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만세 운동으로 뜨거웠던 관교리'
상태바
'횃불 만세 운동으로 뜨거웠던 관교리'
  • 윤성문 기자
  • 승인 2019.02.28 16: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2) 관교리 만세 운동

 
인천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 탄압에 맞선 저항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인천시민들에게 잘 알려진 황어장터와 창영초등학교, 강화지역 등 3.1운동 발상지 외에도 일제에 저항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인천in>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인천출신 소설가인 이원규 작가의 재판기록 등 정확하고 생생한 독립운동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잘 알려지지 못한 인천 3·1운동의 현장을 두 차례 나눠 싣는다.
 
 
 
1919년 3월27일 관교리 만세 운동 관련 판결문 중 일부. <사진출처=이원규 작가, 국가기록원> 
 

▲ 문학면 관교리.
 
지금의 문학동과 관교동은 1883년 개항 이전 인천부의 중심이었다. 1842년 발간된 ‘인천부읍지’는 오늘날 문학동 일대를 부내면 산성리와 남산리라고 기록했다. 일제강점기 초기인 1906년 문학동과 관교동 일대는 구읍면이라는 지명으로 변경됐다. 

이후 일제는 1914년 4월 행정구역 통폐합을 진행하며 인천의 일부와 부평의 일부를 떼어 부천군을 신설했다. 이때 구읍면과 서면(연수구 일대)은 부천군 문학면으로 병합됐다.

관교리는 관청리와 향교리가 통합된 지명으로 문학면에 편입됐다. 이후 1936년 인천부로 편입됐고, 광복 이후 1946년 관교동으로 변경됐다.
 
옛 관교리 지역의 상당 부분은 현재 문학동 북부와 주안7동 남부에 소속됐다. 지금의 관교동 영역은 대부분 옛 승기리(관교중 인근)와 관교리 남부 잔여 지역(인천터미널 일대)에 해당한다.
 
 
▲ 횃불로 뜨거웠던 관교리 만세 운동.

1919년 3월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항일 만세 운동은 인천에서도 거세게 일어났다.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번역본’과 ‘독립유공자 공훈록’ 등에 따르면 1919년 3월 부천군 일대에서 24일부터 28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문학면 관교리에서는 3월27일 오후 이무경, 오주선, 이창범, 이재경, 이상태, 최개성, 최선택, 이보경 등의 주동으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자극을 받은 민중들이 스스로 항거 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문학면 관교리는 부천군 군청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이들은 만세시위 당일 밤 마을 주민 15명과 함께 거주지 마을과 뒷산 등지에서 횃불을 올리고 동네를 행진했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세 불렀다'

관교리 만세 운동을 벌인 이무경 등 8명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당시 신문조서 기록과 재판기록을 보면 이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함께 조국 독립을 바라는 열망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최선택은 당시 신문조서에서 ‘자신은 농업을 하는 자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지만 구한국이 좋다고 생각한다'며 '근처 산에서 만세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자신도 독립만세를 부를 생각으로 갔다’고 진술했다.
 
이보경은 ‘자신은 할 수 있다면 원래의 한국이 좋다고 생각했고, 각지의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자신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동생이 만세를 부르러 가자고 권유했고, 마침 만세를 부른다는 것을 깨닫고 나가 보니 15여명이 모여서 만세를 부르고 있어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
 
이상태는 ’자신은 할 수 있다면 원래의 한국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며 ’산에서 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급하게 산으로 갔더니 큰 무리가 산을 내려오는 것을 만났기에 그 곳에서 이들과 만세를 불렀다.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

이들은 같은해 5월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 받았다. 이후 공소했지만 같은 해 7월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돼 옥고를 치렀다.




<인천시 미추홀구 매소홀로553 문학초등학교 앞길. 바로 1919년 3.1운동이 발생한 지점으로 추정된다. 문학동 토박이인 이기요씨(72)는 “문학, 관교동 일대가 개발되기 전까지 사람이 모일만한 거리는 현 문학초교 앞길이 유일했다.” 며 3.1 만세운동 장소로 이 길을 지목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