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읽는 삶과 책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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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읽는 삶과 책과 사람
  • 최종규
  • 승인 2011.01.06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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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김점선, 《점선뎐》

 책이란 줄거리읽기가 아닌 삶읽기입니다. 책이란 지식쌓기가 아니라 이야기나눔입니다. 책이란 정보찾기가 아닌 마음읽기입니다.

 어느 책 하나를 읽으면서 줄거리를 헤아리기만 한다면 참으로 덧없습니다. 흔히들,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책을 읽히고 나서 독후감을 쓰도록 하는데, 이 독후감이라는 글을 읽으면 하나같이 줄거리를 간추려 줄줄줄 늘어놓기만 합니다. 한자말 ‘독후감’이란 “읽은 다음 느낌”을 뜻하는데, 정작 아이들한테 독후감을 쓰라 하는 어른들부터 독후감이 어떻게 써야 하는 글인 줄 제대로 모릅니다. 차라리, 우리 말로 쉽게 ‘느낌글’을 쓰라 이야기한다면, 아이들도 줄거리 간추리기에 허덕일 일은 좀 줄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렇지만, 이름만 느낌글로 고쳐서 쓴다 한들, 독후감이든 느낌글이든 책을 읽고 나서 글 하나를 쓴다 할 때에, 또는 신문이나 잡지 같은 데에서 ‘책 소개 기사’를 싣는다 할 때에 보면, 어김없이 줄거리 늘어놓기에서 허덕입니다.

 어느 책 하나를 찾고 장만하여 읽어서 얻는 삶이란 고작 줄거리에 머물 뿐인 오늘날 대한민국입니다. 책 하나 읽으며 아름다운 삶을 만났다는 느낌글을 찾아 읽기 너무 힘듭니다. 책 하나 읽으면서 글쓴이하고 살가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느낌글을 마주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책 하나 읽고 난 다음, 글쓴이뿐 아니라 내 둘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하고 마음읽기와 마음얘기를 나누도록 새로 태어나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 동료가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것은 곧 내 또래도, 그래서 나 자신도 훌륭할 수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물을 독자적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일, 그것은 훌륭한 일이고, 칭찬받는 일이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 시골사람들은 그걸 자선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너무나도 당연히 나누어 먹는다. 무엇이든 나눈다. 정보도 나누고 우환도 나눈다. 그런 나눔 문화는 취미생활이나 여가활동이 아니다 ..  (37, 216쪽)

 그림쟁이였던 김점선 님 발자국을 찬찬히 아로새긴 책 《점선뎐》을 읽었습니다. 김점선 님은 당신이 그리고픈 대로 그림을 그렸다 합니다. 김점선 님은 당신이 살고픈 대로 한삶을 보냈다 합니다.

 김점선 님 그림이 좋은지 안 좋은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딱히 제 마음이나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이 아니라 더욱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누구 그림을 흉내내어 그렸다고는 느끼지 않아 반갑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림이라 해서 더 훌륭한 그림일 수 없어요. 제가 안 좋아하거나 몰라보거나 눈길을 안 두는 그림이라 해서 덜 떨어지거나 형편없는 그림일 수 없습니다. 그저 그림은 그림입니다.

 김점선 님이 꾸린 삶 또한 ‘좋다 나쁘다’라 잘라말할 수 없습니다. 김점선 님 삶은 그예 김점선 님 삶입니다. 김점선 님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즐겼다고 흙으로 돌아간 삶이면 넉넉합니다. 아쉬울 대목이란 슬플 대목이란 서운할 대목이란 없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따라 씩씩하고 힘차며 슬기롭게 걸어가면 될 삶입니다.

.. 그전까지 어른들이 내 앞에서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낮춰 본 적이 없었다. 어른들은 한결같이 의욕에 차서, 욕망에 부풀어 터질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까지 어른들은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면서, 너희들이 뭘 아니 하면서 잘난 체하든지, 나를 소외시키든지 했었다 … 내가 실컷 놀고 들어가서 져넉 밥상머리에서 오늘은 이런저런 놀이를 했다며 즐겁게 떠들면 어머니는 자기도 어려서 그런 놀이를 했었는데 아주 신이 났었다고 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친구같이 여겨져 아주 기분이 좋았다 … 나는 우리 나라에서 활기차게 아무 데나 다니면서 아무나 만나면서 천진난만하게 살고 싶다 ..  (51, 61, 310쪽)

 책이란 내가 좋아하는 삶에 걸맞게 찾아서 만나는 읽을거리입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삶을 억지스레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꾸릴 수 없습니다. ‘뜻을 이룬다(성공)는 생각으로 이름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자꾸 엉뚱한 데로 흐르도록 한다면 참 안쓰럽습니다. 한 나라에서 손꼽히는 그림쟁이가 되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온누리에 첫손 꼽히는 그림쟁이로 사랑받아야 할 까닭이 있나요.

 나는 내 삶터에서 내 그림을 좋아하며 내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넉넉합니다. 김점선 님은 다른 사람 말고 김점선 님 스스로 당신 삶을 사랑하며 당신 그림을 좋아하면 넉넉합니다.

 《점선뎐》이라는 책, 이른바 김점선 님 자서전은 당신 스스로 죽음이 곧 다가왔구나 하고 깨달으며 허물없이 털어놓은 이야기책입니다. 김점선 님 스스로 당신 삶을 참다이 사랑했는지, 거짓스레 사랑한다 말했는지, 아쉬움은 있는지, 얼마나 즐거운 삶이었는지를 곰곰이 돌아보며 적바림한 일기장입니다.

.. 홀로 나의 길을 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자신이 가장 원하는 짓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철학적인 사고체계 같은 거는 다 바다에 처넣어 버리고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 결국 그림도 생각을 벗어난 행위는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생각을 더 많이 해서 생각이 가지게 되는 해석마저 제거해야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 청년실업이 문제가 되는 세상이다. 지금의 청년들을 기른 어른들 자체가 일률적인 가치관이니 이 꼴이 된 것이다. 청년의 부모들이 오직 밥 먹고 사는 데 허덕이던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  (110, 111, 274쪽)

 책을 덮으면서 생각합니다. 김점선 님 이야기책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림쟁이 한 사람 삶은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흔한 삶이요 어디에서나 보는 여느 이웃입니다.

 박수근이면 어떻고 이중섭이면 어떠하겠습니까. 박수근이든 이중섭이든 김점선이든, 하나같이 내 곁에서 함께 살아간 이웃입니다. 또는 동무입니다. 때로는 동생이고, 누군가한테는 살붙이일 테지요.

 대단하다 싶은 사람이 쓰는 자서전이 아닙니다. 내 삶을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자서전입니다. 많은 사람들한테 널리 읽히려고 쓰는 자서전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돌아보며 내 한길이 얼마나 즐거웠는가를 짚어 보고자 쓰는 자서전입니다.

 자서전은 뉘우치는 책이 될 수 있고, 아쉬워하는 책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이 저물고 죽음 문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내 한삶을 되짚는 가운데 내 뒤에 선 숱한 사람들한테 한 마디 남겨 놓는 선물입니다. 막상 죽음을 코앞에 두고 보니, 내가 걸어온 길이 나한테 어떠하더라 하고 이야기를 걸면서, 한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서 보배롭게 보듬을 대목이란 무엇이더라 하고 깨달은 여러 가지를 적바림하는 일기장입니다.

.. 무언가를 아끼고 무언가를 조심하느라 주춤거리고 그러면서 좋은 작품이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자는 예술가가 아닌 협잡꾼이다 ..  (386쪽)

 김점선 님은 “대기업 앞에 길게 줄서는 청년들의 머리속에, 일류대학에 목맨 부모나 학생들의 머리속에 다른 꿈을 심어 줘야 한다(274쪽).”는 이야기를 남기며 삶을 마무리짓습니다. 생뚱맞은 이야기가 되려나요. 자서전이라는 글을 쓰면서 이 같은 이야기를 적는 사람은 좀 엉뚱하다 싶으려나요. 그렇다고 김점선 님이 제도권 교육을 나무란다든지 자율학습·보충수업 때문에 아이들이 얼마나 시들어 간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잘 안다거나 손사래치는지는 알 노릇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사람다이 살다가 사람다이 죽는 길을 즐거이 걷자면, 누구보다 당신과 당신 아이를 생각한다면, “대기업 앞에 길게 줄서는 청년들의 머리속에, 일류대학에 목맨 부모나 학생들의 머리속에 다른 꿈을 심어 줘야 한다.”는 말을 되뇔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책을 읽는 삶은 사람을 읽는 삶입니다. 사람을 읽는 삶은 마음을 읽는 삶입니다. 마음을 읽는 삶은 사랑을 읽는 삶입니다. 대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대학교이든 갤러리이든 청와대이든 모두 사랑이 아닌 돈입니다.

― 점선뎐 (김점선 글·그림,시작 펴냄,2003.3.2./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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