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한 시 반에는 짐을 싸야 돼. 두 시에 단속이 나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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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한 시 반에는 짐을 싸야 돼. 두 시에 단속이 나오거든."
  • 김인자
  • 승인 2017.09.08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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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옷파는 할머니
 
내 친구 성아가 직장이 강남으로 발령이 났다.
서로 너무 바쁘다보니 잘 볼 수가 없어서 한 달에 한 번은 꼭 만나서 밥을 먹자고 한지 여러 해다. 성아가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하고 다시 갱생해서 직장으로 복귀하면서 부터니까.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했던가.외국계 은행에 다니는 성아따라 서울,인천,경기에 있는 지점은행들은 다 다녀봤다.
점심시간, 고 짧은 한 시간 동안에 우리는 아주 많은 일들을 한다.밥을 먹고 얼굴을 보고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보니 정작 밥은 제대로 편하게 먹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그래도 좋다. 잠깐이어도 성아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그녀의 건강함을 확인할 수 있으니 왕복 서너 시간이 넘게 걸려도 길치인 나는 한 달에 한 번 내친구 성아를 보러간다. 설레는 고단함이다.
오늘도 성아를 만나 급하게 밥을 먹고 서둘러 얼굴보고 한 번 안아보고 다시 인천으로 내려오는길. 선릉역 5번 출구 앞.
 
와글와글 할머니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귀가 번쩍 뜨인다.
고개를 들어보니 할머니들이 길거리에서 예쁜 옷을 사시느라 바쁘다.이거저거 몸에 대보고 환하게 웃으시는 할머니들 얼굴이 설렘으로 기쁘다.
옷을 사시는 할머니들도 매대에 걸려져있는 옷들도 가을 단풍처럼 곱다.
그리고 내눈에 들어오는 또 한 분의 예쁜 할머니, 옷파는 할머니시다. 예쁜 꽃모자를 쓰시고 예쁜 머플러 두르시고 이거 얼마에요 묻는 할머니들에게 옷 한번 슬쩍 쳐다보고 만 오천 원, 팔천 원하며 옷값을 척척 매기시는 할머니. 그런데 왠지 모르게 맘이 바빠보이신다.
"이거 2000원만 깎아주세요."
"안돼, 안돼. 지금도 껌값인데 뭘 더 깎으래." 하며 궁시렁 궁시렁 하시는 할머니.
쪼글쪼글 주름진 입이 너무 귀여우시다.
 
할머니께 말을 붙이고 싶어서 나도 심계옥엄니 옷을 샀다.빨강색 조끼와 가디건.그리고 똑같은 디자인으로 색깔만 다른 파랑색 조끼와 가디건.둘 중 어느 것이 울 심계옥엄니에게 더 어울릴까? 치수는 맞을까?
디자인이랑 색깔은 맘에 드는데 사이즈는 도통 감을 잡지 못하겠다.할머니들은 실제 몸보다 크게 입으시니 어떤걸 사야하나 고민하다가 곁에 서 계신 할머니에게 여쭈었다.
"할머니 이거 두 개 중에 어떤게 예뻐요?"
"이게 이뿌지." 거침없이 빨강색을 고르신다.
점심먹고 나면 회사에서 단체로 하는 체조가 하기 싫어서 여기 서서 멍때리신다는
74세 부동산 일을 하신다는 할머니.
"나는 이런 옷 안 어울려. 나는 백화점옷만 입어." 하시며 웃으신다.
그러더니 눈끝으로 꽃할머니를 바라보시며 무심히 툭 던지신다.
"저 할매 똥줄 탄다. 한 시 반까지 짐싸려면."
2시에 단속이 나와서 한 시 반 부터는 풀어놓은 옷들을 싸셔야 한단다.




꽃할머니께 말을 더 붙이고 싶어서 심계옥엄니 바지도 한 벌 더 샀다. 값은 팔천 원.싸기도 하다.
옷할머니 목에 두른 머플러도 참 곱다.
"할머니 목에 두른 머플러가 참 예뻐요."
"이거 여깄잖아.두 장에 5000원."
옷할머니 목에 두른 머플러에 김칫국물 자국이 보인다. 잘 흘리시는걸 보니 연세가 여든은 넘으셨겠구나...
"할머니,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나? 여든 둘. 암수술한지 얼마 안되서 이거 하믄 안되는데. 재고 빨리 없애려고 나왔어."
"에고 힘드신데.할머니 단속 나오지 않아요?"
"나오지. 늦어도 한 시 반에는 짐을 싸야 돼. 두 시에 단속이 나오거든."
"이 많은 짐을 할머니 혼자서 어떻게 옮기세요?"
"맽겨 놓는데가 있어.한 번 뺏기고 두 번 뺏기고 세번 째 뺏기믄 안 돌려줘."
12시 10분에 나오셔서 한 시간 쯤 옷을 파시는 할머니.옷을 파는 동안에도 할머니 눈은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주변 을 살피신다.단속반이 오는지 살피시는 거다. 짐을 싸고 있는 동안에도 할머니들은 옷을 고르시고 흥정을 하신다. 천 원만 깎아 달라고 그러면 할머니는 바빠 죽겠는데 뭘 깎으래냐며 삐죽 삐죽거리신다.쭈글쭈글한 입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면서도 안스럽다.
할머니가 짐을 싸시는 동안 옷값 묻는 사람들에게 할머니 대신 대답도 해드리고 옷걸이에 걸린 옷도 빼드렸다.
 
"고마와여."
"제가 고맙습니다 할머니..."
"잘가요 ."
"예, 할머니 건강하세요."
 
인사하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오다 아차 할머니 성함을 못 여쭈었네.
할머니가 짐을 다 싸고 벌써 가셨음 어쩌지하는 마음에 서둘러 가파른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박스에 옷을 다 담으시고 저쪽으로 이동중이신 할머니.
 
"할머니 ~"
"아고 깜짝이야. 아즉도 안갔어?"
"예,할머니 이름이 궁금해서 다시 왔어요."
"나, 김명수."
"김명숙이요?"
"아니 김명수."
 
틀니 사이로 발음이 새시는 할머니.
네 번을 다시 물어 할머니 이름이 김명수인걸 알았다.
"늙으이 이름은 알아 뭐하게?"
"그냥요.할머니가 좋아서여.할머니를 또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까.좋아하는 할머니 이름 정도는 알고 있고 싶어서.. 할머니 건강 잘 챙기시고요. 아프지 마시고요."
"응, 그래여.고마와여."
"할머니, 건강하셔야돼여."
할머니를 꼬옥 안아드렸다.
할머니가 가던 길을 다시 걸어가신다. 끌차에 옷박스를 싣고 허리는 반이나 구부러져서 꽃모자 쓰고 옷할머니가 걸어가신다.
"잘가여, 이쁜 색시."
걸어가시던 할머니가 뒤돌아서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드신다.
곱디 고운 할미꽃이 나를 보고 활짝 웃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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