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의미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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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의미 찾기
  • 김국태
  • 승인 2013.11.28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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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 인천교육미래찾기(34)

  • 인천시민들은 인천교육의 변화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변화로 가는 길을 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변화의 지향성에 대한 공론이 부족한 탓입니다. 변화하려면 공유할만한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미래도시를 꿈꾸는 인천에서 인천in’은 교육을 화두로 끌어안고 변화의 방향에 대해 먼저 고민하려 합니다. 그 시작으로「인천교육연구소」와 함께 인천교육에 대한 고민이 담긴 칼럼을 연재합니다. 매주 수요일에 교육현장에 발 딛고 선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더욱 낮은 자세로 귀를 기울이고 가감 없이 시민들께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인천교육의 공론장이 생긴다면 미래의 인천교육은 시민들의 열망을 담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in’과 「인천교육연구소」가 함께하는 '인천교육의 미래찾기'에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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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의미 찾기

김국태(인천교육연구소, 인천부평초)


교육은 전통적으로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두 개의 기본적인 요소로 이루어진다. 교사들의 가르침과 학생들의 배움은 역동적인 상호작용 과정에 존재한다. 한쪽 손바닥만 가지고서는 소리가 나지 않듯이 가르침과 배움은 호흡을 맞춰서 맞장구는 치는 과정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가르침의 의미는 배움의 의미와 그 본질을 공유하게 된다.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아이들의 배움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들의 배움을 도와주지 못한다면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가르침의 의미 찾기로 고민을 이어오던 김샘은 오늘 배움의 의미 찾기를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교환되는 가치에 집착하는 배움


먼저, 지금 우리 아이들의 학습 경험을 살펴보자. 오랫동안 입시위주의 기계적인 학습에 익숙했던 아이들에게 습관화된 공부 방법은 아마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내용은 일단 무조건 외우면 된다는 것이다. 시험 볼 때까지만 어떻게든 지식을 어딘가에 담아 두고 기억한다. 결국, 지금 배움의 인식활동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배움의 수동성은 배움의 도구성과 관계가 깊다. 지금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곧 교환되는 가치를 전제로 한다. 즉, 이제 배움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적 의미가 강하게 되었다. 그래서 배우면 무엇에 쓸 수 있는가? 라는 용도에 관심이 있다. 학교의 배움도 교환되는 가치에 집착하게 된다. 따라서 배움의 열정도 그 배움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 배움을 통해 얻게 되는 용도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내신점수 혹은 대학입시를 위한 용도를 밝히면서 학습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 역시 미래의 준비라는 용도로 학생들은 학습에 수동적 태도로 쩔쩔매고 있을 뿐이다.


배움 그 자체가 목적


그렇다면 우리 학생들의 배움은 어떠해야 하는가? 배움의 새로운 경지에 대한 안내자로 고전학자 최미숙은 소설 <임꺽정>을 추천한 적이 있다. 그녀는 소설 <임꺽정>을 ‘요즘 학생들의 학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임꺽정은 ‘노는 사람’이다. 그의 의형제들도 다들 비슷하다. 그럼 뭘 하고 노느냐? 바로 배우면서 논다. 임꺽정은 서울 갖바치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사면서 많은 걸 배운다. 검술과 표창, 활과 축지법, 돌팔매와 지략 등등을 배운다. 배워서 뭐하지?에 대한 고민도 없다. 아무 이유 없다. 그냥 배운다. 아니 배우면서 논다. 배움에 대한 이 무모한 열정, 이들로 하여금 어떤 권위에도 무릎 꿇지 않는 자존감과 배짱을 부여해 준 원천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배움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지금의 배움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적 의미가 강하고, 배움의 용도에 집착하는 우리의 학교 현실속에서 위와 같은 경지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학생들은 앞으로의 삶을 잘 살기 위해 지금의 배우는 삶을 의미없게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의 삶 자체를 즐기는 존재로 인식되어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며 살아가는 학생들의 삶의 질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배움은 철저히 실천적


소설 <임꺽정>에서 하나 더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배움이 문자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의 배움은 철저히 신체적이다. 그들의 학습은 머리로 생각하는 지향성을 손으로 전달해서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형상을 구현하기 위해 부단히 실천하는 체화의 과정을 통해 머리보다는 몸으로 혹은 손으로 기억한다. 그들의 몸으로 기억된 학습의 결과는 논리적 언어로 표현될 수 있기보다는 몸의 기억으로 다른 장면과 상황이 전개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이점은 지금의 우리 시대의 학습에 주는 또 하나의 시사점으로 ‘배움의 머리 지향’에서 벗어나 ‘배움의 실천 지향’으로 전환을 탐색해보게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중에 머리와 가슴, 그리고 가슴과 손과의 거리라고 한다. 우리의 교육이 이러한 3자간의 거리를 더욱 더 멀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머리가 아무리 비상해도 머리의 비상함이 손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의 학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학습에서는 표피적 정보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채우기만 할 뿐, 그들의 가슴을 울리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애써 다른 국면에서 배운 데로 실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교사들도 몸의 실천을 통해 나의 것으로 체화할 수 있는 기회와 과정을 애써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실 교사의 가르친 지식이 학생의 지식으로 일대일 그대로 복사되지 않는다. 지식의 창조는 현재의 문제의식과 특정 사회 역사적 관계성이 공유되어 고민되고, 고통체험의 여정이 마련될 때 온전한 나의 지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논리적 치열함과 동시에 느끼는 사고의 공허함이 갖는 한계를 몸의 실천으로 상쇄시킬 수 있는 치열한 노력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학습의 수동적인 습득에 저항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맥락읽기를 통한 깊이 있는 이해활동, 머리로 학습된 개념과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의 통합 활동, 자기 나름의 주체적 의미 구성 활동과 경험된 현실에 비추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문제제기의 비판적 해석활동들이 새롭게 주목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학생들의 배움이 몸으로 보여줄 때 결연한 실천의지와 열정이 나오게 된다.


그렇다고 머리로 깨닫는 사고와 개념적 학습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추상적 사고와 논리적 치열함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을 폄하하는 의도도 없다. 무조건 몸의 실천이 갖는 가치를 절대시하려는 것도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머리로만 하는 학습이 갖는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몸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제 삶에서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와 닿은 경험과 학문적 체계 안에서 개념적으로 파악되는 인식활동의 관계 맺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배움은 생각을 구체적인 현장을 매개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된다. 백 마디의 말보다 몸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실천이 공감의 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또한 생각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실천하는 손이 세상을 바꾸는 지름길임을 야곱 브로노브스키는 말로 마무리한다.


“세상을 파악하는 방법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는 머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손이다. 손은 마음의 칼이다. 그것이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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