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유 주민 150명 분연히 일어나 만세를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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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 주민 150명 분연히 일어나 만세를 외치다’
  • 윤성문 기자
  • 승인 2019.02.27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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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기념] (1) 용유도 만세운동



인천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 탄압에 맞선 저항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인천시민들에게 잘 알려진 황어장터와 창영초등학교, 강화지역 등 3.1운동 발상지 외에도 일제에 저항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인천in>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인천출신 소설가인 이원규 작가의 재판기록 등 정확하고 생생한 독립운동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잘 알려지지 못한 인천 3·1운동의 현장을 두차례 나눠 싣는다.

 
1919년 3월28일 일어난 용유면 만세 운동 판결문 중 일부. <사진출처=이원규 작가, 국가기록원>



▲ 용유도.
 
용유도는 인천시 중구 용유동에 위치한 섬으로, 면적 13.603km, 해안선길이 48.2km, 최고점은 오성산 172m이다. 유인도 3개와 무인도 7개가 이루어져 마치 용이 헤엄을 치고 있는 것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인천 서쪽으로 24km 떨어진 섬으로, 썰물 때는 거대한 갯벌이 드러나 영종도, 신불도, 삼목도와 연도가 됐으나 인천국제공항의 건설로 매립됐다.

지금은 영종과 함께 육지화된 용유도에서도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 탄압에 저항한 주민 150여명이 분연히 일어나 조직적인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 비밀결사대 혈성단 조직, 150여명 독립만세를 외치다.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번역본’에 따르면 1919년 3월23일과 24일 용유면 남북리에 사는 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등은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비밀결사대인 ‘혈성단’을 결성했다.
 
이들 4명은 3월28일 독립운동을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구한국기(태극기)를 만들어 ‘혈서단주모자’라는 제목으로 각자의 이름을 크게 썼다.
 
이들은 이어 '조선독립운동을 거사할 것이니, 28일 용유면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는 내용이 담긴 격문 80여통을 작성해 동면, 남북리, 거잠리, 을왕리, 덕교리 등 마을사람들에게 배부했다.
 
거사 당일인 28일 조명원 등 4명과 각 지역의 선봉인 김윤배·윤치방·윤보신·유웅렬·오기섭·구길서는 관청리 광장에서 태극기를 중앙에 세우고 주민 150여명과 함께 힘차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용유면 만세 운동 주동자 중 최봉학 수형카드. <사진출처=이원규 작가, 국가기록원>
 


▲ 만세 운동 주동자 4명 옥고 치뤄
 
용유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조명원 등 9명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같은해 5월과 7월 1·2심은 이들에게 유죄를 판결했다. 재판기록에 상세히 나온 사실들이다.
 
재판 결과에 불복한 이들은 상고했다. 당시 조종서 등은 상고 취의에서 ‘본인이 만세를 부른 것은 조선인으로 당연한 일인데, 이를 범죄라고 해 징역에 처해졌다’며 ‘이에 복종하지 않고 상고하니 공명하게 판결을 내려주기를 바란다’고 당당히 밝혔다.
 
이어 ‘정치라는 것은 형세와 민도를 살피며 이에 순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압제적 정치와 무력적 압박은 없어지고, 온 세상이 민주화해 민권을 확장하는 이 시기에 오직 조선인은 무관정치 아래에서 자유와 참정의 권리를 잃어버리고 간신히 목숨을 보존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세계를 정조하는 이 시기에 조선독립을 운동하는 것은 민족발전의 요구에서 나온 것이며 형세에 순응하는 것'이라며 ‘이를 어찌 범죄라 부르겠냐‘고 말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참담한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담대하고 조리있게 항변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해 9월 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결국 조명원은 징역 1년6월, 조종서·최봉학·문무현은 징역 1년, 김윤배·윤치방·윤보신·유웅렬·오기섭·구길서는 태형 90대를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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