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적응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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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응중이다
  • 윤치권
  • 승인 2017.06.08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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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 윤치권 / 인천해밀학교 교사
 

<아침 풍경>

 

9시20분 아침 조회를 들어간다.(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등교시간이다. - 꿈의 학교인가?)

‘오늘은 몇 명이나 왔을까?’

속마음은 모든 아이들이 와 있기를 기대하지만, 교실에 들어서면서 그 기대는 이내 깨진다. 소수의 아이들이(주로 여학생) 파운데이션을 하거나 눈썹을 그리고 있다.
 

“안녕” “안녕하세요” “다른 아이들은?” “아직 안 왔는데요” “선생님 민0이는 이제 일어났다는데요.” “너에게 연락이 왔니?” “아니요 페북에 쓰여있는데요”


이제 익숙해질 수도 있는 교실의 아침 풍경은 아직도 낮설다. 간단한 조회 후 교무실에 돌아와 오지 않는 아이들과 부모님에게 문자를 보낸다.

‘담임입니다. 학생이 등교하지 않았습니다. 연락주세요.’

문자를 보내면 답신을 하거나 전화를 하는 학부모님과 학생도 등교한 학생 수 정도이다.

‘부모님들은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 미안해서 연락도 못하는 것인가’ 여러 생각이 교차된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오전 학과 수업을 오후 대안교과 수업이 이루어지는 위탁대안학교이다.

일반학교에 적응하지 못하여 탈락위기에 있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교육과정을 통하여 학교생활에 적응하도록 돕는 학교이다. 학생 모집 공고를 하고 지원한 학생과 학부모님 면접 후 1주일간의 적응 교육 후 입교를 한다.

면접 과정에서 학생의 위기 상태를 진단하고, 학생들에게 이곳은 포기한 학생을 받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선택을 하고 출발을 하도록 돕는 학교라고 안내를 한다. 적응 기간 중에 학생들은 일반 학생과 다름이 없다. 규칙을 잘 준수하고 선생님에게 공손하고 적응교육에 성실하다.

그러나 위탁이 결정되고 첫 등교가 이루어진 후의 아이들은 태도가 급변한다. 일반교과 수업이 이루어지는 오전에 지각하고 오후에 등교하는 학생들이 많아진다.

늦는 이유는 대부분 늦잠, 늦잠의 원인은 늦도록 다른 일에 몰두한 것(?)이다. 그리고 늦는다는 것에 별로 거리낌이 없다. 늦는다고 닦달하는 교사는 상처가 많다.


 

<오후 풍경>

 

늦게 온 학생들과 함께 둘러 앉아 집단 상담을 한다.

“너는 오늘 왜 늦었니?”

“선생님 오늘은 정말 지각하지 않으려고 밤새 눈뜨고 있었는데요, 너무 피곤해서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니 12시인거죠. 저도 정말 황당했어요.”

“왜 학교에 오기 위해서 밤을 세우는데? ”

“저는 늦잠이 많아서 한번 자면 깨어나지 못해요. 그래서 학교오기 위해서는 자면 안돼요.”

“그럼 학교에 와서 뭐하는데?”

“대부분 수업시간에 업드려 자지요?”

“자기 위해서 학교 온다고? 학교는 와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곳인데 와서 자면 배우는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맨날 그런 것은 아닌데요.”


“수0 너는 왜 어제 학교에 오지 않았지?”

“선생님 저 어제 무지 아팠어요?”

“너 어제 병원에 가지도 않았잖아?”

“아파서 자다가 보니 병원에 가지 못했는데, 저 정말 아팠거든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아이를 보며 정말 아팠어구나 동감하는 표정을 보여주고 다른 학생들에게 다시 묻는다.


“고0 너는 늦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또 늦었네. 오늘은 왜 늦었는데?”

“저도 늦지 않으려고 알람을 10개를 맞추어 두고 잤는데요. 핸드폰이 울리지 않는거예요. 저도 얼마나 황당했는지. 다음부터는 절대 늦지 않을께요.”

아이들의 늦은 이유와 다짐은 매일 반복되고 있다. 지각뿐만 아니라 무단 조퇴, 무단 결석도 반복되고 있다.

하루의 시작은 아이들이 없는 교실이나 적은 교실에서 한숨과 같이 시작되고, 오후는 아이들의 변명을 들어주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말로 끝난다.

 

이곳에 오신지 몇 년 되신 선생님은 작년에 비해 아이들이 무지하게 좋아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학교에 와서도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복도에서 학교 구석에서 숨어서 들어가지 않는 학생도 많았다고 하신다. 그런 학생들을 어떻게 하셨는가 물으니 다독거리고 상담하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고 하신다.

“아니 학생이 교칙을 준수하지 않고 막 나가는데 상담하고 다독거리고 이야기를 들어주신다고요?”

그렇게 기다리고 기대하다보면 아이들이 어느새 성장한다는 것이다.

학교는 무엇인가 배우고 익히므로 성장하는 곳이지 않는가, 배우기를 거부하고 학벌을 얻기 위해서 다만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이들을 위한 최선일까?

약속이 실현되지 않고 매일 어겨지는데 또 다른 약속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상처받은 이를 치료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우리 학교 아이들은 상처가 많은 아이들이기에 보듬어주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어야 한다고 선임 선생님들은 말씀하신다.

기다려 주고 이해하여 주라는 말씀하는 선생님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 언성을 높이고 대드는 아이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달래주고 이해하려고 하는 선생님에게 아우라가 보이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배움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 교사라면 아이들에게 배움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은 교사의 책임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보이는 행동들은 결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다. 쌓여진 시간만큼 치유의 기간도 길 것이다.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꽃을 피울 것인데 나의 기다림은 너무 길다. 얼른 키워서 얼른 내보는 속성 재배 교육에 익숙한 나는 아직도 이 학교에 적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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