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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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것
  • 송수연
  • 승인 2017.03.3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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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연의 영화읽기] (3) 토니 에드만 / 마렌 아데 감독

‘송수연의 영화 읽기’는 남구의 예술영화관 ‘영화공간주안’과 송수연 평론가의 협약하에 <인천in>에 개봉영화를 리뷰하는 기획입니다. 한달에 1회씩 ‘영화공간주안’이 상영하는 예술영화의 예술적 가치 및 의미를 되새겨보며, 특히 영화와 아동청소년 문학의 접점을 독자와 함께 읽고자 합니다. 



 

영화 <토니 에드만>(마렌 아데 감독, 2016)은 딸 걱정으로 딸 주변을 맴도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가 부담스러운 딸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건 부녀 이야기이자 가족이야기인 셈인데, 주인공인 빈프레드의 고백처럼 가족은 “아주 복잡하다.” 그냥 딸을 보러 휴가 차 딸이 일하는 도시에 왔을 뿐인데, 딸이 사는 도시는 어떤지, 딸은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었을 뿐인데, 아버지의 소박한 바람은 그야말로 산으로 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가족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걸까? 누구의 잘못일까?


영화는 빈프리트가 택배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빈프리트는 택배 직원을 문 앞에 세워두고 자신의 동생 토니(토니 에드만은 빈프리트가 만든 가상의 인물-제2의 인격-이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동생이 폭발물 문제로 감옥에 갔다 왔다는 둥, 택배도 그가 시킨 건데 뇌관이라는 둥 한참 떠들고 나서 동생을 불러올 테니 기다리라며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큰소리로 동생을 다그치고 잔소리를 하는데 이 소리가 문밖 택배직원에게 다 들린다. 당연하다. 들으라고 그렇게 하는 거니까. 이윽고 가운을 걸치고 뻐드렁니를 한 토니(변장한 빈프리트)가 택배를 받으러 현관으로 나오자 택배 직원은 당황한다. 혹시 정말 택배상자에 뇌관 같은 게 들어있는 건지, 이 남자는 누군지,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직원의 얼굴에 온갖 표정이 뒤섞이자 빈프리트는 틀니를 빼고 농담이라고 웃으며 직원을 보낸다. 잘 만들어진 영화의 첫 시퀀스가 늘 그렇듯 <토니 에드만>의 첫 시퀀스도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어쨌든 이 아버지, 평범하지 않다.


주목할 만한 두 번째 장면은 딸 이네스의 앞당긴 생일축하파티다. 이네스는 루마니아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에 있는 가족들은 이네스의 생일을 미리 축하해주려고 모인다. 빈프리트도 초대받았으나 생일축하 모임이라는 안내를 받지 못한 그는 빈손이고, 전처와 그녀의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 틈에서 여러모로 불편하다. 그런데 이 모임이 불편한 건 빈프리트만은 아니다. 이네스는 계속 비즈니스 관련 통화를 하느라 거의 집 밖 정원에 나가 있는데, 역시 집 안이 불편해 바깥으로 돌던 빈프리트에게 가짜 전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만다. 휴대폰은 여러모로 편리한 물건이다. 불편하지만 빠져 나오기 곤란한 자리에 있을 때, 바쁜 전화는 우리를 그곳에서 해방시켜준다. 들켰나? 아닌가? 갸웃할 만큼의 찰나지만 이 장면은 이네스 역시 가족과 편안하게 소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네스는 불편한 가족들과 섞여 있느니 오지 않은 전화기를 붙잡고 통화하는 척하는 게 더 편한 사람이다.
 




저렇게 특이한 아버지가 저렇게 사는 딸을 만나러 갔으니 이들의 만남이 점점 놀랍게 전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 빈프리트가 작정하고 토니 에드만 행세를 하면서부터 부녀 사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조마조마하다. 그런데 외모부터 사는 방식까지 극단적으로 달라 보이는 이 부녀는 볼수록 닮았다. 빈프리트도, 제2의 빈프리트인 토니 에드만도 딸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딸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네스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아버지의 기행 때문에 돌기 직전이다. 때로는 울고, 화를 내고, 택시를 타고 먼저 가버리기도 하지만 그녀는 어떤 순간에도 아버지를 완전히 부인하지 않는다. 서로 포기하지 않는 마음들은 결국 알몸인 이네스(가운은 걸쳤다)가 털 갑옷을 두른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당연히 빈프리트도 한때 이네스의 영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네스가 열창한 의 가사처럼 아이들은 자라고, 그들은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기 원하지 않는다. 실패하건 성공하건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 살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관련해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네스 할머니의 장례식 시퀀스였다. 이네스는 아버지의 셔츠에서 꺼낸 틀니를 끼고 할머니의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아버지 앞에 선다. 아버지와 할머니를 장착한 이네스의 모습은 상징적이다. 이네스의 시작이었고 한때 그녀의 모든 것이기도 했던 그것들은 어느 순간 어색하고 촌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래도 모자와 틀니는 이네스의 일부이다. 이네스도 그것을 안다. 뽑아버리는 게 낫겠다 싶어 이를 악물고 뽑아내려 해도 자기에게 피를 묻힐 뿐 결코 뽑히지 않았던 발톱 같은,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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