 민족주의자로 몰아 숙청한 중국 공산당의 처사가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민족을 뛰어넘는 국제주의가 현실에서는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내부 분열과 파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며, 무고한 민중만 사지로 몰아넣을 뿐이란 걸 뼈저리게 깨닫게 만듭니다. 끔찍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어 짓이겨진 젊은 조선 청년들의 아픈 사랑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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