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녹차나무 - 국내 최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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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녹차나무 - 국내 최고령
  • 이창희
  • 승인 2012.06.29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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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수풍물] 녹차의 향기를 느껴보자

녹차는 차나무의 어린 잎을 덖어 말린 것이다. 따뜻한 물에 우려 마신다. 차나무는 지구 북반구 여러 지역에서 재배한다. 인도와 중국, 일본, 한국이 주산지이다. 지역에 따라 차나무 품종이 조금씩 다른데, 인도와 중국은 대엽종이 흔하고 한국과 일본은 소엽종이 주류이다. 찻잎을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차가 나온다.

우리나라 녹차는 찻잎을 고온에서 덖어 산화효소의 작용을 정지시키므로 발효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불발효차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적당히 발효시킨 반발효차를, 인도와 유럽에서는 완전발효차를 즐긴다. 일본의 차는 불발효차인 것은 우리와 같으나 증기로 찐다는 것이 다르다.

차나무는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오는 기후에서 잘 자란다. 연평균 기온은 섭씨 13도 내외여야 하고 연간 강수량이 1,400mm 이상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기후를 보일 수 있는 곳은 남녘 땅 일부이다. 그래서 제주와 전남, 경남 등 국토의 최남단에서 차가 재배된다. 토종 차나무가 있다고도 하나 삼국시대 인도나 중국에서 도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동의 차나무는 삼국시대 때 심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공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수로왕 때 인도에서 들어온 차나무가 심어진 것이라는 기록도 있다. 지리산 쌍계사 입구에 있는 대렴공추원비에는 지리산 쌍계사가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라 적혀 있다. 하동의 차 재배지는 화개면에 몰려 있다.

정확하게는 화개계곡 입구에서 시작하여 신흥마을까지 12km 구간 계곡 양옆이 차밭이다. 지도에서 보면 화개계곡은 신흥마을에서 섬진장이 닿는 계곡 입구까지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볕이 잘 드는 계곡이다. 또 지리산을 뒤로 두어 북풍을 막고 있다. 차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지역인 것이다. 전국 차 생산량의 23퍼센트 정도를 이 계곡의 차밭에서 낸다.

화개계곡은 십리 벚꽃 길로 유명하다. 차나무는 이 벚꽃이 진 후 그 어린 잎을 돋운다. 절기로는 곡우이며 양력으로 4월 20일 전후이다. 차나무에서 처음 나온 이때 어린 찻잎을 우전(雨前)이라 하여 귀하게 여긴다. ‘곡우 전에 딴 차’라는 뜻이지만 곡우 이후 어린 찻잎도 이렇게 부른다.

우전을 따고 난 후 입하(5월 5일 무렵) 이전에 딴 차를 세작, 그 이후의 차를 중작, 대작이라 한다. 생산량 비율로 보면 우전이 15퍼센트, 세작이 30퍼센트, 중작과 대작이 나머지 부분을 차지한다.

화개계곡 차밭은 가파른 비탈에 있다. 산을 타듯이 차밭에 올라야 하는 곳이 많다. 고랑을 지어 차나무를 길게 심은 곳도 있고, 다른 나무들 사이에 드문드문 자라는 차나무도 있다. 이 비탈에 붙어 찻잎을 딴다. 대부분 할머니들이다. 어린 찻잎을 손톱으로 꺾어 자루에 담는 작업을 한다. 비탈이 심하고 바닥이 돌인 곳이 많아 이동하는 데 버거워 보였다. 한 사람이 아침 7시부터 시작하여 해질 때까지 따는 찻잎의 양은 우전 기준으로 1~2킬로그램이다. 찻잎 1킬로그램으로 얻을 수 있는 차는 200그램이다. 하루 일당으로 4만 원을 받는다. 

찻잎은 덖고 말리는 과정을 거쳐 차로 완성된다. 전통적으로는 무쇠솥에 덖지만 규모화한 곳에서는 기계화되어 있다. 무쇠솥을 섭씨 300도 이상 되게 달군 후 찻잎을 넣고 김이 오르도록 덖는다. 이때 손으로 계속 뒤적여 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덖은 찻잎은 바닥에 놓고 비빈다. 이때 찻잎이 돌돌 말리게 된다. 이 찻잎을 다시 무쇠솥에서 덖어 또 비빈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기도 하지만 2회에서 그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온돌방 바닥에 널어 2시간 말렸다가 얇은 솥에 넣고 밑에 숯불을 피워 3시간 동안 말린다. 이때 훈연향이 더해진다.

화개 차는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땅 집권층의 기호물로 이용되었다. 수탈이 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이렇게 기록했다. “화개에서 차 따던 일을 논하면, 관에서 독려함에 장정과 노약자 구별 없었네. 험준한 산중에서 간신히 따 모아 멀고 먼 서울로 등짐 져 날랐네. 이는 백성의 고혈과 살점이니….”

우리 차 전통이 대중화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이 수탈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 고운 차향에 오히려 못된 욕심이 더해진 결과이다. 화개 차에 지리산의 맑은 정기만 남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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