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선생의 무고한 죽음에 사과한다"
상태바
"조봉암 선생의 무고한 죽음에 사과한다"
  • 박은혜
  • 승인 2012.07.11 13: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6회 새얼아침대화 - 박시환 전 대법관 강연

박시환 전 대법관이 강연하고 있다.

조봉암 진보당 사건의 재심 재판을 했던 박시환 전 대법관(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우리 법원이 선진국들이 시민혁명 등을 거쳐 체득한 소송 절차의 중요함을 간과해 조봉암을 사형에 이르게 했다고 반성하며 법조인으로서 사과했다. 1959년 2월 대법원이 진보당 사건 재판에서 민간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군 특수기관이 간첩 혐의로 양이섭을 불법 연행하고 감금된 상태서 나온 진술을 받아들인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지금이라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진술임에도 당시 재판관들은(이승만 정권의 압력인지는 몰라도) 이를 인정해 사형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제316회 새얼아침대화가 11일 오전 7시 파라다이스호텔 2층에서 열렸다. 이날 아침대화에선 박시환 교수가 조봉암 사건을 재심했던 전 대법관으로서 강연했다.

박 교수는 "조봉암 선생의 사상이나 역할, 의미, 그리고 재심에 대해 시민들이 궁금해 하는 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면서 "다만, 전 대법관으로서 중간자 입장에서 강연하겠는데, 그래야 진보당과 조봉암 선생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거라 본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박 교수의 강연 요지이다.

진보당 사건의 공소사실 핵심은 4가지였다. △국가보안법 위반(간첩, 간첩방조 -북한과 밀회하고 금품수수) △국가보안법 위반(반국가단체 결성, 수괴취임, 협의 선전 선동) △불법무기소지 △간첩(북한의 지령을 받아 금품과 자료를 받고, 명단 등을 넘긴 혐의)

첫 번째는 당시 무죄여서 논란이 없었으며 3번 째 역시 논란이 없었다. 문제는 2,4번째 공소사실이었다.

2번 째 공소사실 재판 결과 1심에서는 무죄, 2심에서는 유죄, 3심에서는 색다른 판결이 나왔다. 진보당 자체가 유죄가 아니라, 당수인 조봉암과 양이섭이 북한과 연계해 지령을 받아 진보당을 결성했으니, 조봉암 피고인 한 사람에 대해서만 유죄라며 진보당의 다른 당원들은 무죄라는 판결이 나왔다. 사람별로 죄를 나누어 판결해 조봉암만 유죄판결을 내렸다.
사형을 내릴 수 있는 4번째 공소사실이 중요했다.(당시 국가보안법으로는 사형시킬 수 없었다. '간첩행위를 했느냐'가 핵심이었다.) 1심은 무기소지와 간첩죄를 인정해 유죄를 선고했다. 사형이 아니라, 1심에서는 5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에서 간첩죄 인정, 3심에서 진보당 전원이 아니라 조봉암에 대해서만 간첩죄를 인정해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재심도 기각돼 이튿날인 1959년 7월 31일 조봉암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언론에서 '매우 정치적인 재판이다' 라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잠잠해졌다.

그 이후로도 쭉 지나왔는데, 노무현 정부 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가 결성됐다. 조봉암 유족들이 진실규명을 신청하였고, 2007년 9월. 진실규명 결정이 나온다.

진보당 사건은 대통령 이승만이 가장 유력한 라이벌인 조봉암에게 위협을 느끼고, 권한도 없는 육군 특수부대에 사건을 맡겨서 재심을 신청했고, 박 교수가 당시 재심 심판을 하게 된다.

원칙적으로 판결이 나면, 과거사를 결말 짓기 위해 판결에 힘을 실어주게 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잘못된 판결이 있을 수 있기에 재심이라는 제도가 있다. 사법부는 재심을 인정했는데, 이유는 육군 특수부대가 양이섭을 죽게 하였기 때문이다. 육군은 군인에 대해 수사권이 있는데, 수사권이 없는 민간인을 수사하면, 처벌한다는 법률이 따로 있다. 당시 이중간첩으로 북한을 왔다갔다 했던 양이섭의 신분이 'HID(육군첩보기관) 소속인지 아닌지'가 문제였다. 박 교수가 육군첩보기관장에게 문의했더니 "그 사람은 우리에게 협조하는 정보관이기는 하지만 우리 소속은 아니다"라는 답변이 왔다. 결국 수사권이 없는 육군특무부대가 양이섭을 수사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재심을 하면, 재심사유가 있는 그 부분만 수사할 수 있다. 당시 1항은 무죄판결이 났기 때문에 2,3,4항에 대해서만 수사했고, 2,3항에는 재심사유가 없다. 4항에만 재심사유가 있다.

따라서 지금 문제되고 있는 2항 '진보당이 북한 단체가 아니냐'라는 문제는 손을 댈 수 없게 됐다. 역사상 매우 민감한데, 재심사유에서는 그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게 가장 문제였다. 이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할 수 없었다.

범죄행위는 당시 법으로 재판하는 것이 원칙이다. 형이 가볍게 바뀌면, 가벼운 것을 적용함이 원칙이지만, 그보다 무거운 죄는 적용하지 않는다. 나중에 사형이 들어간 것은 사형을 적용할 수 없는 죄였다. 

1950년대 당시 법으로는 조봉암을 사형시킬 수 없었지만, 1958년 12월 사형이 추가됐다.

'진보당을 북한 단체로 인정할 것이냐'는 문제에서 조봉암 당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인했다.  △1심판결은 아니다  △2심판결이 맞다. 전원에 유죄와 무기징역 등 중형 선고  △3심판결은 개인별로 나눴다. 당 전체는 헌법에 문제가 되지 않아서 무죄이지만, 조봉암은 북한과 연락을 주고받아 주관적 목적에 대해서는 북한 단체가 맞다.

당시 증거들은 간접적인 정보뿐이었다. 조봉암이 북한의 금품임을 알고 받았는지 여부의 직접 증거는 양이섭의 진술이었다. '진정성을 인정할 것이냐'는 진실여부를 불문하고 고문, 협박, 회유가 가해진 진술은 증거로 못 쓴다. 양이섭의 진술이 진실 여부를 떠나 고문 등이 가해졌냐에서 '그렇다'는 입장이다. 요새는 영장 없이 데려가 조사하면 증거로 안쓴다. 그 뒤에 이어서 절차가 적법하게 바뀌어도 증거로 쓸 수 없다.

결론적으로 조봉암 사건은 확정판결로 무죄를 선고했다. 

박 교수는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법은 무엇을 잘못했고 법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느냐에 대해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법원이 무너지면 국민의 인권과 재산이 무너지는데, 법원에 애정을 갖고 따끔한 비판을 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마무리했다.

 250여명의 인천시민이 참석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