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장, 예식장 그리고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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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장, 예식장 그리고 박물관
  • 유동현
  • 승인 2018.10.0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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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제물포구락부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 발자욱을 남긴 모교의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서 사진사 앞에서 졸업앨범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인천인이 개항을 눈으로 실감 한 것은 만국공원 주변에 들어선 양관(洋館), 즉 서양식 건물들이다. 존스톤별장(인천각), 세창양행 사택, 파울바우먼 주택 그리고 제물포구락부 등이 대표적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분 파괴되거나 훼손됐지만 제물포구락부만은 용도를 달리하면서 현재까지 건재하고 있다.

 

 

1957년도 인천고 앨범.


1960년도 인천무선고(현 재능고) 앨범.

 

1902년 건립된 제물포구락부는 외교관과 외국인 무역상 등의 친목을 위해 만든 사교클럽이었다. 구락부란 말은 ‘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을 한자로 차용한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넓은 당구장과 독서실, 그리고 근처에 테니스장을 갖췄다.

1914년 각국의 조계가 철폐되자 이 건물은 일본제국 재향군인회에 이관돼 ‘정방각(精芳閣)’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됐고 그 후 일본부인회 회관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광복 후 미군의 장교구락부로 사용되다가 1947년부터는 대한부인회 인천지부 회관으로 사용되면서 예식장과 다방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1965년도 대건고 앨범. 커다란 향로 안에 소리 질러 공명(共鳴)을 내곤했다.

 


1945년 이경성은 초대 인천시박물관장으로 발령 받았고 이듬해인 1946년 4월 l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 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이 개관됐다. 시립박물관이었지만 전시할 유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오래된 물건’을 찾아 나섰다. 육군조병창(부평)에 가서 일제가 중국대륙에서 강제 공출해온 중국 범종과 향로 등을 실어 왔다. 1953년 4월 1일 시립박물관은 옛 세창양행 사택(향토관)에서 제물포구락부 건물로 이전했다.


 

 

1967년도 인일여고 앨범.


 

제물포구락부(박물관)는 자유공원 광장에서 계단으로 연결되었다. 공원에 놀러온 사람들은 박물관으로 내려왔다. 입장료(5원 정도)가 있었기 때문에 실내 관람을 하지 않고 바깥에서 빙빙 돌곤 했다. 중국 범종은 비좁은 실내로 들어 갈 수 없었다. 박물관(제물포구락부) 뒷마당 노천에서 비바람을 그대로 맞았다. 행락객들은 애꿎은 범종을 주먹이나 작은 돌로 두들겨 보곤 했다. 장난기 많은 학생들은 머리를 부딪쳐 소리를 내기도 했다. 시립박물관은 1990년 5월 연수구 옥련동에 청사를 새로 짓고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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