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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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 최종규
  • 승인 2011.09.2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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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윤광준, 《아름다운 디카 세상》

 2002년에 《잘 찍은 사진 한 장》(웅진지식하우스)을 내놓은 윤광준 님이 이태 뒤 새롭게 내놓은 《아름다운 디카 세상》(웅진,2004)을 읽습니다. 윤광준 님은 “사진을 찍기 위해 특별한 곳을 가야 한다는 생각은 거추장스럽다(3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 옳다 싶은 이야기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남다르다 싶은 곳에 가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배우려고 남다르다 싶은 사진책이나 인문책을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남다르다 싶은 사진’ 한 장을 얻는 일이 부질없듯이, ‘잘 찍었다 싶은 사진’ 한 장을 얻는 일이 덧없습니다.

 《잘 찍은 사진 한 장》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사진삶을 이태 뒤에는 어느 만큼 곰삭였을까 궁금해서 《아름다운 디카 세상》을 펼칩니다. 사진밭에 처음 발을 들이는 이들이 윤광준 님 책을 퍽 즐겨읽을 뿐 아니라, 사진길을 그럭저럭 걷는 이 또한 윤광준 님 책을 꽤 들여다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사진말을 낳으며 사진꿈을 키우는 윤광준 님이기 때문에 “브레송과 같은 열정을 바치지 않는다면 평생에 걸쳐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 낼 확률은 거의 없다(80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고개를 갸웃합니다.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은 ‘어떤 열정’을 바쳤을까요. ‘평생에 걸쳐 결정스럽다 싶은 순간을 붙잡아야 할 까닭’이 꼭 있는가요.

 윤광준 님은 “사진이란 게 꼭 좋은 화질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나의 의식과 대상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좋은 사진 아닌가(139쪽)?” 하고 묻습니다. 우리한테 묻지 않습니다. 윤광준 님 스스로한테 묻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면서도 디지털사진기 화소수를 이야기하는 틀에서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묻지만, 막상 값싸고 가벼운 똑딱이를 즐겨쓴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디지털사진기를 쓸 때에도 ‘잘 찍은 사진’에 얽매이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진 한 장에는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이야기가 스며들 뿐 아니라, 사진 한 장을 빚는 사람 이야기가 나란히 깃듭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사진입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글입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글이 아닙니다.

 이야기 없이 쓰는 글은 느낌글이 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서평’이 되는데, 서평 가운데에서도 ‘주례사 서평’이 되고 맙니다. 이야기 없이 만든 문학은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 되지 못합니다. 어찌어찌 문학 테두리에 든달지라도 이야기가 없는 시나 소설이나 수필을 왜 읽겠습니까. 이야기 있는 삶에서 샘솟는 이야기 있는 문학입니다. 이야기 있는 삶에서 길어올리는 이야기 있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잘 찍었다’ 할 때에는 구도·초점·빛·빛깔·그늘을 잘 맞추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구도·초점·빛·빛깔·그늘을 잘 맞추며 찍은 사진은 ‘빈틈없이 찍었다’ 할 만한 사진이지 ‘잘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잘 찍은 사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만, 굳이 이런 꾸밈말을 넣어 말을 하자면, ‘잘 찍은’ 사진이란, 구도가 어긋나거나 초점이 흔들리거나 빛이 모자라거나 빛깔이 어수룩하거나 그늘이 맞지 않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살아숨쉬는’ 사진입니다.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이 빚은 사진은, 이른바 ‘잘 찍은 사진’이면서 ‘빈틈없이 찍은’ 사진입니다. 반드시 ‘열정을 바쳐야’ 브레송다운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내 삶을 아끼고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삶을 사랑하면서 사진 한 장으로 그러모을 꿈을 건사할 때에, 필름사진기이든 디지털사진기이든 값비싼 사진기이든 값싼 사진기이든, 어느 사진기를 손에 쥐더라도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따사로운 사진’ 한 장을 얻습니다.

 윤광준 님은 “사진 찍을 대상이 걷거나 뛰면 나 역시 그와 같이 움직이며 사진의 리얼리티를 표현해 내야 하는 것이다(190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옳다 싶은 말입니다. 다만, ‘사실성 짙은 느낌을 나타내야’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이란 무엇일까요. 한자말로 적는 ‘事實’ 말뜻을 제대로 헤아리는 분이 너무 적은데요, ‘사실’이란 “있는 그대로”입니다. 한 마디로 가리키면 “꾸밈없이”입니다. “본 그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이고, “덧붙이거나 깎거나 손질하는” 모습이 아니라 “꾸밈없는” 모습입니다.

 사진으로 찍힐 사람하고 ‘같이 움직이는’ 일은 틀림없이 잘 살필 매무새 가운데 하나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꼭 같이 움직이지 않아도 돼요. 가만히 멈추어 가만히 지켜보아도 돼요. 굳이 같이 뛰어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따라하기’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어울려 놀거나 사는 모습이 아니거든요. 말 그대로, 내가 사진으로 담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살아야’ 합니다. ‘같이 살면’ 넉넉해요.

 같이 살아가는 고운 벗이기 때문에, 고운 벗하고 오래도록 떨어져 지내더라도 마음으로는 날마다 만납니다. 같은 자리에서 두 눈을 마주보지 못하더라도 깊은 마음으로는 언제나 함께 지냅니다. 사진으로 담을 넋이란 서로 애틋하게 여기는 사랑 한 가지입니다. 눈으로 느끼는 모습을 넘어, 마음으로 아끼는 사랑입니다. 온몸으로 껴안고 온마음으로 부둥켜안는 기쁨입니다.

 윤광준 님은 ‘아름다운 디카 세상’이라 이야기하지만, 디지털사진기가 아름다운 누리를 이루자면, 이에 앞서 ‘우리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이 터전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름다이 일구는 삶’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사랑’이 샘솟아 ‘아름다운 사진’이 꽃피웁니다.

 어떤 장비를 쓰든 아름다울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아무 장비라도 아름다울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아름다이 살아가기에 글을 쓰면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고 그림을 그리면 그림에 아름다움이 깃들며 사진을 찍으면 사진에 아름다움이 깃듭니다. 사진이 아름답거나 필름사진기가 아름답거나 디지털사진기가 아름답지 않습니다.

 젓가락이 아름답기에 밥이 맛나지 않습니다. 밥그릇이 아름답기에 배불리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밥을 차린 손길이 아름답기에 밥이 맛납니다. 밥상에 오르기까지 땀흘린 흙일꾼 손마디가 아름답기에 배불리 밥을 먹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누며 즐기는 사람들 삶 밑자락을 건드리거나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아름다운 디카 세상》이 밝히거나 보여주려 하는 이야기를 옳게 건사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이리하여, 윤광준 님은 “카메라 하나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른 만큼 아들녀석과 나와의 이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2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사진기를 바라보는 눈이 아닙니다. 사진기와 놀이기계입니다. 윤광준 님 아들아이는 놀이기계로 디지털사진기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사진기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삶이 다르기에 사랑이 다르고, 사랑이 다른 만큼 사진이 다릅니다. 아니, 사진이 아닌 놀이라 할 테지요.

 사진기 하나로 온누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아닌 줄 느껴야 합니다. 살아가며 온누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다른 줄 헤아려야 합니다. 온누리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매무새가 다른 줄 살펴야 합니다.

 사진이란,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사랑을 꽃피우면서 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때에 이 다 다른 꿈결을 살뜰히 보듬는 어여쁜 손길 가운데 하나입니다.


― 아름다운 디카 세상 (윤광준 글·사진,웅진닷컴 펴냄,2004.4.30./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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