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 시인 옛집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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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 시인 옛집을 둘러본다
  • 최일화
  • 승인 2012.05.1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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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산티니케탄 기행(1)

산티니케탄(대학이 자리한 곳)에서 스리니케탄(타고르가 세운 영농개발센터가 있는 곳)으로 갈 때 차팀탈라(타고르와 그의 아버지가 기도하던 장소) 북쪽 지역이 우타라얀(Utarayana)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타고르의 옛집 이름이 아니라 그곳 아쉬람(Ashram, 수행자들의 공동체)의 특별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아쉬람 북쪽에 있기 때문에 우타라얀(우타는 벵골어로 북쪽의 뜻)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우타라얀에는 매우 중요한 다섯 채 건물이 있는데, 라빈드라나드 타고르가 생의 마지막 20년 동안 각 집에 일정 기간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럼 이번 여행을 통해 보고 온 각 집에 대해서 간단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꼬나라크(Konarak)
이 집은 우타라얀의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다. 이 집 옆에는 목화밭이 있었다고 한다. 우타라얀에 처음엔 두 개의 오두막이 지어졌는데 이 두 오두막집의 하나가 꼬나라크다.

1922년경에 지어졌는데, 타고르가 직접 건축을 감독했다고 한다. 그 후 시인 마음에 들 때까지 여러 번 변경과 재건축을 시행해야만 했다. 처음 이집은 조약돌을 박은 바닥에 볏짚으로 지붕을 얹은 초가집이었다. 나중에 지붕과 바닥을 다 제거하고 항구적인 시멘트 구조물로 재건축 되었다.

꼬라나크 방들의 바닥 높이가 모두 같지는 않았다. 어떤 방의 바닥은 이어진 다른 바닥에 비해 더 높았다. 지붕도 일정하게 같은 높이로 한 게 아니라 높고 낮도록 분배했다. 그 옆에 우다야나(Udayana)가 지어지기 전까지 타고르의 연극 리허설이 이 곳 꼬라나크에서 행해졌다. 타고르 시인 사후엔 며느리 프로티마 데비가 오랫동안 이 집에 살았다.

우다야나(Udayana)

이 집은 1020년부터 1925년까지 5년 동안 지어졌다. 고상한 건축양식이 이 집의 최대 매력이다. 이 집은 한 번에 한 번에 내쳐 지어진 것은 아니다. 여러 부분을 떼내고 시차를 두고 재건축되어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건축학적으로는 인도와 해외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지어졌다. 방의 모양은 다양하고 천장의 높이도 제 각각이지만 모두 미학적 규칙을 따랐다. 안쪽에 홀이 있는데 천정은 나무 조각들로 덮여 있다.

중심부엔 텅 빈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 가장자리로 빙 둘러 푹신한 소파와 대나무 의자들이 놓여 있다. 불상도 하나 놓여 있어서 타고르가 불교신자인가 하고 의아해 하기도 했다. 타고르 생존 시 이곳에서 그의 연극과 무용극 등 창작물 리허설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곳에서 문학행사, 각종 모임, 회의 등이 정기적으로 열리기도 했다. 벽은 시원하고 친환경적으로 대나무 줄기로 엮어졌다. 실내를 장식하고 있는 그림은 타고르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채워졌으며 시인의 마지막 생일잔치가 열린 곳도 이 집의 베란다였다. 1941년 7월 25일 캘커타로 치료하러 떠난 후 타고르는 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타고르 박물관이 이 집에 들어서기도 했기 때문에 타고르 추모의 집이기도 하다. 나중에 박물관 건물을 새로 짓고 이사했다.

샤말리(Shyamali)

꼬나라크 동쪽에 있는 흙집이다. 타고르는 1935년 5월 생일을 맞아 이 집으로 이사햇다. 이 집과 벽 모두 마른 흙으로 되어 있다. 화가 난다달, 조각가 람낀까르가 합동으로 감독하여 환경 친화적인 집을 지었다.

미술대학인 깔라바반 학생들이 여러 조각상을 새겨서 벽에 부착했다. 이 집 입구의 남녀 산탈상은 람낀까르 바이즈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집의 동쪽 벽의 말 조각상은 난다달 보세에 의해 만들어졌다. 집의 앞부분은 법정의 마당처럼 반달모양으로 설계되었다.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타고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흙집이 또 지어졌습니다. 아름답게 지어졌습니다. 정말로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지붕도 흙으로 마무리했지요. 가장 독특한 형태입니다. 만약에 마을 사람들이 지붕을 볏짚으로 엮어 얹는 대신 흙으로 지붕을 만든다면 지붕은 다양하게 이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재로 인한 위험도 더 이상 볏짚을 가축의 먹이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샤말리는 여러 시기에 걸쳐 간디, 샤스트리(1964~1966, 인도총리) , 비노바 바브(인도에서 맨발의 성자로 추앙받는 인물), 테레사 수녀 같은 귀빈들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푸나차 (Punascha)

시인에겐 불안증세가 있었다. 그는 한 집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시간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환경에 둘러싸일 때 시인의 마음은 점점 갑갑해지는 것 같았다.

'이곳이 아니고, 아니고 어딘가 다른 곳, 다른 곳 어딘가, 이것이 아마 그의 마음의 후렴구와도 같지 않았을까.'

그래서 시인의 소원에 따라 샤말리 동쪽에 푸나차가 지어졌다. 이 집의 지붕은 콘크리트다. 그러나 벽은 진흙으로 되어 있다.

사면이 베란다로 둘러싸인 가운데 방이 하나 있다. 나중에 시인의 소원에 따라 이 베란다가 유리로 둘러쳐지게 되었다. 이 집은 1936년에 준공되었다. 시인이 지은 마지막 집은 샤말리로 기록이 되었다가 후에 이 집이 지어졌기 때문에 푸나챠 혹은 Postscript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집에 머무는 동안 시인은 많은 그림을 그렸다.

우디치(Udichi)

푸나차의 남동쪽에 위한 집이 우디치다. 푸나차에도 싫증이 나자 우디치를 지었다. 시인은 생애 마지막 날들을 이곳에서 보냈다. 1938년 시인의 생일날 준공되었다.

처음엔 1층엔 2층의 방 하나와 베란다를 떠받치는 기둥을 제외하면 텅 빈 공간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난간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시인이 1층에도 방을 갖기를 희망하여 기둥 사이에 벽이 만들어지고 1층에도 방이 생기게 되었다.

이 집은 처음엔 Senjuti라고 불렸는데, 나중에 이 집이 북쪽에 있다고 해서 우디치로 불리게 되었다. 이 집은 차멜리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구적인 이름은 우디치다. 타고르 시인이 만든 장미정원이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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