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자체로 예술을 행하는 성악가 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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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자체로 예술을 행하는 성악가 이고 싶다"
  • 대학생기자단 인물팀 - 이재문, 정재한, 서민혜, 박경아, 강신아
  • 승인 2013.09.08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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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 낳은 세계적 러시아 성악가 이연성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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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에 위치한 팟알 카페에서 만난 이연성 성악가
 
 
 “예술가는 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는 사람들이다. 또한 시공간이 무색할 정도로 다양한 이들의 삶을 생생하게 표현해낸다. 그렇기에 단순히 음악계에 종사하는 성악가가 아닌, 삶 자체에서 예술을 행하는 예술가로 남고 싶다.”
 
성악가 이연성(44 베이스)은 러시아 벨라보체 국제성악콩쿠르에서 우승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예술가다. 그는 현재 러시아 ‘세계 민족문화예술제전’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이며, GEROI 3BASS의 멤버로 활동 중이다.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에서 살던 학창 시절, 마이클 잭슨을 보며 음악에 대한 소양과 애착을 키우기 시작한 이연성. 그는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대건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로 진학하면서 성악가로의 꿈을 키워갔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생명보다 공연을 선택할 정도로 그의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남달랐다.
 
이달 31일, 인천시 연수구 송도동 센트럴공원에서 있을 2013 찾아가는 문화행사 '늦여름을 두드리GO! 노래하GO!'를 앞두고,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팟알 카페(pot-R CAFE)에서 그를 만나 예술가로서의 삶과 인천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 성악에 입문한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 학교 선배가 찾아와 ‘중창단 베이스를 모집한다’고 말했다. 흥미를 느껴 찾아갔는데, 지원자가 나밖에 없었다. 면접장에서 노래를 부른 뒤 ‘노래는 못하지만 목소리가 좋다. 노래는 연습하면 되지만 목소리는 타고나는 것이다’라는 평가를 듣고 합격했다. 그렇게 중창단에서 중창 연습을 하며 중창의 매력에 점점 빠지게 됐다. 체해서 학교에 가지 못해도 연습만큼은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이 돼서 숭의 교회에서 주관하는 ‘숭의중창제’에 솔로로 출전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시인이 나의 꿈이었지만, 이렇게 성악에 빠져들었다.
 
-러시아를 선택하게된 계기는?
 
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며, 세계적으로 냉전 분위기가 완화됐다. 소련을 필두로, 공산 국가들이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때까진 러시아 음악이 탄압의 대상이라 쉽게 만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 레코드사에서 우연히 러시아 음악을 접했다. 러시아 포크 음악들이 대체로 베이스로 이뤄져있기 때문에 베이스였던 내겐 특히 매력적이었다. 러시아 음악을 들으며 러시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수교를 맺기 이전이라 길이 없었다. 그러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러시아와 수교를 맺었다. 제대 후 내가 하던 대학 합창단이 거제도로 순회 연주를 갔다. 공연 후 뒷풀이 도중에 인연이 닿아 러시아에 있는 선생님을 소개 받아 러시아로 갈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1995년 7월 28일에 모스크바로 향했다. 소련은 이미 해체됐지만, 러시아는 아직도 소련 시절의 모습과 문화를 간직했다. 생활 문화적인 차이로 초기에 고생을 많이 했지만, 언어와 정서적 측면에서 한국과 비슷하다고 느껴져 러시아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많이 됐다.
 
-한국과 러시아의 교육 시스템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국의 교육은 대입과 취직을 위한 교육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학생들이 꿈이 없다. 러시아는 선생님들에게 학생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르친다. 선생님들이 학생의 재능을 찾아주고 길을 찾도록 도와주도록 배운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학생에게 가장 맞는 길을 찾아준다. 학생들은 자신의 재능에 맞춰서 노력하고 꿈을 꾼다.
음악 측면에서 예를 들면, 한국은 소리를 내는 것을 주로 가르친다. 반면 러시아는 기본인 호흡을 가르친다. 목은 사람마다 다른데, 한국은 표준에 맞춰 획일화된 교육을 한다할 수 있다. 러시아는 호흡 위주 교육으로 개개인의 특징을 살리는 교육이 가능하다. 또 다른 예로 피아노를 들 수 있다. 한국은 피아노로 칠 수 있는 ‘곡’을 위주로 교육한다면, 러시아는 피아노를 치는 ‘기본’을 알려준다. 기본이 되면 다른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해 교육하는 점이 한국과 반대이다.
 
-인천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기도 하나?
 
인간과 자연과 예술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이 점에서 볼 때, 인천은 입지가 좋다. 바다와 그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 등 자연적인 혜택이 굉장하다. 명창들이 주로 부산이나 목포에 있듯, 인천의 환경도 뛰어나다. 또한 인천은 서양음악을 접하기 쉽다. 기독교 문화가 전국에서 가장 빨리 들어왔고, 전국에서 제일 오래된 합창단이 있으며, 인천 출신의 문화예술인 또한 많다.
하지만 인천 출신의 인재들이 전부 서울로 떠난다.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활동할 수 있는 무대도 서울에 더 많아 자연스레 사람들이 떠난다. 또한 인천에는 음대가 없어 교육환경 조차 서울에 미치지 못한다. 인천은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 많지만, 그 사람들이 활동할 기회가 없는 곳이다.
 
-인천을 음악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노력에는 무엇이 있나?
 
인천은 좋은 음악가를 많이 배출하지만, 인천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는 매우 적은 편이다. 이에 아마추어가 주를 이루며 이들이 예술 문화를 이끌어 가곤 한다. 이는 여러 세대가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발전이 어렵다는 단점도 상존한다. 인천 출신의 뛰어난 음악가들이 인천에서 음악회를 주도해 나가고 많은 공연을 통해 일반 대중의 시각과 청각을 만족시켜야한다. 하지만 대중 주도의 예술 문화로 인해 출연자를 섭외할 때에 비인천출신 사람들도 많이 섭외되고 있다. 지금은 물론 공연장이 많이 생기고 있지만, 사람과 시설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투자로 예술 문화적 측면에서 발전이 필요하다.
 
-성악가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
 
2007년 1월 30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독창회를 하게 됐다. 현지 교회 목사님 주관 음악회에 초청받은 것이다. 1월 29일 비행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할 때부터 속이 좋지 않았다. 제자 중 간호사가 있어서 손을 따줬는데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고, 러시아에 도착해 배가 더 아파져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게 됐다. 병원에서 급성 맹장 판정을 받아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의사에게 지금 수술을 받으면 내일 독창회가 가능한지 물어봤고,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의사는 내게 지금 수술을 하지 않으면 평생 노래를 못 할 수 있고,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진통제만 처방받고 병원을 나왔다. 무대에 올라가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대에 올라가는 것과, 무대에 가지도 않고 음악회는 취소됐다고 통보하는 것의 차이는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고통 속에 잠도 못 이루며 앓았음에도, 내게 주어진 한 시간의 공연을 마무리 지었다. 기독교인으로 선교에 의미가 있는 음악회에서 무대에서 노래하다가 죽는다면 여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와 수술을 받은 뒤, 제자들에게 ‘이제 선생님 앞에서는 아파서 노래 못하겠다는 소리를 못하겠다.’는 말을 들었다.(웃음) 하지만 무엇보다 어린 나이의 아들에게 인정받는 성악가가 됐다는 점에서 너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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