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5.3민주항쟁, 그리고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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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5.3민주항쟁, 그리고 1987년
  • 양진채
  • 승인 2018.01.1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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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중편소설 <플러싱의 숨 쉬는 돌> / 양진채

<사진 = 인천민주화운동센터 제공>


영화 <1987>을 봤다. 사실 이번처럼 영화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이 본 건 처음이었다. 이미 <1987>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러 방송매체에서 1987년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다. 서울, 부산과 광주 등 여러 도시가 다뤄졌다. 그 시절의 상인, 넥타이부대, 택시운전사였던 이의 증언도 이어졌다. 그 ‘중심’에 인천은 비껴 있었다.

물론 부평역, 효성동, 청천동 등에서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조작을 규탄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있었다. 다만 항쟁의 중심에 서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바로 전 년도인 1986년에 일어났던 인천 5.3 항쟁의 영향이 컸다. 위키백과사전에서는 인천 5,3항쟁을 ‘1986년 5월 3일에 인천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으로 다음해 6월 항쟁의 불씨가 되는 민주화 운동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사실상 6월 항쟁의 1년 전 예고편이었다’라고 적혀 있었다. 설명대로 전국적 6월 항쟁의 불씨였으나 5.3항쟁으로 인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이 자행되면서 인천에서는 6월 항쟁을 조직화할 힘이 다른 지역에 비해 부족했다.

영화 <1987>을 보고 나니, 인천5.3항쟁이 떠올랐다. 6월 항쟁의 불씨였던 인천5·3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넘었다. 그때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그날 나는 들키지 않게 허리에 철사를 두르고 시민회관 광장 한 가운데에 있었다. 자꾸 쇠독이 오르려는지 허리가 가려웠지만 긁을 수가 없었다. 기다리던 호각소리가 나고, 나는 재빨리 리어커로 연단을 만드는 데로 달려가 허리춤의 철사를 풀러 내밀었다. 연단의 상판을 고정하는데 쓰였을 것이다. 수만 장의 유인물이 하얗게 도로를 채웠고, 어디선가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함성소리가 나기도 했고, 어깨를 걸고 발을 맞춰 행진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최루탄 자욱한 길에서 도망을 쳤고, 주안역 담벽이 무너진 걸 보았다. 옷에 묻은 최루탄가루 때문에 어딜 가든 사람들이 재채기를 했다.

이 기억은 조각나 있었다. 실재하는 것인가. 조작된 기억인가. 나는 그 광장 한 가운데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내가 팔을 치켜 올리며 강단지게 외쳤던 구호는 무엇이었나. 그때 그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날은 대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살아오면서 이 물음을 아주 가끔 되물었다. 아니, 정말로 궁금했다. 그날이 어떤 날로 명명지어질 수 있는지. 내가 그 광장에서 한 일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왜 그 이후의 기억들은 흐지부지한지. 왜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되묻고 있는지. 지금도 그 청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5·3을 꼭 풀어내고 싶었다. 그렇게 <플러싱의 숨 쉬는 돌>이 완성되었다.

중편소설 <플러싱의 숨 쉬는 돌>은 돌을 매개로한 세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마국에서 열풍처럼 불었던 숨 쉬는 돌인 ‘패트락’을 한국에서 팔아보려고 한 낭만적인 삼촌이 있다.


대문을 열었을 때, 삼촌은 철지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서 있었다. 진한 밤색 구두에 빨간 양말, 진초록 진바지에 흰 바탕에 커다란 야자수 잎이 프린트된 긴팔남방셔츠를 입고 있었고, 크리스마스트리의 하이라이트인 나무꼭대기 금색 별 대신 색이 바랜 패도라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남방셔츠는 얇아서 안이 훤히 비칠 정도였고, 코는 추위에 얼어서 빨갰고, 햇빛도 없는데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들고 있는 손은 핏줄이 비칠 정도였다. 허리에는 좀 과장하자면 레슬링선수가 찰 법한 커다란 벨트까지 하고 있었다. 모든 곳에 눈이 갔고, 어느 한 곳에도 눈을 두기가 어색했다. 입고 있는 옷들이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묘한 조화를 이루기도 했다.


이렇게 등장했던 삼촌은 바닷가에서 돌을 주워와 ‘숨 쉬는 돌’을 만들어 팔려고 했지만 엄혹한 시대는 삼촌의 낭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삼촌은 괴상한 복장과 기이한 행동으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나고 그 후유증으로 미국으로 가서는 지금까지 떠돌이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1986년 5.3 항쟁과 2008년 광화문 광장에 서 있던 그녀와 내가 있다.


내가 살던 도시에서 대규모 집회가 잡혔을 때도 이틀 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집회는 시민회관 앞에서 있을 예정이었다. 나는 몇 년 만에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았다. 내가 살던 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긴 했지만, 내가 태어나고 내가 살던, 멀리 부두와 바다를 가진 도시였다. 시민회관 주변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서로 모르는 척 지나쳤다. 말은 없었지만 무엇을 위해 왔는지는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플래카드를 접어서 배에 두르고 있었고 누군가는 각목을 숨겼다. 누군가는 전단지를 감추고 있었다. 나는 허리에 철사를 감고 있었고 표시가 나지 않도록 헐렁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철사는 아주 가늘지도, 굵지도 않은 적당히 휘어지는 것이다. 대여섯 가닥이 맨살에 둘러져 있었다.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시민회관에서는 야당의 지부당 결성대회를 몇 시간 앞두고 정부를 비판하는 선동용 방송을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에겐 우리의 시간이 있다. 누군가 휘슬을 불었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우성 속에서 재빨리 허리에 감고 있던 철사를 풀었다. 언뜻 허리의 붉은 줄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을 쳐다보고 만져볼 여유가 없었다. 리어커 위를 합판으로 덮고 연단을 세웠다. 철사로 연단이 무너지지 않게 지지대와 연결해서 고정시켜야 했다. 누군가는 각목을, 누군가는 합판을, 일사분란하게, 순식간에 연단이 만들어졌다. 공연장 무대를 방불케 하는 요즘 연단차량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선동차량이었다. 그때 우리의 힘은 리어커 연단처럼 보잘 것 없었다. 적어도 외향적으로는 그랬다.

전철역 방향으로 뛰었고, 개찰구를 뛰어넘고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전철을 무조건 탔다. 전철을 타자마자 바로 옆 사람이 재채기를 했다. 곧바로 그 옆 사람도 재채기를 했다. 우리 옷에 허옇게 묻은 최루가스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붙들고 있던 여자 손을 놓았다.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놀라서 그녀의 손목을 바라봤다. 도망칠 때, 시멘트벽에 긁힌 모양이었다. 제법 피가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묶어달라고 했다. 손수건을 접어 단단하게 묶었다. 우리는 사람들 눈을 피해 각자 열차의 다른 칸으로 옮겼다. 짓밟힌 단화가 보였다. 붙들 수는 없었다.

역사 내 텔레비전에서 오늘 있었던 시위에 대해 방송하고 있었다. 깨진 보도블록, 불타는 전투경찰차, 난무하는 유인물, 화염병을 든 시위대, 최루탄 가스로 자욱한 거리. 휘날리는 색색의 깃발들. 저기 사각 화면에서 비껴선 어디엔가 내가 있었다. 철사를 둘렀던 자리가 맹렬하게 가려워왔다. 참을 수가 없었다. 잠깐 아득해졌다.





이렇게 1986년 5.3항쟁을 함께 했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2008년 광화문광장에서 다시 만난다. 나는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 적당히 타협하며 안온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그녀는 지금까지 변치 않고 그 길을 가고 있었다.


“내 꿈이 뭔 줄 알아? 이 광장에 나와서 사람들한테 싸고 맛있는 잔치국수를 파는 거야. 다시마랑 양파랑 멸치 잔뜩 넣고 끓인 육수에 찰진 국수 가락이랑 김치도 몇 점 들어간 잔치국수 말이야. 배고파서 먹든, 맛으로 먹든 한 그릇씩 사서 서서 후루룩 면발과 국물을 들이켠 다음 광장으로 촛불을 들든, 깃발을 들든, 노래를 하든 다 같이 모여 춤추는 광경을 지켜보는 거야. 그러다 나도 앞치마를 풀고 같이 춤추는 거지.”

무모했다. 아니, 이성적으로는 무모하다고 생각했지만 얼른 다가가 그녀가 저 절벽을 올라설 수 있게 발판이라도 되어주고 싶었다. 어디선가 몇 사람이 스티로폼 박스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 스티로폼 박스를 밟고 몇 사람이 컨테이너 박스 위로 올라섰다.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녀도 컨테이너 위로 올라섰다. 함성이 이어졌다. 컨테이너에 막혀 주저앉은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가 컨테이너 위로 올라간 듯 했다. 대형 플래카드가 펼쳐졌다. 올라간 사람들이 대형 태극기를 흔들었다. 나는 그녀가 흔드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깃발을 흔들기에는 버거운 몸이었다. 깃발이 몸보다 컸다.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내내 간절한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인가. 그 간절함이 제 몸보다 커서 어떻게든 광장에 있기 위해 잔치국수라도 팔아보겠다고 말했던 것인가. 광장 어디에도 잔치국수를 파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만난 몇 년 뒤 그녀의 부고 문자를 받는다.


그녀의 부고는 뜻밖이었다. 사적인 단어 한 마디 없는 간결한 부고 문자였다. 어디서 어떻게 무엇 때문에 죽음을 맞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부고 문자를 받고 가볍게 떨었다. 며칠 동안 자잘한 실수가 이어졌다. 치약 대신 폼 클린징을 칫솔에 짜거나, 엘리베이터에 타서는 층수를 누르지 않은 채 서 있기도 하고, 문득 휴대전화 패턴을 잊어버려 열지 못하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흔들렸다. 결국 나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취해 밤바다를 찾았다. 삼촌이 페트락을 버린 바다였고, 스물 몇 살, 오월의 밤에 그녀와 내가 다음날 아침 찾아가기로 했던 바다이기도 했다. 나는 철썩이는 파도에 울음을 묻었다. 그리고는 기어코 휴대전화 주소록에서 그녀 이름을 찾아내어 눌렀다.


그녀의 부고는 삼촌을 찾아보려는 계기가 된다. 삼촌은 미국의 가난한 동네인 플러싱에서 카지노의 버스꾼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삶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요?
아니요. 나는 한국을 떠나온 지 아주 오래 되었고,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요. 평생 버스를 타고 카지노장이나 어슬렁거리게 될지라도 한국에는 가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는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않아요. 들러리니, 엑스트라니 하는 말들에 신경 쓰지 않아요. 나는 누가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요. 누구의 평가가 아니라 내 생을 삽니다.
그는 돈을 잃은 것이 미안해서 그랬는지 꽤 긴 말을, 그러나 단호하게 했다.

내가 막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그가 몸을 흔들었다. 한쪽 발로 담배를 비벼 끄듯 비벼주고, 수건이 있다고 생각하고 양쪽 끝을 붙잡아 엉덩이를 닦는 듯한 자세를 취해봐. 마구 비틀어주는 거지. 트위스트가 괜히 트위스트가 아니야. 마구 비벼준다는 뜻이거든. 마구마구 말이야. 흥이 저절로 몸에 차오를 때까지 흔들어봐.
삼촌이 트위스트를 췄다. 음악도 없이, 무성영화나 흑백필름을 보는 것 같이. 뒷모습이었고 엉덩이를 뒤로 쑥 빼고 있어서 오리궁둥이처럼 보이는 엉덩이를 흔들고, 그 옛날 내게 트위스트 춤을 가르쳐주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삼촌과 그녀와 나는 시대에 부딪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삼촌의 돌은 바닷가의 수많은 돌 중에 하나이지만 이름이 명명되는 순간 살아 있는 돌이 된다. 우리가 지나왔던 시대는 수많은 돌이 이름을 얻으며 만들어진 역사이다.
리어카로 연단을 만들기 위해 몸에 철사를 둘렀던 내가, 2008년 광화문 촛불집회에 나갔다가 공연장을 방불케 하는 무대와 엠프 시설을 갖춘 연단을 보고 느꼈을 벅찬 ‘격세지감’과도 같은 진일보가 있었다.

김성복 샘터교회 목사님은 인천 5.3항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의 진보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역사는 계속해서 진보해나가는 것이다. 착오를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 시대에 맡겨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 인천항쟁을 절대로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론이 먼저냐 실천이 문제냐, 인천 5·3항쟁은 이론 투쟁의 현장이었다. 이론 투쟁의 현장에서 87년의 민주화투쟁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거쳐야 될 과정이었다고 보는 거죠.”



<옛 시민회관 앞 5.3 항쟁 기념비. 2016년 5월3일 제막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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