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 소라이의 논어 해석과 작금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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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 소라이의 논어 해석과 작금의 일본
  • 이우재
  • 승인 2012.09.2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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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재의 공자왈 맹자왈]


성경이 서양을 대표하는 책이라면 동양을 대표하는 책은 누가 뭐라고 해도 논어이다. 동양, 특히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논어를 읽지 않았다고 하면 어떤 경우에도 식자층에 들 수 없었다. 글줄깨나 읽었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논어에 대해 한 마디쯤은 할 줄 알았고, 논어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석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그 내용이 전해지는 논어에 대한 주석서만 해도 그야말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다.

그러한 주석서 중 전 근대 사회 일본 유학계를 대표하는 책 중의 하나가 오규 소라이(狄生徂徠, 1666-1728)의 『논어징(論語徵)』이다. 전후 일본의 대 정치학자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는 일찍이 일본 근대의 시작을 오규 소라이(이하 소라이)에서 찾았다. 소라이가 논어를 성리학적 관점에서 탈피하여 선왕(先王)의 예악(禮樂)이란 관점에서 해석한 것을 도덕과 정치의 분리로 인식하고, 그것이 바로 근대적인 정치사상의 시작이라고 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소라이를 알면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시작되어 태평양전쟁의 패배로까지 이어진 일본의 근대화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작금의 일본이 아직도 전쟁 전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볼 때 소라이를 알면 지금의 일본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소라이의 논어 해석을 한번 살펴보자.

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논어』「이인」)

주희는 이 장을 풀이하기를 사람의 허물은 그 무리에 따라 달라, 군자는 남에게 후(厚)하고 사랑하는 잘못이 있고, 소인은 남에게 각박하고 모질게 하는 잘못이 있으므로, 그 잘못을 살펴보면 그가 인(仁)한지 불인(不仁)한지 알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즉 “사람의 허물은 무리에 따라 달라, 그 허물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인을 알 수 있다.”로 해석하는 것이다. 주희에 의하면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에서도 그 사람됨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소라이는 이 문장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우선 소라이는 당(黨)을 무리라는 뜻으로 풀이하지 않고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하며, 관과(觀過)의 過는 아랫사람의 허물, 지인(知仁)의 仁은 임금의 仁으로 풀이한다. 그는 이 문장을 “사람은 허물이 각각 그 마을에서는 있기 마련이니, 아랫사람의 허물을 살펴보면 그 임금의 인(仁)을 알 수 있다.”로 읽는다. 즉 사람은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 모두가 굳이 의식할 필요가 없는 편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행동에 조심을 하지 않아 허물을 짓게 되지만, 임금이 있는 조정과 종묘에서는 임금을 의식하기 때문에 몸가짐을 조심하여 허물을 적게 짓는다. 따라서 조정과 종묘에서 아랫사람들이 짓는 허물을 살펴보면 그 임금의 덕의 교화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소라이에 의하면 사람은 남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편한 곳에서는 허물을 짓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된다. 오직 남이 지켜볼 때만 허물을 짓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2004년 중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중국 TV에서 전후 도쿄에서 진행된 전범재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본 많은 전범들 중 한 일본인은 중국인 100명을 참수한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는 사람 100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평범한 일본의 농사꾼이었다. 그는 남경대학살 과정에서 동료들과 누가 더 많이 중국인을 벨 수 있는가를 내기하여 100명을 달성했다고 자랑스럽게 일본의 한 신문의 인터뷰에 응했는데, 그 이후 본인은 까맣게 그 사실을 잊고 있다가 바로 그 신문 기사가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되어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 일본인이 원래부터 성품이 사악하여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2차대전 중 전쟁범죄를 저질러 처형당한 수많은 일본인들이 자기 국내에서는 그저 그런 착한 국민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조선이나, 중국, 동남아에 가서는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변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바로 소라이식의 윤리 의식, 즉 남이 지켜보는 데서만 잘하면 되고, 남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바로 그런 의식이 바로 그런 사태를 야기한 것은 아닐까?

子夏曰, “小人之過也必文.”(『논어』「자장」)

이 문장은 일반적으로 “소인은 허물을 지으면 반드시 둘러댄다.”로 해석되며, 소라이의 해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문제는 여기서의 소인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리가 현재 군자와 소인이라고 할 때의 그 소인, 즉 인격이 좀 부족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소라이는 소인을 세민(細民), 즉 가난한 백성으로 본다. 소라이에 의하면 세민들이 허물을 짓고 둘러대는 것은 남들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기 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즉 누구도 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위가 높은 사람, 즉 군자는 누구나 주시하기 때문에 허물을 지으면 일식이나 월식과 같이 누구나 다 알게 된다. 그래서 고친다. 즉 남들이 보고 있기 때문에 허물을 고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라이의 견해를 따를 경우 남들이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면 고치지 않고 둘러대기만 할 수도 있다는 것이 된다. 관동군에서 세균전을 수행한 731부대가 생체실험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아직까지도 그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의식의 소산은 아닐까?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子曰, “伯夷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논어』「공야장」)

이 문장도 일반적으로는 “백이숙제는 지난날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을 받는 일이 드물었다.”로 해석한다. 주희에 의하면 백이숙제는 성인들 중에 성품이 맑은 사람이라(聖之淸者) 남의 잘못을 전혀 용납하지 않을 것 같으나, 그 사람이 일단 잘못을 고치면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아, 이 때문에 남들로부터 원망을 받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즉 백이숙제는 성품이 대쪽 같은 사람이지만 남들이 잘못을 고치면 다 받아 주었다는 말로, 백이숙제의 도량이 컸다는 말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잘못을 고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도 된다.

그런데 소라이의 해석은 다르다. 그는 구악(舊惡)을 이미 한참 지나가 버려 더 이상 어쩔 수 없게 된 잘못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원(怨)은 백이숙제가 원망하는 것이다. 소라이에 의하면 이 글은 “백이숙제는 이미 한참 지나가 버려 어쩔 수가 없게 된 남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원망이 적었다.”로 해석된다. 즉 이미 한참 지나가 버려 어쩔 수가 없게 된 잘못에 대해서는 더 이상 따지지 말라는 뜻이 되는 셈이다.

지금 일본이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의식의 소산이 아닐까? 이미 한참 지났는데 왜 따지냐 하는 식의. 그러나 잊힐 수 있는 지난날의 잘못이 있고 수백 대가 지나가도 절대 잊힐 수 없는 잘못이 있다. 일본이 지난날 범한 죄악은 수백 대가 지나도 절대 잊힐 수 없는 잘못이다. 그걸 딛고 넘어가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진실한 사과로 피해자들의 용서를 비는 것이다. 그걸 아무런 반성도 없이 때가 지나면 되겠지 하는 것은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이다.

근대 일본의 정치사상이 소라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마루야마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일말의 타당성이 있다면, 소라이가 공자에게서 예악만을 취하고, 인간 내면의 도덕을 제거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마루야마의 말대로라면 작금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자행하고 있는 여러 작태들은 바로 소라이의 논어 해석의 그런 측면, 즉 도덕성이 제거된 데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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