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그곳엔 전쟁의 아픔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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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곳엔 전쟁의 아픔이 흐른다"
  • 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
  • 승인 2011.12.18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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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대룡시장과 동구 양키시장

골목으로 이어지는 대룡시장 안의 시계포. 육지에서 고치지 못하는 태엽감기 괘종시계가 수리를 위해 가끔 택배로 배달되곤 한다.

<인천in - 인천시립박물관 협약>

유동현의 인천의 시장 이야기

6․25 동란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고 모이게 하면서 피난민과 원주민을 섞어놓았다. 그 과정을 겪으며 졸지에 사주팔자에도 없는 낯선 직업을 갖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대로 땅을 일구며 살아온 농사꾼이 길바닥에 돈 될 만한 물건을 내놓고 흥정하며 하루벌이를 하는 장사꾼이 되었다. 북한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은 ‘3.8 따라지’라고 불리는 냉대와 차별 속에서도 특유의 근면함과 강인함으로 짧은 시간에 시장을 형성하고 그 상권을 거머쥐었다. 그들이 주축이 된 시장이 교동도 대룡시장과 동구 송현동 양키시장이다.

황해도 피난민들이 만든 대룡시장

교동도는 강화군 섬 중에서 강화본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교동도는 우리나라 역사에 굳은살이 박힌 ‘옹이’와 같은 섬이다. 고려시대 교동은 ‘교류의 땅’이었다. 서해와 예성강, 임진강 그리고 한강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든 곳이었다. 특히 수도 개경과 가깝고 중국을 오가는 바닷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교동은 ‘유배의 땅’이었다. 연산군을 비롯해 안평대군, 광해군, 임해군 등 조선시대 폐군과 종친의 유배지로 자주 활용됐다. 급한 바다 물살이 길을 막아 외부인과의 접촉을 차단할 수 있고 한양과 가까워 유배인들에 대한 정보가 쉽사리 전달될 수 있다는 장점이 컸기 때문이다.

냉전시대 교동은 ‘단절의 땅’이었다.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면서 교동도의 북부 해안선은 이제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이 되었다.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있는 섬이기 때문에 해병대의 출입통제를 받는다. 출입이 편치 않아 외면 받았던 땅. 그 불편함과 통제의 철조망은 개발의 손길까지 막아줌으로써 자연의 순수함과 농촌의 순박함을 그대로 남겨놓게 했다. 섬은 그저 무심히 자기 자리만 지켜왔을 뿐이다.

그러나 요즘의 교동은 관광객과 낚시꾼들에게 인기를 끌며 왕래가 잦다. 특히 교동도에서 외지인의 방문이 가장 빈번한 곳은 대룡시장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1950~60년대 영화세트장 같은 이 시장이 얼마 전에 TV 프로그램 ‘1박2일’에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총 길이가 200m가 채 되지 않아 빠른 걸음으로 1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시장이다. 골목은 어른 두 명이 나란히 걸어갈 만한 폭이다. 짧고 좁은 시장통이지만 4, 50년 이상은 족히 돼 보이는 건물 안에 가게들이 어깨를 다정히 맞대고 있다. 특히 이제는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이발관, 장의사, 약방, 다방, 전파사 그리고 시계수리점 등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몇 발짝 걸음을 옮기면 잠시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 든다.

교동도에서 북한 연백까지의 거리는 약 4㎞에 불과하다. 교동도 최북단에선 날씨 좋은 날이면 육안으로도 연백 땅이 보인다. 전쟁 전 강화 일대와 연백 지역은 하루 생활권으로 묶일 만큼 가까웠다. 특히 교동도와 연백 주민들은 5일장이 서면 나룻배를 이용해 왕래하는 등 교류가 활발했다.

전쟁이 터지고 특히 1·4 후퇴 때 수많은 연백 주민들이 작은 목선을 타고 남으로 노를 저어 강화에 상륙했다. 지금도 교동도에는 황해도를 고향으로 둔 사람이 많아 강화 사투리보다는 황해도 말씨를 쓰는 사람이 더 흔하다.

맨몸뚱이로 황해도에서 건너 온 피란민들은 ‘산에서 나무를 찍어다’ 움막을 짓고는 떡장사며 국수장사를 했다. 일부는 천막을 치고 하잘 것 없는 물건을 내놓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들이 피란 왔을 때만 해도 교동도에는 딱히 시장이라는 것이 없었다. 집이 두어 채 서 있는 게 전부였고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마을이 커지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당시 피란민 가구에게 목재가 배급되었다. 그들은 나무와 합판을 사용해 얼기설기 판잣집을 만들고 주춧대를 놓아 가게들을 지었다. 이 시장이 바로 대룡시장이다. 지금 시장 골목에서 볼 수 있는 건물들 대부분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다.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지 하면서 하루하루 떡을 만들고 국수를 말아 대룡시장에서 팔았던 피란민들. 그들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내일이면 고향집에 돌아갈 수 있겠지 하면서 그곳에서 멈춘 시계 등을 고치며 오늘도 쓸쓸히 가게를 지키고 있다.

‘추억’을 파는 양키시장

1930년대 동구 송현동 개천가에 허름한 노점들이 하나둘씩 들어섰다. 밤늦도록 노점들이 불을 밝히면서 일대는 자연스레 야(夜)시장이 되었다. 1936년에 노천시장에 양철지붕을 얹어 ‘일용품시장’으로 변모하였다. 이것이 중앙시장의 시작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었지만 북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그 잿더미 위로 모여들었다. 쥐꼬리만한 밑천이라도 있으면 하꼬방 가게라도 열었고 없으면 날품 지게라도 지면서 시장에서 살았다. 그들은 억척스럽게 일하면서 채소, 이불, 옷 장사 등을 하며 상권을 일궈냈다. 동인천역을 끼고 있는 덕분에 중앙시장은 늘 사람들로 번잡했고 인천의 대표시장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장은 크게 혼수상가, 그릇상가 그리고 ‘양키시장’으로 섹터가 나뉘며 몸집이 커졌다. 그 중 중앙시장의 색깔을 가장 진하게 보여준 게 양키시장이었다. 송현동 100번지 양키시장. 물들인 군복, 청바지, 보세옷… 인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젊은 날 이곳과 얽힌 추억을 한두 개 쯤은 갖고 있는 시장이다. 1965년 12월 정식으로 시장 등록이 되었지만 그 시작은 6·25 동란 직후부터였다. 인천에는 미군부대가 곳곳에 있었다. 원래 양키물건을 은밀하게 거래하던 곳은 배다리 철교 밑 부근 노천이었다. 좌판을 깐 모습이 언뜻 보면 오늘날의 벼룩시장 같은 풍경이었다. 뒷문으로 흘러나온 양키물건들을 이곳에서 거래되었다.

이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시장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자유를 찾아 남하해 온 의미를 담은 듯 ‘송현자유시장’이란 정식 이름도 얻게 되었다. 그곳에는 양주와 양담배, 향수, 로션, 초콜릿, 스낵, 통조림 등. ‘양키’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보다는 동경심으로 인해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던 물건들이 좁은 선반에 빽빽하게 진열되었다. 다른 편 가게에서는 간이침대, 야전삽, 수통, 군용식량 등 각종 미군용품도 거래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돈 달러와 이른바 ‘빨간책’이라고 불리던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등 같은 도색잡지도 구할 수 있었다.

이제 인천에 양키들은 없다. 양키는 갔지만 아직 양키시장은 남아있다.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듯 어스름 조명 아래 늙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양키시장은 일반시장과는 모습부터가 다르다. 3층 높이의 건물이 시장을 사방으로 막고 있다. 시장이라기보다는 골목이다. 구제품, 보세품풍의 의류와 등산장비를 파는 가게를 포함해 1백여 개가 넘는 작은 가게들이 하루종일 한조각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골목에 줄지어있다. ‘쩨’를 쫓아 드나들던 사람들 발걸음으로 항상 활기를 띠던 시장도 이제는 바람만이 골목을 쓸쓸히 배회한다.

양키시장의 물건은 이제 더 이상 미군 부대 뒷문으로 나오지 않는다. 남대문시장 중간도매상들이 정식으로 수입된 물건들을 이곳에 공급한다. 가게 진열대에 놓여있는 허쉬 초콜릿과 코티 분을 보자 불현듯 여러 가지 ‘과거’가 그 위에 겹쳐진다. 그들이 파는 것은 이제 양키물건이 아니라 ‘추억’이다. 시간에 떼밀려 가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뒷모습은 서럽다.

글-사진 유동현(굿모닝 인천 편집장)
묵직한 의자, 타일 붙인 세수대 등 6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교동이발소.
대룡시장 가게의 상호는 아들, 손자의 이름을 그냥 붙인 경우가 많다.
무상으로 배급 받았던 목재, 함석 등으로 세운 가게. 후에 이층으로 올린 집들이 간혹 눈에 띤다.
시장 초입에 있는 교동도 유일의 장의사.
정식 이름인 ‘송현자유시장’ 간판이 걸린 양키시장의 입구
양키시장 한 가게 진열대에 쌓인 미제 물건들. 이제는 미군부대에서 나오지 않고 남대문시장에서 공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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