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진리와 내 안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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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진리와 내 안의 폭력
  • 유해숙
  • 승인 2013.12.09 13: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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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유해숙 교수 / 서울사회복지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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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있다. <푸른 눈 갈색 눈>이다. 이 책은 1960년대 말 미국 초등학교 교사인 제인 엘리어트씨가 ‘차별 수업’을 통해 실험한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그녀는 흑인 인권운동을 하던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살해된 데 충격을 받아 ‘차별 수업'을 하기로 하였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푸른 눈이 갈색 눈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선언한 다음 그녀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관찰한다:
 
점심시간 즈음엔 엘리어트는 어떤 아이가 갈색 눈인지 푸른 눈인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이들을 보기만 해도 구분할 수 있었다. 갈색 눈의 아이들은 행복했고, 눈이 초롱초롱했으며,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 학업 능률도 전보다 크게 올랐다. 반면 푸른 눈의 아이들은 비참했다. 그들의 자세, 표정, 전체적인 태도는 그야말로 패배자의 것이었다. 학업 능률도 전날에 비해 급격히 떨어졌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푸른 눈의 아이들은 정말로 열등한 사람처럼 보였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 다음에 역할을 바꿔 본다. 또 다시 이런 놀라운 일이 반복된다. 결국 차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 안의 푸른 눈 갈색눈
 
이런 일은 하나의 실험으로 치부될 수 없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차별투성이기 때문이다. 가족 내에 장남과 다른 자식들 간의 차별은 물론이고 직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그리고 우리 사회의 남녀차별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다. 학교는 어떤가? 공부 잘하는 아이와 학교일에 더 신경쓰는 학부모에 대해 학교는 훨씬 더 관대하지 않은가? 명문대를 다니거나 대기업에 취직한 사람들에게 또 다른 특혜를 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우리는 우리가 서양의 시선으로 동양을 보았던 오리엔탈리즘을 편견과 억측으로 버무려진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곧 동남아인들과 외국인 노동자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 사회 속에 사는 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 남자 조카에게는 용감함을 가르치면서 장난감 차를 사주는 반면 내 여자 조카에게는 섬세함을 칭찬하면서 인형과 그림그리기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런 나의 태도에 대해 누가 지적해 주기까지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을 정도이다. 결국 남성과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것에 나는 공모해 왔고, 더욱 큰 문제는 그런 사실조차 자각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의 엄마는 여성차별주의자인지 모른다.
 
진리를 의심하라
 
우리는 의심할 수 없는 몇 가지 진리가 있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만고불변의 진리가 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그런데, <푸른 눈 갈색 눈>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권력이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나는 수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의 욕망도 광고가 만들고 명품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만들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또 다른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인간은 이기적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시장에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경쟁은 불가피하며 복지는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믿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시장에서의 적응만이 살길이라고 외친다. 모두가 숙명론에 빠진다. 하지만, 인간이 협동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연민의 정이 생긴다든지, 맹수를 잡을 때 협동이 더 효과적인 것을 이해한다든지 … 그리고 서유럽의 복지국가는 협동과 연대의 산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원불변한 그 어떤 진리가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이 앎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아테네와 현자의 등에(쇠파리)가 되어 비판한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등에가 우선 있어야 할 곳은 우리 몸 안이라는 것을! 내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상식, 진리, 확신이 어쩌면 폭력적인 시선이 되어 차별과 억압의 무기가 되고 있지 않은가! <푸른 눈 갈색 눈>은 오늘도 내 안의 우열을 꾸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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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지 2013-12-16 09:16:50
글 좀 다시 정리해서 게시해 주세요. 푸른 눈이 우월하다고 선언했는데 왜 푸른 눈 아이들이 침울해 졌나요? 단지 여자 조카에게 섬세함을 칭찬하는 게 왜 "여성차별주의자"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편협한 시각으로 치부되어야 하나요??? 그럼 모든 여자 아이들에게도 용감함을 가르치며 장난감 자동차를 사줘야 하나요? 그게 오히려 남성우월주의사고 아닙니까? 자동차를 원하는 여자아이에게 인형만을 강제로 안겨주었다면 모를까.. 참 두서없고 어이없는 내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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