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언제나 마음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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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언제나 마음찍기
  • 최종규
  • 승인 2011.09.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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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레아,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

 사진책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한빛미디어,2010)는 첫 번째 이야기 다음에 나온 책입니다. ‘감성(感性)사진’이라는 말마디를 쓰는데, ‘감성’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을 뜻한다고 적힙니다. ‘자극(刺戟)’이란 “외부에서 작용을 주어 감각이나 마음에 반응이 일어나게 함”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성사진’이란 “마음이 움직이도록 건드리는 사진”이거나 “사람들 스스로 느끼도록 이끄는 사진”이라는 뜻입니다.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를 내놓은 레아 님은 “책 한 권 읽지 않고 사진을 시작했어요. 누군가의 책을 읽으면 누군가의 사진을 따라하게 될까 봐. 내 사진 속에 내 마음이 담기지 않게 될까 봐(2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다른 이가 걸어간 길을 따르는 일은 그리 마땅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 다른 사람인데 굳이 다른 사람 길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레아 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려 한다면, 레아 님이 내놓은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 또한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읽을 까닭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레아 님이 빚어서 나누려 하는 ‘감성사진’은 ‘레아 님 스스로 당신 길을 고이 걸어가려 하는 사진’인 만큼, ‘레아 님 사진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레아 님이 걸어간 길을 따르거나 젖어들거나 길들 수밖에 없’으니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기를 씁니다. 사진기는 ‘다른 누군가’가 만듭니다. ‘내가 만든 내 사진기’로 ‘나만이 선보이는 사진’을 찍는 사람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나 스스로 나만이 보는 빛느낌을 담는 내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입니다. 나 스스로 나만이 보는 빛느낌이란 없습니다. ‘나만 본다고 생각하는 빛느낌’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만든 사진기를 쓰지 않고, 내가 손수 만든 사진기를 쓰더라도 ‘사진기라는 틀을 만든 사람’이 일군 빛느낌 담는 그릇이라는 테두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고, 우리는 누구나 목숨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이고, 우리는 누구나 믿음입니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만화를 그리든 노래를 부르든 춤을 추든 모두 똑같습니다. 어느 갈래에서든 ‘나만 남달리 하는 길’이란 없습니다. ‘내가 내 삶을 즐겁게 살찌우면서 하는 길’만 있습니다.

 레아 님이 맨 처음에는 다른 사진책을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제는 다른 사진책을 찬찬히 살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진책을 잔뜩 들여다보더라도 ‘레아 님 나름대로 걷는 길이 흔들리지 않을 뿐더러, 더 단단해지거나 더 야물어지거나 더 빛나야 옳’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습니다. 느낄 대목은 느끼고, 배울 대목은 배우며, 나눌 대목은 나누면 됩니다.

 나한테 더 있으니 기쁘게 나눕니다. 나한테 모자라니 즐거이 받아들입니다. 나한테 힘이 있으니 예쁘게 씁니다. 나한테 힘이 없으니 반가이 맞아들입니다.

 다른 사람 사진책을 읽지 않는다는 소리란,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소리하고 똑같습니다.

 책이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책은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마디를 담은 종이그릇입니다. 언제라도 다시 되새길 만한 말마디를 엮은 슬기그릇입니다. 따라하거나 배우거나 좇으라고 하는 책이란 없습니다.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달리 아름다이 살아내면서 깨우치거나 느낀 좋은 슬기와 넋과 빛느낌을 스스럼없이 나누면서 서로서로 다 다른 사진길을 사랑스레 북돋우자고 해서 태어나는 사진책입니다.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사진에 마음을 담아내기 위해서입니다 … 설명서 같은 글이 싫어진 나는 갇혀 있던 감정을 사진과 함게 풀어내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30, 229쪽).”라는 이야기를 가만히 되새깁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까닭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밥을 먹으려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을 자려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밥을 먹고, 살아가기에 잠을 잡니다. 살아가는 동안 사랑을 나눕니다. 살아가는 내내 웃고 울며 떠듭니다. 누구나 살아숨쉬는 나날 언제나 ‘마음을 보여주고 마음을 읽으며 마음을 어깨동무합’니다. 어쩌면, 레아 님으로서는 “갇혔던 마음을 사진과 함께 풀어낸”다기보다, 이제껏 스스로 제대로 몰랐던 마음을 시나브로 찾아나서는 사진찍기와 사진에 글 붙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진이든 마음이 담기고, 어떠한 글이든 마음이 실리거든요.

 딱딱하다는 신문글이든 논문글이든 평론글이든, 이러한 글 어디에라도 마음이 안 담길 수 없습니다. 적어도 ‘딱딱하게 굳은 마음’이라도 담깁니다. 학문에만 파묻혀 둘레 사람들 따순 손길이나 눈길을 읽지 못하는 딱닥하게 굳은 마음이라도 담겨요.

 착한 마음만 마음일 수 없습니다. 맑은 마음만 마음이지 않습니다. 생채기를 입은 마음도 마음입니다. 다친 마음도 마음일 뿐 아니라, 아픈 마음과 슬픈 마음과 메마른 마음과 기운 꺾인 마음도 모조리 마음이에요. 굳은 마음이든 모진 마음이든 미운 마음이든 한결같이 마음입니다. 그저, 이 숱한 마음을 바라보면서, 어느 마음이 더 좋거나 더 나쁘다고 함부로 자르거나 잴 수 없어요.

 “우리가 걷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훌륭한 피사체가 될 수 있습니다 … 책과 인터넷에서 소개하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를 따라 타인이 걸었던 발자국을 쫓으며 허덕이는 대신 골목과 사람과 빛에 마음을 열어 보세요(167, 201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레아 님은 레아 님만이 바라보는 눈길대로 삶을 일구고 사진을 사랑하려 합니다. 앞서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만, 사진책을 읽건 안 읽건 대단하지 않으면서, 사진책을 읽는대서 이 사진책을 내놓은 사람 틀에 갇힐 까닭이 없듯이, 이름난 관광지를 간대서 내 마음이 따분해지거나 칙칙해지지 않습니다. 사람 발길이 뜸한 데를 찾아간다 해서 내 마음이 촉촉해지거나 해맑아지지 않아요. 언제 어디에 어떻게 누구와 있더라도 내 마음은 늘 내 마음 그대로입니다. 시골자락에서 포근한 마음이 될 때에는 몸 또한 포근한 몸일 텐데, 복닥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 포근하지 못한 몸이 되더라도, 마음은 포근하게 살릴 수 있어요. 몸이 힘들면 마음 또한 힘들지만, 몸이 힘들기에 마음은 한결 씩씩하게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살아숨쉬는 고운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살뜰히 살아숨쉬는 고운 목숨이면서 사진기를 손에 쥔 멋진 사진동무입니다.

 이리하여, 레아 님은 어쩔 수 없이 “이럴 때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카메라가 필요해진 거야.’(277쪽)”처럼 이야기하고야 맙니다.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사진마다 아래쪽에 어떤 사진기로 찍었는지 하나하나 밝히는데, 굳이 이렇게 밝힐 까닭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밝히는 뜻은 레아 님 나름대로 좋은 느낌과 넋과 매무새였다고 생각합니다만, 레아 님 사진책을 읽을 여느 사람한테는 ‘아하, 이런 사진을 찍으려면 이런 사진기를 써야 하는가 보구나.’ 하고 여기도록 이끕니다. 사진을 ‘마음’이 아닌 ‘사진기’로 찍도록 내몹니다.

 레아 님 스스로 ‘마음을 찍는 사진’이요 ‘마음을 나누는 사진’이라고 여긴다면, 사진마다 밝히는 ‘어떤 장비를 썼느냐’ 하는 대목을 잘라야 합니다. 아무 사진기를 쓰면 어떻고, 어떤 사진기를 썼다고 밝히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사진은 사진 그대로 바라보면서 즐겨야지요.

 레아 님이 어느 대학교를 다녔는지 알아야 레아 님 사진을 더 잘 헤아리거나 더욱 살가이 느낄 수 있지 않습니다. 레아 님이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어느 동네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를 알아야 레아 님 사진을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장비병’이 잘못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진은 사진장비로 일구지만, 내가 텃밭을 일구며 호미를 쓴다 해서 호미한테 휘둘리는 일이란 없습니다. 내 손에 쥔 호미일 뿐입니다. 할배가 쓰던 호미를 쓴들 내가 저잣거리에서 사온 호미를 쓴들, 풀을 뽑을 때에는 똑같습니다. 내가 쓰든 호미를 내 딸아이가 물려받아서 쓴들, 딸아이가 나중에 커서 스스로 호미를 장만해서 쓴들, 딸아이가 밭에서 무를 캘 때에는 똑같습니다.

 마음으로 주고받는 사진을 이야기하려 한다면, 말 그대로 마음만 보여주셔요. 마음이 아닌 자잘한 부스러기는 사진을 나누거나 사진을 사랑하거나 사진을 꽃피우는 길에 그저 걸림돌입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마음찍기였습니다. 다큐사진도 마음찍기요 상업사진도 마음찍기입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꿈을 꾸며 다 다른 삶을 일구는 마음찍기입니다.


―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 (레아 글·사진,한빛미디어,2010.8.31./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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