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자장면 발상지 '공화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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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자장면 발상지 '공화춘'
  • 이창희
  • 승인 2012.07.26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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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수풍물] 자장면 - 배고픔의 역사

 챠이나타운 거리는 늘 활기가 넘친다. 붉은 바탕에 한자로 쓰인 간판들은 차이나타운 특징이다. 양꼬치 굽는 냄새가 지나가던 발걸음을 붙잡는다. 그 앞엔 ‘칭다오 맥주’까지 놓여 있으니 군침이 돈다. 꼬치를 구우며 연신 중국말을 내뱉는 장사꾼. 거리를 구경하느라 출출하고 목마른 행인들의 속사정까지 간파한 것이 틀림없다.

내심 ‘중국인의 상술은 대단해’라고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건너편 2층 건물 문간에는 듬성한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긴 노인이 앉아있다. 노인은 통달한 표정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은근슬쩍 노인 옆에 앉아 수다를 시작했다.

어눌한 말투가 연로하기 때문인가 했더니 중국인이란다. 열아홉에 중국 산둥성에서 누나 찾아 인천으로 왔다가 길이 막혀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14년 만에 인천에서 재혼했고 화교들이 인천을 떠날 때 노인 역시 뉴욕으로 떠났었다. “첫 부인은 40살까지 기다리다 재혼을 했다네….” 회상하는 모습은 마치 질곡의 역사를 가진 인천의 모습과도 같았다.

거리에 대해 묻자 깜짝 놀랄 대답들이 이어진다. “요 앞집은 일본헌병대장 집이었고 여기는 독일영사 관사였지.” 앉아서 설명을 듣자니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하다. “저 아래는 담배 팔던 곳인데 요즘엔 음식점이 됐네.” 보이는 거리와 건물 모두 노인의 추억이 담긴 곳이다. “그때는 공화춘, 중화루, 송죽루가 제일 유명한 음식점이었고 진짜배기 일본사람, 중국사람이 여기서 살았지.”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은 청나라를 비롯한 열강이 첫발을 내디딘 곳이었다. 1884년엔 청국 조계지가 설정됐고 이후 러시아, 미국,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이 몰려들었다. 1888년엔 최초의 서양식 공원 ‘자유공원’이 만들어졌다. 이후 1914년 일제강점기에 조계제도가 폐지되기까지 인천은 한반도의 출입구였다. 조계는 폐지됐어도 사람들은 남았다.

1920년대 ‘청관거리’라 불리던 이곳 차이나타운에 공화춘, 중화루가 들어섰다. 이후 1967년 ‘외국인 토지소유권 제한조치’가 실행돼 장사하기 힘들어진 중국인들이 해외로 떠나가기 전까지 차이나타운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북적이는 도시 중 하나였다.

챠이나타운은 아픈 역사가 남긴 근현대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열강들의 출입문으로 홍역을 앓은 인천에는 아직도 여러 흔적이 남아 있다. 등록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된 인천 중구청 건물은 1883년 2층 목조건물로 지어진 ‘인천부청사’였다. 또한 1890년대에 지어진 답동성당, 일본18은행 인천지점, 1892년 지어진 일본58은행 인천지점을 비롯해 수많은 건축물들이 120년 전 인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제물포를 중심으로 뻗어 있던 건물들은 6.25 전쟁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1905년 영국인 제임스 존스톤이 별장으로 지었던 건물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 시 포화로 소실됐고 1897년 지어진 영국영사관 역시 전쟁 통에 사라졌다. 지금 인천의 근현대문화유산은 교육과 관광을 위해 개발됐다.
 
일본18은행 건물을 개조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이 마련되어 주말이면 700~800명이 찾는다. 살아 있는 역사의 교육장인 것이다. 이곳에서는 당시의 건물들과 인천 개항장 모습을 비롯해 인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중국사람, 일본사람 그리고 한국사람 근대화를 겪으며 여러 나라의 문화가 섞인 인천 차이나타운이다.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옛날 얘기를 듣기 위해 경로당을 찾았다.

북성동 노인회장 문순희(77) 할머니는 “중국사람들은 중국학교 다니고, 일본사람들은 일본학교 다니고 그랬지 뭐… 별로 서로 왕래하고 그런 거 없었어”라며 시큰둥한 반응이다. “6.25 때 피난 갔다 와서도 중국사람들은 돈도 많고 장사도 잘했어.” “차이나타운이라고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60년대에 다 (해외로) 나가버리고 그냥 우린 다른 마을처럼 살았지. 회사 다니고, 장사도 하고….” 옆에 있던 다른 노인은 “인천에서 상권은 중국인이 장악했었고 일제강점기에 대해서는 더 말해 뭐하나…”라며 탐탁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시큰둥하던 문할머니가 칭찬할 것이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차이나타운에 개업한 한 중국인이 매달 노인들을 초청해 음식을 대접한다는 것. “옛날엔 장사만 할라고 하더니 요즘엔 이렇게 좋은 사람들도 있어, 세상이 바뀌긴 했나 봐.”

해방 이후 중국인들이 빠져나가면서 쇠락했던 차이나타운은 최근 다시 부흥하고 있다. 근현대문화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고 차이나타운이 부활하면서 대한민국 최초의 짜장면 발상지로 알려졌다.

2002년 35만 명에 불과하던 관광객이 2006년엔 67만5천 명으로 늘어나더니 최근에 주말이면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게다가 중국과 이어지는 인천항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관문 인천국제공항까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함께한 인천은 세계로 뻗어가는 발판이다.

1905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붉은색 벽돌 2층 건물로 국내의 자장면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전체적인 건물 형태가 目자형을 이룬다. 즉, 앞뒤로 一자형 건물이 있고 그 사이를 건물 4개가 연결하는 형태이며 각 건물 사이에는 마당을 두었다. 당시 청나라 조계지의 건축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1920년부터 무역이 성행하자 중국 음식점이 생겨났으며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자장면이 탄생하였다. 공화춘은 자장면이란 이름으로 처음 음식을 팔기 시작한 곳으로 이후 번성하다가 1984년 문을 닫았다. 건축적 가치와 생활사적 가치를 지닌 근대 문화유산으로 손꼽힌다.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38-1, 38-2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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