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 조계, 각국공동조계 - 나눠 먹힌 제물포 14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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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조계, 각국공동조계 - 나눠 먹힌 제물포 14만평
  • 김광성
  • 승인 2024.03.08 0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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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시대-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3) 대불호텔이 보이는 청·일조계지
변화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광속시대에 편승해 남기느냐 부수느냐 논쟁이 이어지는 사이, 한국 근현대사의 유구(遺構)들은 무수히 사라져 갔다. 외형적인 것만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정한(情恨)이 녹아 있는 기억마저 더불어 지워졌다. 사라진다는 것이 아쉬운 것은 시간의 흔적이라는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천 개항장을 그려온 김광성 작가가 최고와 최초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항장의 근대 풍경과 당대 서민들의 생활상, 손때 묻은 물상들을 붓맛에 실어 재구성한다.

 

 

우리는 원치 않았다.

조계가 뭔지 거류지가 뭔지도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일본이 나라가 지정해준 땅 7,000평에다 

분리 경계를 긋고 집을 짓고는 일본 조계라고 부르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조선 정부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는데다

치외법권의 특전까지 누리는 별천지로

온전한 자신들의 전용 거주 지역을 이른다고 했다.

행정권과 사법권도 독자적으로 행사하게 되니

‘나라 안의 나라’였고 ‘조선 속의 일본’이 되었다.

 

더 알고 보니

일본이 군함 운양호를 몰아

강화 초지진 포대를 박살낸 그 무력위세로

반 강제로 개항과 통상을 요구했고

겁을 먹은 조정은 일본이 하자는 대로

협상에 응했다는 것이었다.

청국도 권리독점에 나섰고

선린동 일대 5,000평의 터를 잡고

청관 거리를 조성하였다.

덩달아 미국, 영국, 독일도 밥숟가락을 들었고

청과 일본의 조계를 둘러싼 14만 여 평의

땅을 차지하고 각국공동조계를 형성하였다.

국력도 없고 국제사회에 정세도 어둡고

외교 능력이 부족한 조선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조선 민중의 땅인 제물포를 나눠 먹고 말았다.

조선의 땅은 그들의 밥이었다.

무능하고 미비했으므로 받는 대가는 혹독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 경계는 청일조계지 계단으로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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