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판 양분화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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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판 양분화 "바람직하지 않다"
  • 하석용
  • 승인 2012.01.3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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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하석용 / 공존회의 대표 · 경제학 박사


무릇 자연계라는 것은 생명 가진 것들의 전쟁터다. 그리고 그 전쟁의 목표는 종(種)의 지속과 번영에 있다. 인간들이 자신의 필요와 인식기준에 맞추어 그들을 아무리 다양하게 미화하고 심지어 숭배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연구가 진전될수록 이러한 자연계의 전쟁 양태가 얼마나 인간들의 그것과 닮아 있는지 놀라게 된다. 공격하고 방어하는 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패거리를 짓고 타협하고 심지어 교활하게 침투하거나 잠복하고 속임수의 기술을 동원하기도 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진화되어 나왔다는 주장을 믿는다면 아마도 “자연이 인간을 닮았다”라고 하기보다는,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전투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 그 이유가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든 천사와 악마 사이의 존재이기 때문이든 굳이 따질 것 없이 인간은 전투적이다. 그것도 대단히 지독하게 전투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서로 싸우는 모습은 자연계와는 사뭇 다른 몇 가지 특징을 드러낸다. 아마도 높은 지능의 덕분이겠지만 인간은 전쟁이 아닌 전쟁의 형태로 생존 경쟁의 갈등을 해소하고 때로는 전쟁을 삶의 재미로까지 승화시키기도 한다. 각종 스포츠 게임, 경연대회, 토론, 시험제도, 선거 같은 인간의 사회적 삶의 드라마 그 밑바닥에는 분명히 전쟁의 본능이 깔려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인류는 전쟁을 하지 않는 어느 순간에도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가리켜 교묘하게도 평화라고 부른다.

이러한 변형된 전쟁의 형식 중에서도 특히 선거라고 하는 집단적인 게임은 다른 생존경쟁의 양식들과는 상당히 구분되는 특징과 의미를 갖는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최종적인 권력의 향방을 판가름하기 위한 이 형식은, 그 결과가 초래하는 영향이 막대한 만큼 참여의 규모와 전쟁을 수행하는 수단 역시 한 사회가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 아마도 국가 간의 전쟁을 제외하고 인류가 수행하는 최대 규모의 전쟁 아닌 전쟁이 선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발상(發祥)의 역사에 상관없이 현재 전 인류는 이 형식 속에서 그들 삶의 알파와 오메가를 엮어가고 있고, 아무리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려 애쓴다 하더라도 그 결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있을 수 없다.

선거의 특징이 이와 같고 보면 그 현장에서는, 물리적 전쟁을 피하려던 인간의 이성적인 커튼은 사라지고 벌거벗은 전쟁의 잔인함이 그대로 드러나기 쉽다. 오로지 종(種)의 승리만을 그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자연 생태계의 본성처럼 결과는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 참과 거짓의 구분은 빛을 잃고 그렇지 않아도 나약한 인간의 이성은 발디딜 곳을 찾지 못한다. 오직 “네 편”, “내 편”만이 의미를 가지며 뒤에 오게 될 “너와 나의 삶”은 최소한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은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좀처럼 그 진행과정이나 결과가 생산적이고 아름답기는 힘들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은원(恩怨)은 음으로 양으로 지속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영원한 독재를 꿈꾸기도 한다.

물론 인류가 평화롭기를 다함께 꿈꾸고 평화를 소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현명하다면 이러한 부조리의 현장을 대책 없이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연하게도 선거의 기술도 진화하고 있다. 신사협정의 아이디어도 나오고 투명성과 공정성에 관한 장치들이 다양하게 마련된다. 보복의 비윤리성이 강조되고 관용과 화합의 가치가 날로 중시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러한 이성적인 진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선거판에서 몰가치한 전쟁의 잔인한 특성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전 지구적인 사실이다. 아마도 인간의 운명적인 미련함이 근본적인 원인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개선이 가능한 길을 두고도 접근하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무릇 모든 갈등과 전쟁은 두 개의 대립하는 힘 사이에서 발생한다. 천사와 악마의 존재를 가정하는 한, 그 사이에서 평화의 성립은 불가능하고 공을 굴러 떨어뜨리는 중력에 대항하여 이를 밀어 올리려고 하는 시지프(Sisyphos) 왕의 미련한 역학적인 대립(사실은 제우스의 미련한 형벌)이 지속되는 한 시지프의 고난은 끝나지 않는다. 서로를 자신의 삶을 위하여 복속시키려는 부부 간 대립이 계속되는 한 평화로운 가정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통찰의 결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세계의 석학들이 모여 제시한 평화의 길이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상호 인정”이라는 명제이었고 그를 제도로 담아낸 것이 유네스코 헌장이다. 이를 굳이 부연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가치관의 다양성과 서로 다름의 존중이 인류의 자유를 확장하는 길이며 평화의 전제가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생존경쟁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염원하는 인류에게 있어 이는 궁극적인 집단 생존의 목표이며 이상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목표와 이상을 향한 진전을 방해하고 전쟁을 유도하는 어떠한 시도도 인류 진화에 역행하는 역사적 반동(反動)이며 반진보(反進步)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대한민국 선거판을 또 다시 선‧악의 전쟁구도로 편성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좀 더 신중할 것을 요구하고 싶다. 그러한 시도는 정당정치로부터 다음단계에 도래하여야 하는 무정당 정치를 비롯한 다양한 가능성의 배태(胚胎)를 방해할 수 있고 이 사회를 영원한 전쟁터로 몰아넣는 역사적인 반동행위가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통하여 정치는 오로지 권력과 이익의 쟁탈에 골몰하는 위선적인 집단들의 극한적 패싸움의 전장(戰場)으로 타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당이 분해되면 분해될수록 선거라는 전쟁의 야만성은 줄어들 것이며 국민의 가치 선택의 가능성은 커지고 사회적 논의는 활발해지지 않겠는가. 누가 무슨 권리로 양자택일의 선택만을 국민에게 강요할 수 있을 것인가. 
 
선‧악의 영원한 2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서구 사회조차 다양한 가능성을 고민하는 시대다. 모든 형태의 정치적인 실험을 골고루 경험한 우리 사회가 이제 앞장서서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실험에 도전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나는 솔직히 이번 선거에서 대규모 무정당의 실험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그 길만이 이 사회의 전장화를 막을 수 있다고 믿어서다. 누구도 역사를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믿어서다. 인간은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도 종을 지속시킬 수 있고 번영을 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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