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각(畵角)으로 전통의 미를 꽃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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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각(畵角)으로 전통의 미를 꽃 피우다
  • 김지숙 객원기자
  • 승인 2010.12.14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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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09호 이재만과의 만남




우리나라 유일의 화각장 이재만의 작품.

화각장(畵角匠) 이재만(60.남동구 간석동).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그는 대한민국이 지정한 최고의 화각공예인이다. 40여년을 쌓아온 그의 화각공예기술은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지하공방에서 그는 홀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화각공예는 쇠뿔을 종이처럼 얇게 자른 다음 뒷면에 안료로 문양을 그리고 채색하여 만든 공예품을 말해요. 장, 문갑 등과 같은 가구류와 예물함이나 반짇고리 등 생활용품에 쓰이는 전통공예기술이죠. 워낙 왕실에서만 사용한 데다 재료자체가 유기물이어서 전해져 내려오는 유물은 많지 않죠. 18세기 후반 작품이 20점 정도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씨는 신문배달 하는 친구의 소개로 1966년 (고) 음일천 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화각공예기술을 전수받게 됐다.
 
“스승님은 옻칠, 화각, 소목, 장석 두석, 불탑 등 여러 작품을 모두 하셨어요. 그런 분이셨기에 작품을 할 때마다 하나하나 스승님의 지적이 큰 도움이 됐죠.”

스승의 가르침에 따른 실력도 실력이지만 작품에 대한 그의 집념은 대단했다. 화각 공예는 모든 과정을 손으로 해야 하는 데다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작업. 그래서 그의 손가락은 온전치 못했다.

"어릴 때 화롯불에 손을 데어 손이 모두 오그라들었어요. 손이 이래서 어머니도 나도 손으로는 먹고 살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의외의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죠.”

그는 “익숙해져 별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의 작품에선 남들보다 더한 갑절의 노력과 감각이 읽혀졌다.  

“어린 시절 그림을 낙서하듯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중학교 들어가서 그림에 대한 매력을 느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만화에 집중했죠. 사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동양화, 서양화를 비롯해 간판, 분장 등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이씨 작품엔 창작민화가 많다. 화조, 십장생, 전통그림 등 민화 풍을 바탕으로 창작을 한다. 다양하게 많이 만들었고 전통문화를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유물 복원작업도 해왔다. 가까운 시일에 전통문양집도 발간할 예정이라고 했다.

행사나 전시 참여도 활발하다. 각국의 초대를 받아 뉴욕, 두바이, 프랑스, 일본, 중국 등지에서 수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국내에서도 각지에서 벌인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해 왔다. 


“명성에 비해 현실의 벽은 높아요”

전시를 위해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까지는 서른 다섯 번의 공정과정을 거쳐야 하고 길게는 1년 넘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작품도 있단다. 그런데 이씨는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늘 기대에 못 미쳐 아쉽다고 했다.

“내가 벌어 내가 만들어야 하니까 너무 어렵죠.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 만드니까 단가가 높아 유통이 잘 되지 않는 편이에요. 또 작품을 다 만든 후 ‘누가 가져 갈 것인가’ 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 좀 아쉬워요.”

그런 면에서 이씨는 “정부가 기업과 연결해 유통방안을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인간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진심으로 갖고 작가는 세계 시장에 내놓을 작품만 신경 쓰도록 여건이 허락되면 좋겠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 전통문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죠. 우리 문화가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게 보전에 힘쓰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인간문화재들이 고령이라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면서 제자 양성이 시급하다고 했다.

그러나 열악한 현실 때문에 배우려는 사람도 거의 없다. 다행히 이 씨의 두 아들이 화각공예에 뛰어들었다. 그는 “어려운 실정에서 생활을 생각하면 서로가 고민을 해야 하니까 밝지는 않죠”라며 염려와 안심이 뒤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현재 아들들이 열심히 배우고 있고 재능도 엿보이는 만큼 십년 후에는 더 잘하리라 믿는다”라고 말했다.



오로지 우리 것을 지켜내겠다는 사명감으로 힘든 길을 걷고 있는 그에게 바람을 물었다.
 
“전통공예에도 조기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전문교육과정이 있어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배우고 지켜나가면 제자양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죠.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전문가가 현장에서 교육을 시키는 장치를 통해 화각박사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그는 당장 “마땅한 교육장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주부들 대상으로 강좌를 하고 싶어도 교육장이 없습니다.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도 교육장이 없어 묻혀버리고 있는 게 현실이죠.”

현실의 벽은 높고, 어떻게 해서라도 “역사를 잇고 싶고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장인의 말에서 한 예술가의 깊은 시름과 고민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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