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문학의 고장 담양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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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문학의 고장 담양을 다녀와서
  • 최일화
  • 승인 2013.07.12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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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최일화 / 시인
지난 6월 ‘담양 글을 낳는 집’에 입주해 한 달을 머물렀다. 입주 기간은 6월 한 달이지만 24일부터 인천실내무도아시안게임 자원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23일 올라왔기 때문에 실제로 머물렀던 기간은 20여일에 불과했다. 글을 낳는 집은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소요경비를 지원받아 전국의 문인들이 머물며 활동을 할 수 있는 집필공간이다. 주인은 김규성 시인으로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중견시인이다. 이곳에선 집필실 겸 침실을 제공하고 방대한 양의 서적을 갖춘 도서실도 갖추고 있어 필요한 책은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식사도 무료로 제공받는데 김규성 시인의 사모님은 약초 전문가로 음식 솜씨가 일품인 것이 금상첨화다. 그 음식들이 모두 천연효소를 이용하여 만든 건강식이라는 것이다. 집 앞에는 수십 개는 될 대형 항아리들이 모여 있는 장독대가 있는데 이것이 모두 천연 야생초와 약초를 이용해 담근 효소항아리들인 것이다. 이렇게 나는 건강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때 묻지 않은 산골마을에서 지내면서 집필활동을 했지만 시는 소설과는 달리 줄곧 책상에만 앉아 있다고 시상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래 비가 부슬 부슬 오는 날 나는 담양 일대 문화유적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말로만 듣던 소쇄원, 죽록원, 가사문학관, 면앙정, 송강정 등지를 구경하면서 담양이 우리 문학사의 중요한 한 획을 긋는 가사문학의 산실이라는 점을 피부로 느꼈다. 오늘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지은 정철이 세우고 머물렀던 송강정과 면앙정가를 지은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을 소개하여 가사문학의 일면을 엿보고자 한다. 가사는 고려 말에 발생하여 조선 초기 사대부계층에 의해 확고한 문학양식으로 자리 잡아 조선시대를 관통하여 지속적으로 전해 내려온 문학의 한 갈래이다.

형식상 4음보(3·4조)의 연속체의 율문이며 내용상 수필적 산문인 가사는 산문과 율문의 중간적 형태로 조선조의 대표적 문학형식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가사의 주 담당 층은 송순, 정철로 대표되는 양반 사대부 계층이다. 이들이 모두 담양에 은거하여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면앙정가를 지었다는 점에서 담양을 가사문학의 본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 담양군에서는 2003년 가사문학관을 지어 가사문학의 계승 발전에 노력하고 있다.

오늘은 담양 지역에 있는 두 정자 송강정과 면앙정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송강정은 담양읍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다. 송강은 어린 시절 담양군 창평 지역에 내려와 살면서 담양과 인연을 맺었는데 선조 17년(1584년)에 대사헌을 지내다 당쟁으로 물러나와 다시 담양으로 내려와 초막을 짓고 살았다. 그 초막을 죽록정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부근의 들을 죽록이라 불러 정자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 지금도 송강정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송강정~1.JPG
송강정 전경
죽록정을 중수하면서 죽록정 현판을 측면으로 옮기고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을 걸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송강정에서 정철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고 한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송강이 가사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지었다는 것을 배웠고 고전문학 시간에 관동별곡 사미인곡을 공부하느라고 진땀을 흘리던 일이 새삼스럽다. 관동별곡이라는 명칭을 보고 정철이 강원도 어느 지역에 살면서 이 가사들을 지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곤 했는데 담양지역에 은거하여 이 가사들을 지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감개가 무량했다.

송강정은 넓은 들 한 끝자락 야트막한 야산에 세워져 있는데 돌계단을 한참 올라간 후에야 도달할 수 있었다. 정자 뒷면에는 사미인곡 전문을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송강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봉산면 제월리 산언덕에 면앙정이 있다. 가파른 돌계단을 100여m정도 올라가서야 면앙정에 다다를 수 있었다. 송순도 고등학교 때 면앙정가를 지은 인물로 배웠던 낯익은 이름이라 비가 뿌리는 날씨를 무릅쓰고 돌계단을 올라가 면앙정 툇마루에 앉아 한동안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면앙정 앞에는 '면앙정가비(?仰亭歌碑)'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정자 정면 30m 지점에는 200여년 된 참나무 고목 한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옛 선비들의 자취를 지켜보는 듯했다.

너른바희 우히
松竹을 헤혀고
亭子를 언쳐시니
구름탄 청학이
천리를 가리라
두나래 버렷난듯
玉泉山 龍泉山
나린 믈리
亭子압 너븐들히
올올이 펴진드시
넙거든 기디마나
푸르거든 희디마나
-면앙정가비 내용

넓은 바위 위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헤치고
정자를 앉혔으니
구름을 탄 청학이
천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벌린 듯하구나
옥천산 용천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정자 앞 넓은 들에
올올이 퍼진 듯하구나
넓거든 길지나 말거나
푸르거든 희지나 말거나
-송순의 면앙정가 일부를 비석에 새겨놓았다. 김동욱 교수 역>

면앙정.jpg
 면앙정 전경
정자 주인 송순(1493~1583)은 1493년(성종 24) 담양에서 태어나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이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고 77세에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면앙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그의 정계생활은 순탄하였으며, 은퇴생활 또한 면앙정을 중심으로 자연과 더불어 후학을 양성하며 유유자적하게 보냈다. 그는 면앙정에서 퇴계 이황을 비롯한 당대의 명사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제봉 고경명, 고봉 기대승, 백호 임제, 송강 정철 등이 모두 그에게서 사사하였다.

가사문학의 기념비적 유적은 비단 이 두 정자에 그치지 않는다. 식영정, 환벽당 등 많은 정자가 옛 선비들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후손들에게 묵묵히 역사의 진실들을 전해주고 있다. 담양에 들르면 이런 정자문화뿐 아니라 16만 평방km의 울창한 대나무 숲에 산책길을 내어 관광객들과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죽록원과 양산보(1503~1557)가 벼슬을 포기하고 향리에 내려가 많은 문인학자들과 교유하던 소쇄원이라는 한국식 옛 정원을 둘러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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