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인천의 록, 재조명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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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인천의 록, 재조명받을 수 있을까?
  • 배영수 기자
  • 승인 2017.08.04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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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뮤지션의 음반들 ③ - 90년대의 인천 록 밴드들

인천 1세대 록 밴드 ‘사하라’의 90년대 초반 당시 멤버들 모습. 이 멤버들로 데뷔 앨범이 녹음됐다.

 
한때 인천은 부산과 함께 언더그라운드 음악 신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록 음악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록 음악의 보고’로 불릴 만큼 중요한 자산이 있어 왔고, 이는 지난 1997년 IMF로 인한 경제 한파 이전까지도 유효했다. 경제위기 등의 원인으로 그 신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지난 2006년부터 시작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및 2009년 인천아트플랫폼 조성 등을 통해 인천의 음악예술 판 일부도 서서히 다시 일어나고 있다.

<인천in>은 록뿐만 아니라 음악 장르 전체적인 부분에 있어서 인천 출신의 인물들이 남긴 음악적 결과(주로 음반),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주류 및 비주류 음악 신에서 인천 출신 뮤지션들이 발표해 오고 있는 여러 결과물들을 매주 한 번씩 연재한다. 이는 <인천in>의 데이터베이스 중 하나의 자료이기도 하겠지만, 훗날 인천의 음악 자산을 다루게 될 여러 작업이 진행된다면 ‘참고자료’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는다.
 
※지난 두 편의 시리즈 기사를 통해 ‘현역’으로 활동하는 인천 록 밴드들을 소개했다면, 세 번째인 이 편에서는 8090시대(90년대 위주)에 활동했던 인천 뮤지션들과 그들이 남긴 흔적을 꺼내보기로 했다. 워낙 희귀한 자료가 되다 보니 잊힐 가능성이 큰 만큼, 이를 조명하는 작업 역시 여러모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다만, 당시의 모든 자료들을 기사 한 개로 모두 소개하지 못하는 만큼 지금 소개하는 내용은 ‘극히 일부’임을 밝힌다.
 


사하라의 1집 ‘The Seven Years of Drought’.

 

Sahara (사하라)
발매 앨범 : The Seven Years of Drought (1993년 지구레코드), Self Ego (1996년 LG미디어-이후 2000년 ‘원뮤직’에서 재발매)

 
‘인천 록 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만약 지금 소개하는 밴드 ‘사하라’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천 록의 역사 전체를 빼먹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정도로, 사하라는 인천 록 그리고 전국구 헤비메탈 신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여러 시선들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80년대 중후반 정도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인천 언더그라운드 록의 역사에서, 사하라는 제3세대의꿈, 아웃사이더스, 금시조 등과 함께 ‘인천 1세대’에 해당되는 시기에 로컬 음악신을 자생시킨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특히 밴드의 초대 보컬리스트 우정주씨는 지금도 그 이후에 활동을 시작한 후배들로부터 소위 ‘큰형님’ 소리를 아직도 들을 정도로 영향이 컸으며, GIT 유학파인 기타리스트 인재홍, 드러머 홍진규 등의 연주력은 당시 인천뿐만 아니라 전국 록 뮤지션들 중에서도 연주 스킬이 최고점에 있었다.
 
사하라의 데뷔 앨범은 1993년 ‘지구레코드’에서 발매됐다. 음반을 촬영한 이미지에서도 보이겠지만 이 1집 앨범의 제목은 ‘The Seven Years of Drought’, 우리말로 해석하면 ‘7년간의 가뭄’이란 뜻이다. 결성 이후 앨범을 내기까지 7년이 걸렸다는 이 제목의 뜻은 오래된 인천 록 마니아들은 꽤나 많이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한데, 사실 앨범을 내기 이전부터도 인천은 물론 서울 등지의 언더그라운드 신에서 사하라는 꽤 명성이 높았다. 실제 공연에서 자주 연주했던 이들의 자작곡 ‘I Can't Say’는 앨범을 내기 전부터도 팬들은 다 알고 있는 곡이었고, 이후 신해철이 이끌었던 록 밴드 ‘넥스트’의 기타리스트 김세황이 그 직전 활동했던 ‘다운타운’ 같은 밴드들보다도 오히려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아무튼 이 데뷔앨범은 전체적으로 미국의 80년대 하드 록(이를테면 본 조비, 머틀리 크루, 미스터 빅 등으로 대표되는 음악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주었는데, 사실 앨범 자체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사하라는 앨범과 관계없이 웬만한 수백 석 무대의 관객들을 채우는 이른바 ‘티켓 파워’는 확실한 팀이었고, 이를 통해 공연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기타리스트 인재홍의 미국 GIT 유학 이후 사하라는 2대 보컬리스트로 초고음역대를 자랑하는 보컬리스트 이재호(이 역시 사하라 합류 전부터 이름이 꽤 있었던 인물이다)를 영입해 1996년 두 번째 앨범 ‘Self Ego’를 발매했다.

 

사하라의 2집 ‘Self Ego’.

 
이 두 번째 앨범은 지난 1집보다는 좀 더 복잡다단하고 실험적인 부분들이 더 많았는데(그래서 한 곡당 러닝타임이 8분에 가까운 곡들도 꽤 많았다), 그것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해 일본에까지 진출했고, 평점 짜기로 유명했던 일본의 음악매체 ‘번(Burnn!)’에서 미국의 웬만한 록 음반들도 받기 힘든 87점이라는 점수를 받으면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점수를 받고도 경제적인 문제가 풀리지 못했고, 자연적으로 사하라는 이듬해인 1997년 미국 록 밴드 메탈리카의 헌정앨범에 참여한 후 해체의 수순을 밟고 말았다. 이후 멤버들은 각자 생활전선에서 사회인으로 활동하다가, 비교적 최근인 지난 2011년 남구 학산소극장에서 우정주 등 1집의 멤버들을 중심으로 오랜만의 무대(물론 본격적으로 다시 활동하는 것은 아니었지만)를 갖기도 했다.
 


서울 팀이지만 인천과도 인연이 많은 록 밴드 블랙 신드롬의 앨범 중 기자가 소장한 것은 ‘On the Blue Street (1991년-사진 왼쪽)’와 1996년의 ‘짜라투스트라( Zarathustra)’ 두 장이다. 실제론 더 많은 앨범들을 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CD로는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Black Syndrome (블랙 신드롬)
발매 앨범 : 1988년 ‘Fatal Attraction’ 이후 정규 앨범 9장, 라이브 및 베스트 앨범 등 발매

 
한국 헤비메탈 역사의 산 증인 두 명인 박영철(보컬), 김재만(기타)를 중심으로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한국 헤비메탈의 큰형님’ 블랙 신드롬은, 사실 인천 밴드가 아닌 서울 밴드다. 그러나 이 밴드를 중간에 거론하는 것은 이 밴드의 드러머를 앞서 언급한 사하라의 홍진규와 그의 고교 2년 후배인 최용석이 번갈아가면서 맡았었고, 한때 이 팀도 인천에 연습실을 마련하고 인천에서도 활발히 공연을 했던 역사가 있었던 데다, 인천의 록 팬들에게도 엄청난 사랑을 받았기에 언급키로 했다.
 
록 음악 전문 매체 ‘파라노이드’의 송명하 편집장의 증언(짧게 거쳐간 멤버들은 제외)에 따르면, 앨범을 내기 전 결성 초기의 사하라에서 활동했던 홍진규는 밴드가 잠시 활동을 정지하던 시절 블랙 신드롬의 드러머 자리를 꽤 긴 시간 맡았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앨범 작업을 시작한 사하라로 복귀하면서 이 드럼의 자리를 자신의 후배인 최용석에게 내주는 등의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 기자가 소장 중인 블랙 신드롬의 앨범 중 이들의 3집(1991년)인 ‘On the Blue Street’에는 최용석이 드러머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이 앨범에 블랙 신드롬의 대표곡인 ‘Feed the Power Cable Into Me’가 들어있다. 아무튼 서울의 팀이지만 인천과도 적잖이 인연이 닿아있는 밴드로, 지난 2015년에도 오랜만에 인천을 찾아 공연하기도 했다.
 

블랙 신드롬이 지난 2015년 오랜만에 인천을 찾아 공연하던 당시 모습. ⓒ배영수

 

여러 아티스트 : 95 MBC 록 음악제
(관련 앨범 : 밴드 ‘B4U’의 데뷔 앨범-1997년 팬프로덕션 발매)


앨범의 외연만 보면 공중파 방송국인 ‘MBC’가 치른 록 음악 경연대회로 이게 인천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그런데 경연대회에 참여한 전국의 수백 밴드들 중 치열한 경쟁을 뚫고 본선에 진출한 8개 밴드 중 인천 밴드가 무려 2개 팀(B4U, 블루 머치)이었다는 것(게다가 인천 출신의 멤버가 활동한 팀까지 합하면 한 팀이 더 있었다고)과, 이들 중 B4U가 최고 연주자상(당시 드러머 오세혁)은 물론 대회 대상까지 그야말로 ‘싹쓸이’를 했다는 점이다. 당시 이 경연대회의 본선 실황은 MBC FM 라디오 91.9Mhz를 통해 전파를 타기도 했는데, 이 본선 진출 밴드들은 자신들의 창작곡 1곡과 기존의 가요 리메이크 1곡을 통해 심사를 받았으며 밴드 별로 선배 뮤지션들이 ‘멘토’로 붙어 여러 조언과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95 MBC 록 음악제 앨범. 물론 인천 팀들이 우수한 결과를 냈던 것도 그렇지만, 당시 경연대회에서 ‘선배’로서 축하무대에 올라 대회를 빛내주었던 팀 ‘사랑과 평화’의 보컬리스트가 인천 출신의 이철호씨(물론 지금도 사랑과 평화의 멤버이며 인천에 거주함)였다.

 
90년대 인천에서는 제법 활동을 했던 ‘440E’라는 팀을 전신으로 하는 밴드 B4U는, 대회 출전 당시 진강희(보컬), 최광규(기타), 문형동(베이스), 오세혁(드럼)의 구성으로 질주하는 느낌의 창작곡 ‘Crying’과 한복남 원곡의 트로트곡 ‘빈대떡 신사’를 들고 나와 대상 등을 휩쓸었다. 이 수상을 계기로 지난 1997년 ‘앗! 이럴수가’라는 곡을 타이틀로 하는 자신들의 데뷔 앨범을 발표하기도 하는 등 한때 ‘승승장구’했다. 참고로 이 앨범에는 지난 두 번째 기사로 소개하기도 했던 뮤지션 ‘성용’이 기타 솔로 일부와 코러스 등에 참여했다.
 

지금은 구하기가 무척 힘들어진 B4U의 데뷔 앨범. 타이틀곡은 펑크 성향의 ‘앗! 이럴수가’였고 록음악제 대상곡인 ‘Crying’도 재녹음해 수록됐다. 보컬리스트 진강희씨는 “애초에 ‘앗! 이럴수가’는 만들지도 않았다가, 주주클럽 같은 밴드들이 TV에 자주 나오는 당시의 분위기를 소속사로부터 강요당하면서 3일여 만에 급하게 만들어 활동하게 됐다”고 한다. (사인은 보컬리스트 진강희씨로부터 지난 3일에 받은 것임.)

 
또다른 출전팀으로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블루 머치’의 경우 록에 재즈 등을 섞어 무척 이색적으로 만들어진 ‘주정뱅이’라는 곡을 통해 인상 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 팀의 멤버 중 드러머 이민우는 인천1세대 밴드인 ‘아웃사이더스’ 출신의 노장으로 이후 김창완 밴드 및 인천의 감성 록 밴드 ‘미인’ 등을 통해 현재에도 음악계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베테랑이기도 하다. 당시 B4U의 보컬리스트 진강희씨는 “당시 사실 음악 퀄리티로만 보면 대상을 탈 팀은 우리가 아니라 그 팀(블루 머치)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두의 앨범 ‘The Trend of Public Opinion...’.

 
Sadhu (사두)
발매 앨범 : The Trend of Public Opinion... (1996년 지구레코드 발매)

 
90년대 당시 인천의 록 신은 앞서 언급한 사하라 이후의 후배들을 중심으로 하는 하드 록 혹은 헤비메탈의 기류가 하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록 음악 장르 중에서도 가장 마니아층이 적었던 데스 메탈(파괴, 죽음, 고통 등 무거운 소재를 가사로 사용하고 사운드 자체도 극악함을 자아내는 분위기를 만든다)을 추구하는 팀들이 또 하나의 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인천 출신의 밴드 ‘스컨드렐’은 인천은 물론 한국 최초의 데스메탈 장르의 밴드로 분류되는데, 인천 록 음악판 전체를 놓고 보면 스컨드렐의 경우 사하라에 이은 인천 2세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스컨드렐이 활동을 종료한 이후 멤버였던 기타리스트 이명희를 비롯해 그와 오랜 기간 함께 음악활동을 하는 드러머 이영호 등을 중심으로 90년대 초중반 즈음 또 하나의 데스 메탈 계열의 밴드를 결성하는데 이 팀이 바로 ‘사두(예상대로 ‘뱀머리’란 뜻)’였다. 1996년 지구레코드를 통해 ‘The Trend of Public Opinion...’을 발매하면서 차후 활동을 기대하게도 했지만 얼마 못가 음반시장 및 경제상황의 침체(IMF) 등으로 얼마 못가 활동은 멈추고 말았다. 이후 이명희는 이영호를 비롯해 후배 격 밴드인 ‘시드’ 출신의 보컬리스트 김창유, 베이시스트 김대일 등과 함께 2005년 ‘블랙 메디신(두 번째 기사에서 다룸)’을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 당시 인천에서 뮤지션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은 인천 록 신이 흔적도 거의 없이 몰락한 이유로 IMF 및 상권의 이동 등 경제적인 영향도 물론 컸지만, 결정적으로는 그때 활동했던 인천 밴드들이 카피곡(기존 해외 록 밴드들 것을 리메이크하는 것)은 열심이었으나 그에 비해 확실한 창작곡들을 남기지 못하면서 쇠락해갔다는 의견을 더 크게 제시하고 있었다.

최근 취재를 위해 만났던 B4U의 진강희, 성용 등 인천 출신의 인사들 역시 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진강희씨는 “무명 밴드들이 공연을 할 때 관객들은 아무래도 잘 알려진 오리지널 곡들에 열광하는 부분이 컸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전국적으로는 이미 창작곡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면서 “이를 인천 밴드들이 적응하지 못했다는 선후배 뮤지션들 및 인천 음악 팬들의 의견은 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크다”고 추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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