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제도는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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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제도는 지켜야 한다
  • 하석용
  • 승인 2014.01.0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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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하석용 / 공존회의 대표 ·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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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에 파리 중심가 근처, 한 광장 귀퉁이에 턱을 고이고 앉아 생각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흑, 백, 황, 펑크, 레게, 스킨스, 스카... 작은 광장을 온갖 낯 선 인종들이 분류(奔流)하고, 내가 앉은 벤치 바로 옆에서는 벌써 아까부터 한 광인(狂人) 형색의 남자가 어디서 주워왔는지 알 길이 없는 잡동사니들을 길바닥에 가득 늘어놓은 채 끝날 것 같지 않은 괴상망측한 퍼포먼스를 계속하고 있다. 이유 없이 내지르는 비명, 술주정, 긴급 차량들의 사이렌… 각가지 소음들에 거리 악사의 연주 조차 묻혀버린다. 무질서다. 그 한 구석에 내가 앉아있다. 이젠 옛날 같이 여차하면 뺑소니라도 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전혀 무방비한 상태로….
나는 무얼 믿고 여기 이렇게 앉아있을 수 있는 것일까. 만일 무슨 돌발 사태라도 생긴다면 경찰을 부르면 될까. 주변에서 나의 곤란한 사정을 즉시 알아보고 도와주려 나서는 사람들이 있을까. 스마트 폰에 안내되는 대로 대한민국 영사관에 전화를 한다면? 그 모든 대안들의 답이 긍정적일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난 도대체 왜 이토록 용감하게, 심지어 이들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리석은, 무모한 여행자인 것일까?
이런 자문(自問)의 끝에서 나는 다소 엉뚱하게 “악법도 법이다”라는 진부한 명제와 만난다. 지금까지도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이런 말을 했느냐 아니냐를 놓고 말들이 많고 이 표현과 관련해 법과 정의라는 문제를 놓고 학계와 시중이 요란하다는 것을 안다. 한 때 법관과 대통령까지 지낸 인사의 “악법은 법이 아니다” 라는 발언을 기화로 진영(陣營) 논쟁이 있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파리의 한 복판에서 문득 우리의 이러한 부질없는 편싸움에 갇힌 논쟁들이 이 명제의 가치를 지나치게 가볍게 폄훼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그러한 가벼움이 아마도 우리 사회를 불안정으로 몰아가는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에 생각이 미친다.
내게 있어 이러한 명제의 시발이 소크라테스와 닿아있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이야기를 직접 한 것이 사실이거나 당시 소크라테스의 옥사(獄死)의 의미를 누군가가 그렇게 해석 정리한 것이거나 간에, 내가 소크라테스의 명성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는 한, 그 명제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지면에서 나는 한가하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나쁜 법, 좋은 법 논쟁 따위를 재연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서로 이해가 상충하는 생존경쟁의 주체들이 모여서 그나마 목숨 부지하고 살아가기 위해 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무슨 현학적인 별난 토론이 필요할 것인가. 법이 있고 보면 권리와 의무라는 양면이 생기게 되고 처벌이라는 강제가 따르게 마련인 것이니, 어느 법이라 한들 때로는 누군가에게는 좋은 법이고 누군가에게는 나쁜 법이게 마련이 아닐 것인가. 인간들의 현실적인 힘겨루기와 타협의 결과로 탄생하는 법률들이 무슨 구원(久遠)의 정의(正義)를 담보할 것이며 절대선(絶對善)을 실현할 것인가. 그런 이유로 함무라비 법전과 팔조법금(八條法禁) 이래 바뀌지 않은 법령이 없고 또한 바뀌지 않을 법령이 없는 것이니 나쁜 법, 좋은 법의 논쟁이 어찌 유치하다 하지 않을 것인가.
다만, “악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내포하는 “악법은 법이 아니므로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는 의식이 이 사회의 일각에서 심화하고 선동의 과정을 거쳐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사회의 최종 권력자로서 시민이 갖는 저항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하는 이러한 선동은 자칫 이 사회를 무정부적인 혼란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반사회적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장은 정의와 부정의, 선과 악, 강자와 약자, 지배 피지배, 착취 피착취 등 일상적이지 않고 지극히 이분법적인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어 심오한 무언가가 논리의 중심에 있을 것 같은 위장성(僞裝性)을 갖고 그로 인해 강한 저항적인 유혹의 마력을 갖는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우리와 같이 타민족에 의한 피식민의 경험과 강력한 독재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회에서 이러한 체제 저항적인 명제들은 곧장 신성한 선각(先覺)으로 연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의 오류를 증명하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회의 구성원이 제 입맛대로 법령을 선택하여 지키는 사회가 가능할 것이냐는 질문과, 시간과 문화의 경계를 초월해서 불변의 정의로 살아남은 인류 역사상의 법령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여 보는 것으로 결론은 자명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적인 결론 따위로 치유되지 않는 너무도 강한 권위에 대한 불복종, 상대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는 시기심, 지나친 경쟁의식에서 비롯하는 콤플렉스, 제 울타리만을 품어 안는 이기주의 따위 우리의 아픈 역사로부터 유전되는 비공존적인 심리적 요소들이 우리의 사회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데에 있다. 결과적으로 “권리는 내게, 책임은 사회가” 라는 비상식이 사회를 지배하고 선동가들의 작은 말장난에 온 사회가 요동을 친다.
이제 우리 사회는 모두에게 나쁜 법이라면 얼마든지 절차에 따라 바꿀 수 있고 공동선을 위해 필요한 가치라면 토론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인 기구와 제도를 가지고 있다. 한 줌도 안 되는 정치세력들이 온 나라를 뒤흔들 수도 있고 아무 공적인 권력을 갖지 않은 시민세력들이 정책을 좌우할 수 있는 나라다. 이 모든 것이 그나마 일부 선동세력들이 부정하려고만 드는 법과 제도가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파리의 이토록 무질서한 광란의 광장에 쭈그리고 앉아 이런 사색이 가능한 것도, 내게, 부지불식간에 이 사회의 어떤 제도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대한민국의 이 혼란 속에서도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대한민국의 제도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닌가. 내게 나쁜 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 법이 아니라 이 제도 속에서 내가 바꾸어 나가야할 법일 뿐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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