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용, 그리고 기다려주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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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관용, 그리고 기다려주는 시간
  • 이정숙
  • 승인 2013.11.07 21:5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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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 인천교육미래찾기(31)
  • 인천시민들은 인천교육의 변화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변화로 가는 길을 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변화의 지향성에 대한 공론이 부족한 탓입니다. 변화하려면 공유할만한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미래도시를 꿈꾸는 인천에서 ‘인천in’은 교육을 화두로 끌어안고 변화의 방향에 대해 먼저 고민하려 합니다. 그 시작으로「인천교육연구소」와 함께 인천교육에 대한 고민이 담긴 칼럼을 연재합니다. 매주 수요일에 교육현장에 발 딛고 선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더욱 낮은 자세로 귀를 기울이고 가감 없이 시민들께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인천교육의 공론장이 생긴다면 미래의 인천교육은 시민들의 열망을 담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in’과 「인천교육연구소」가 함께하는 '인천교육의 미래찾기'에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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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관용, 그리고 기다려주는 시간
이 정 숙 (인천교육연구소)
학교에서는 일주일마다 직원 협의나 부장단 회의 등 각종 회의가 수도 없이 열린다. 하지만 참석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것은 회의가 아니고 협의도 아니라는 것이다. 협의나 회의란 자기생각이나 의견을 말할 최소한의 ‘대화분위기’가 이루어지고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견들을 내 놓으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수많은 ‘회의’에서는 관리자들의 일방적인 지시나, 업무담당자의 전달사항이 대부분이다. 구성원의 의견을 묻거나 구성원들이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곳에서 어쩌다 의견을 내는 것은 온갖 불이익과 겸연쩍음을 감수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 곳에서 어찌 회의가 가능하겠는가.
혹자는 말한다. 왜 말하지 못하냐고. 누가 말하지 못하게 했느냐고. 언제든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바로 말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라고. 하지만 대화가,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서로에 대한 ‘듣기 허용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공적인 자리에서 타자와 말한다는 것은 아주 섬세한 작업이라 심리적으로 불편하거나 안정되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털어 놓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샘은 며칠 전, 어리다는 이유로 날이면 날마다 회의에 참석한다는 후배 샘의 하소연을 들었다.
“저희가 언제 점수를 달라고 했나요?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 무슨 시범학교를 만들어 놓고선 각종 연수며, 자료개발이며 모든 것들을 우리한테 떠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공개수업을 우리한테만 떠맡기는 거예요. 그러면서 더 여러 번 해야 하는데 마치 봐준다는 식으로 얘기해요. 다 좋아요. 하지만 저희로선 너무 막연해서 수업 과정안이라도 부장샘이 시범으로 써서 좀 안내를 해주시면 따라해 보겠다고 했는데 그냥 묵살하면서 안 된대요. 듣지도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안 된대요. 회의시간은 그냥 통보예요. 저희 사정은 아무도 안 들어요. 저희 말은 그냥 다 무시해요.”
김샘은 언제나 싫은 내색 없이 말없이 일하는 모습을 보아왔던 터라 후배샘의 하소연이 의외였다. 아무 도움도 못된 채 그저 들어주고만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다른 생각이나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 그러한 분위기에서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 용기내어 ‘말할자’가 얼마나 될까. 아니, 왜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고 존재의 위협을 느끼며 온갖 수모를 겪어야 하는 일인가.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도 전가 된다. 얼마 전 김샘은 다른 학년이 된 제자의 하소연을 들었다.
“우리 샘은 자기가 수업 시간에 늦게 들어 와 놓고선 우리한테 떠든다고 신경질이예요. 샘은 늦게 들어오면 꼭 사과했잖아요. 그리고 왜 늦었는지부터 얘기했고 우릴 납득시킨 담에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하겠다고 했는데... 뭐, 자기가 잘못하구선 우리한테 난리예요. 완전 자기 맘대로 예요...”
김샘은 제자의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아이의 샘 편을 들어 줄 수도 없어 난감했다. 고작 선생님이 바쁘셨나보다. 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교사가 아이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고 권력으로 누를 때, 아이들도 무시한다.
얼마전 조회시간에 교장샘이 에어컨을 틀어 줄 수 없다는 설명을 했다. 김샘은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한 아이 말을 듣게 되었다. 교장샘의 그 긴 설명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학년 아이는 “우리 학교는 교장샘 마음만 있나봐. 우리 맘은 없어.”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김샘은 갑자기 ‘환경 게시판에 이걸 붙여라. 운동회는 이렇게 해라. 행사는 이렇게 참여해라’ 하며 지시가 일방적으로 내려오고 계획 없이 수업이 행사로 대치되는 등 뜬금없이 일이진행되는 것에 당황했던 터라, 그 아이의 말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하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려졌다. 아무리 좋은 교육적 의도라도 그것이 구성원들과 소통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권력자의 ‘횡포’에 가깝게 느껴졌다.
김샘은 영화를 보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천안함 프로젝트> 라는 영화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영화가 이내 어떤 압력에 의해 상영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해군장교들과 천안함유가족협회가 상영금지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감독은 "유족 측에 영화를 같이 보자고 초청장을 보냈지만 답이 없다. 영화를 안 보고 고소를 했다고 하기에 보고 고소할 만한지 보라고 했는데 답이 없다. 이상하지 않나. 정말 이상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김샘은 도대체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여 애써 찾아보았다.
영화는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얘기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는 이 사회의 소통을 말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질문을 가지는 것이 그 시작'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고, 자신들의 의견을 내고 토론할 수 있는 사회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김샘은 소통의 부재에 대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우리 사회의 성숙을 기대하는 것은 ‘아직’인가. 아니면 정말 너무나 경직되고 부패된 사회이기 때문인가. <천안함>이란 민감할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 사회, 특히 영화인들의 성숙함에 뭔지 모를 자부심을 가졌던 마음에 스산한 한기가 느껴졌다.
소통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의견을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생각을 말하면서 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면 싸움이 나기 쉽다. 그래서 나와 견해가 다른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실마리는 ‘관용’에서 비롯된다. 그 관용은 자기와 다른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허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사회에서 ‘관용’ 이 쉽사리 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이데올로기를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해온 사람들의 음험한 전략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관용의 부재는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인들은 이 ‘관용’이란 단어를 ‘똘레랑스(tolerance)’로 고유명사화하여 마치 자기네의 성숙함을 드러내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 ‘관용’의 예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일화는 아마도 드골과 사르트르의 예일 것이다. 이차 대전 후 식민지 쟁탈전에서 물러나기 전 프랑스는 자원이 풍부한 알제리를 놓치기 싫었는데, 프랑스 대표적 지성 사르트르는 식민지의 반인간성과 반역사성을 외치며 알제리 독립자금 전달책으로까지 나섰다고 한다. 그의 반역행위에 여론이 끓고 법적으로도 그를 제재해야 하다는 소리가 드높을 때에 대통령 드골은 “그냥 놔 두게. 그도 프랑스야”라고 했다는 것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무조건 우리에게 대입할 수는 없지만 타자의 생각을 존중할 수 있는 분위기, 그리고 또 그 것을 허용하는 인식이 성숙한 시민을 만들어 간다는 측면에서 의미롭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특히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경직된 사회에서는 이들의 이야기가 부럽기만 하다.
모든 것이 등가의 가치로 동등하게 논의 될 수 없다. 동등한 가치로 논의되는 것은 이상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수만큼 많은 생각들이 존재하고 그 만큼의 다양한 상황과 의미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느 것이 우위를 점유해야 한다고 확정짓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모두 동등하게 가치의 순서를 정해 놓지 않고 나열만 해 놓는다면 사회는 늘 혼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어느 것을 우선 할 것인지. 그것을 선택했을 때의 문제는 없는지. 누가 불이익을 얻게 되며 그 불이익은 약자에게만 주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정당한 것인지. 그런 것들을 가늠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배웠고 생각을 키워냈고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다소 힘겨운 시스템에 동의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민주적인 행동과 사고를 계속 보류하거나 심지어 막아버리고 누군가의 생각만 일방적으로 집행된다면 그 반대편의 누군가는 계속 상처를 입게 된다. 그 상처는 점점 폭력으로 커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루한 것이라도 그것은 일단 논의거리가 되어야 하고, 동등한 가치로 소통되어야 한다. 김샘은 사회에 학교에 만연해 있는 소통의 부재. 물리적인 힘에 의해 가해지는 폭력보다 더 무서운, 보이지 않는, 그래서 폭력을 당하는 사람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폭력에 너도 나도 돌 하나씩을 보태 벽을 만드는데 나도 모르게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이 서늘해 져왔다.
김샘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아이들과 생각해보기로 했다. 마침 도덕 시간에 다문화와 행복한 사회의 단원에서 ‘관용’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김샘은 관용을 애써 설명하였지만 자기중심적으로 십년 남짓의 삶인 아이들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도덕책에 관용을 가진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상대방에게 해줄 말을 생각해 보는 활동이 나왔다. ‘고기를 좋아하는 내가 채식주의자인 이모에게 어떻게 말할까요?’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대답은 ‘ 고기도 좀 먹어 보세요’ 정도의 반응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관용을 뜻을 그저 ‘친절한’, ‘기분 나쁘지 않은 행동‘ 정도로 여기는 듯하였다. 나와 다르지만 그 사람 입장을 존중해서 말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고기를 좋아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자신들이 이모가 왜 야채만을 먹는지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또는 야채의 좋은 점에 대하여 생각해보도록 이야기를 끌어내어 생각해보는 아이들도 드물었다. 자신과 다른 입장을 받아들인다는 게 참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라서 힘든 게 아닌지도 몰랐다. 이 사회가 나와 다른 생각과 관점을 존중하고 소통하려는 것 자체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도 그런 경험을 가지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단시간 내에 요구받다보니 생각할 시간들이 없었다. 이 사회도 너무나 바삐 움직이다 보니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해 치워야 한다. 판단하거나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다보니 내 것을 생각하기도 바쁘다. 언제 남의 생각을 들어보고 물어보고 인정하겠는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어도 그뿐, 그 모순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거나 비판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보니 사람의 생각보다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일’이 우선이 되고 그것이 보편적 성향이 되고 그래서 다수의 것에 속하지 않은 것들을 단죄하고 소수의 나와 다른 남은 것들에게 나도 모르게 폭력으로 다가선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은 일이지만 모두 묵인한 그 폭력이 그 누군가에게 은밀히 가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빨리 답을 요구 받는 아이들에게도 그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을 발효시킬 시간. 타자를 받아들일 시간.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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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3-11-09 15:57:18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첫부분에 사진이 글씨를 잡아먹은 것 같은 데......내 컴퓨터에서만 그런가?? 중요한 내용은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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