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경기보다 치열했던 교련 경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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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경기보다 치열했던 교련 경연대회
  • 유동현
  • 승인 2018.10.2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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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교련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의 발자국을 남긴 모교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 사진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5,60년대 앨범에는 보이지 않던 낯선 사진들이 70년대 들어서자마자 보이기 시작한다. 학생들은 군복 비슷한 얼룩무늬 옷을 입었다. 1969년부터 ‘교련(敎鍊)’이 전면적 실시되었다. 1968년 북한이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해 무장간첩(공비)을 침투시킨 1·21사태가 발생했다. 안보의식과 전시 상황에서의 대처능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교련이 고등학교의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 당시 주 4시간이던 체육 수업을 3시간 줄이고 교련을 주 2시간으로 편성했다.
 


1976년도 동인천고 앨범.

1973년도 동산고 앨범. 인근 부대에 가서 사격 훈련을 받고 있다.

 
당시 학생회 대표는 연대장으로, 학년 대표를 대대장으로 불렀다. 먼저 제식훈련을 배운 후 분열과 사열을 실시했다. 이후 남학생은 총검술, 소총분해 결합 등을 배웠다. 총은 나무로 만든 목총이 대부분이었고 80년대부터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M16 소총을 다뤘다. 여학생은 주로 구급법을 익혔다.

 

1978년도 인성여고 앨범. 학생회 간부들의 ‘칼 같은’ 자세.

1978년도 인천공고 앨범.

 
교련복은 남학생들에게는 친척 결혼식 참가 복장으로도, 혹은 데이트 때 입는 외출복이기도 했다. 단체 소풍의 유니폼이었고 교내 실습복이나 작업복으로도 사용했다. 교련복은 지금의 아웃도어 복장처럼 다용도로 활용했다.
교련 시간에는 교련복에 요대, 각반 등을 갖춰 입어야 했다. 깜박하고 교련복을 집에 두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쉬는 시간에 옆 반을 돌아다니며 교련복을 빌리려고 난리를 피기도 했다.
 


1973년도 인천여상 앨범. 가운데 몸집이 작은 친구들이 ‘부상병 이송 대회’의 환자역이다.

1976년도 제물포고 앨범. 현역병을 방불케 한 각개전투 시범 장면


1년에 한 번씩 교내에서 교련 실기 평가를 받았다. 교련 담당 장학사와 현역 군인들이 완장을 차고 나타났다. 교장 선생님 이하 모든 선생님이 끝날 때 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학교 대항 교련실기 경연대회도 있었다. 공설운동장에서 시내 모든 고교가 한자리에 모여 교련 실력을 겨뤘다. 스포츠 경기처럼 가마니 이고 달리기, 사격, 환자 나르기, 구급법 등 각 분야별로 학교 대표 선수를 뽑아 순위를 정했다. 학교 간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1974년도 대헌공고 앨범.

1976년도 영화실고 앨범.

 
위 사진은 대헌공고 학생들이 교련경연대회에 참가해서 의장대 시범을 보이는 장면이다. 행사 후 여고생들의 쪽지 편지 좀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연 대회가 끝나면 각 학교가 보부도 당당하게 시내를 행진했다. 여학생들도 교련복에 구급가방 몸에 걸치고 군가를 부르며 행진했다.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흥미진진한 볼거리였다. 교련수업은 1997년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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