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 매끄럽고 백일 동안 꽃 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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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 매끄럽고 백일 동안 꽃 피워
  • 정충화
  • 승인 2011.08.2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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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화의 식물과 친구하기] 배롱나무

 
“花無는 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1960년대 초 발표된 대중가요 ‘노랫가락 차차차’의 한 소절이다. 이 노랫말에 담긴 ‘삶의 무상성’이라는 관념적 의미를 지워버리고 앞부분만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꽃이 제아무리 붉어야 열흘을 넘기기 어렵다”라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 노랫말이 무색하게도 한여름 된더위 속에서 무려 백일 동안이나 붉은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 7월에 피기 시작해 9월까지 붉은 꽃을 피워서 나무백일홍(木百日紅)으로도 불리는 배롱나무가 그것이다. 초본식물 가운데 ‘백일홍’이라는 국화과의 한해살이풀이 있긴 하지만 꽃이 오래간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두 식물 간에 상관관계가 없다.

사실 백일을 훨씬 넘기고도 꽃이 지지 않는 식물은 많다. 오랜 기간 붉은 꽃을 유지하는 천일홍도 그중 하나다. 공원 화단 등에 많이 심는 천일홍은 볼 때마다 어쩐지 메마른 느낌의 조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거리의 화단에 많이 심는 페튜니아도 초여름부터 서리가 내릴 무렵까지 오래도록 꽃을 피우지만, 이 꽃 역시 정이 붙질 않는다. 오래가는 꽃치고 시종 아름다움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시들어서도 쉬 지지 않는 꽃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시구가 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형기 시인의 시 ‘낙화’ 중)

원산지가 중국으로 알려진 배롱나무는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소교목이다. 중부 이남 지역에 많이 분포하는 수종으로 줄기는 연붉은 갈색을 띠며 비늘처럼 껍질이 벗겨져 매끄러운 상태가 된다. 잔가지가 많으며 수형이 고르지 못한 편이다. 마주나기로 달리는 잎은 타원형으로 표면에 윤기가 흐른다. 꽃은 7∼9월에 피며 가지 끝에서 원추꽃차례로 촘촘히 달린다. 갈라진 6개의 꽃잎과 꽃받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꽃잎이 파마머리처럼 뽀글뽀글한 게 특징이다. 꽃 빛은 대부분 붉거나 홍자색이며 드물게 흰 꽃이 피는 나무도 있다. 열매는 10월경 익는다.

꽃이 오래가는 배롱나무는 관상용으로 적합하여 공원이나 사찰, 도로변 조경수로 많이 심는다. 목재로서의 활용가치도 높아 조각품, 장식품의 소재로 쓰인다. 배롱나무꽃은 차로 달여 마실 수 있고 음식 재료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한방에서는 자미엽이라 부르는 잎을 백일해와 기침을 다스리는 약재로, 뿌리인 자미근을 각종 여성 질환을 다스리는 약재로 사용해왔다고 알려졌다. 매끄러운 나무껍질을 긁으면 간지럼을 탄다 하여 충청 지역에서는 간즈름나무 또는 간지럼나무로 부르며, 목백일홍(木百日紅), 자미화(紫薇花)로도 불린다.

배롱나무는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다. 전주-남원 간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도로변 화단 곳곳에서 이 나무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순천 송광사, 고창 선운사, 부안 개암사, 강진 백련사, 순창 강천사, 서산 개심사 등 이름만 들어도 울컥 그리움이 솟는 남녘 사찰에 가면 어느 곳에서나 배롱나무 한두 그루쯤은 쉽게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매끈한 나무줄기처럼 승려와 불자들이 세속의 탐욕이나 미련을 모두 벗어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선비들 또한 배롱나무 껍질에서 청렴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찾아내고 이 나무를 애호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그 매끄러운 표피가 여인의 나신을 떠오르게 한다 하여 여염집 안마당에 심는 것을 금기시했다고 한다. 시각적 해석에 따라 사랑채와 안채에 나무를 심는 기준이 이렇게 달랐으니 다른 면에서는 또 얼마나 그 편차가 컸을까 싶다.

배롱나무꽃은 사실 하나의 개체가 100일 동안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원추형 꽃대에서 하나의 꽃잎이 시들면 곁에 있던 다른 꽃잎이 터지고 그렇게 개개의 꽃잎이 피고 지는 가운데 꽃 전체가 외관상 붉은빛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개개의 삶도 그들 꽃잎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같은 공동체적 삶이 조화와 공존을 유지하는 데 있어 어느 일방의 희생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갈수록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려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불협화음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강자이건 약자이건, 부유층이건 하층민이건 간에 자연과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그저 극미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그처럼 하찮은 것들이 분수를 모르고 날뛰고 있으니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글/사진 : 정충화(시인, 생태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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