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평의 역사 속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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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평의 역사 속을 걷다
  • 이목연 소설가
  • 승인 2014.06.23 1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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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평화발자국 참관기
‘인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 주관하는 인천평화발자국 행사에 참가했다.

인천의 역사 속에 평화가 파괴된 현장을 찾아 전문해설가와 함께 걸으며 그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고 느끼는 행사인 ‘인천평화발자국’은 벌써 9회를 맞고 있었다.

최근 전범 국가로서 국제적으로 무력을 제한 받던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주장하며 군국주의 노선을 채택하는 등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추진한 듯 이번 행사의 주제는 “조병창에서 애스컴시티로, 부평미군기지 반환”이었다.

서울과 가장 가까운 개항지로서 근대 문물을 가장 먼저 접했던 인천은 근대화 과정을 치열하게 겪은 곳이다. 그 중에서도 부평은 도시의 반 이상을 일제의 군수공장으로 내주어야 했던 역사의 무대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8년 5월, 중일 전쟁에 조달할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조선에 병참기지화를 선언한 일본은 1939년부터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일대에 ‘일본 인천육군조병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일본은 인천과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강제동원한 젊은이들로 근로보국대를 조직, 이 조병창에서 일본군들이 사용할 무기를 생산했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그 조병창 자리를 미군에게 내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미군의 보급부대인 애스컴시티다. 비행장까지 갖추고 있던 이 애스컴은 범위를 축소하긴 했지만 여전히 부평시내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조병창과 더불어 조성된 공업단지는 196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수출산업공단인 부평공단으로 변해 수많은 근로자들을 집결시키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이런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는 행사였으니 자연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육군조병창이 들어서 있던 부평 전경)
 
행사는 김현석 해설사로부터 인천 주변의 고대 역사와 문학적 배경이 된 부평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과 더불어 미군의 보급부대였던 애스컴의 주둔과 그 뒤를 이어 산업화의 중심이 되었던 부평에 대해 한 시간 남짓 강의를 듣고 현장을 탐방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김현석 해설사로부터 부평의 약사를 듣고 있는 참가자들)
 
사실 나는 애스컴의 주둔과 더불어 서양음악의 메카가 되었던 부평, 특히 당대 음악인들의 거점이었던 삼릉 지역에 대해 간략한 조사를 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범위가 이 행사의 시발점인 산곡동까지 확대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특히 삼릉지역이나 백운역 주변의 다다구미 등이 노무자들의 판자촌인 것에 비해 이곳 산곡동 쪽의 주택은 전쟁수행을 위한 핵심 산업 전사들을 위해 지어진 것이었단다. 지금은 큰 도로를 중심으로 개발이 된 삼릉과는 달리 이곳은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이렇게라도 탐방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현재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검정사택지는 미군부대 물건들을 팔던 도깨비시장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벽을 타마구 기름으로 먹인 종이로 지은 집들이 많아서 검정사택지라 불린다고도 하고 주변과 달리 검은 빛이 도는 시멘트로 담을 칠했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고도 하는 검정사택 골목. 집을 개축하며 서로 길 쪽으로 집을 내어짓는 바람에 예전에는 트럭이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넓었던 골목은 좁아졌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담벼락은 허물을 벗으며 삭아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당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니만큼 그 현장을 보존, 역사적 자취를 남겼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다음 행선지인 영단주택단지로 걸음을 옮겼다.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검정사택지 골목)
 
조선주택영단(주택공사의 전신)에서 계획 보급했기 때문에 영단주택이라 불리는 영단주택단지 역시 그 흔적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었다. 이 주택단지는 부지 선택과 설계과정을 거쳐 쾌적하고 위생적인 질 좋은 주택을 보급하기 위해 마을 중심에 광장과 아동유원지 급수시설 등을 설치하였던 이른바 신도시였다.

1941년 입주를 시작한 그 주택들에는 해방과 더불어 주인이 바뀌었을 것이다. 일본이 물러가고 애스컴이 들어서자 주둔한 미군들을 중심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도깨비 시장의 상인이나 소위 양공주라 불리던 직업여성들이 이 골목에 들어찼던 시기도 있었을 것이고, 그 뒤 미군들이 감축되며 들어선 부평공단의 근로자들이 살았을 것이다.

부평의 공장들이 떠난 지금은 외국인 근로자나 일선에서 물러난 노인들이 머물고 있다. 유난히 점집이 많은 부평에 대해 김현석 해설사는 신을 받은 사람들은 고달픈 인생을 위로하기 위해서, 또 싼 집세 때문에 가난한 골목으로 몰려드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영단주택단지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이어 군수물자가 이동되었던 철길을 따라 고층아파트 사이를 걸었다. 대로를 따라 쭉 늘어서 있는 높은 건물과 아파트 군락 뒤편에 이렇게 후미지고 시간이 머물러 있는 장소가 있을 줄이야. 아직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애스컴은 인근의 경남아파트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애스컴시티는 그 면적이 대단히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만 3천여 평에 달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2016년에는 그 너른 부지가 온전히 주민들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전비용 문제 및 토양 환경오염 문제, 반환 받은 후 부지 및 시설의 활용 문제 등 굵직한 현안들이 해결책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경남아파트 옥상에서 바라본 애스컴 지역 일부. 이 건물들의 일부를 활용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질풍처럼 몰아친 백년의 세월을 제대로 알기에는 부족한, 한나절의 짧은 탐방이었다. 하지만 참가자들의 눈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미군이 주둔했던 애스컴의 역사와 산업근로자들이 거쳐 간 근대화의 현장을 예리하게 살폈고 그 역사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졌을 우리 조상들의 신산한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내쉰 참가자들의 한숨은 부평이 안고 있는 질곡의 역사만큼이나 깊었다.
 

오염된 토양이니 농산물을 재배하지 말라는 경작 금지 안내문을 보면서도 여전히 고추며 호박을 심고 가꾸는 이들은 모진 역사의 파도를 헤쳐 온 사람들일 것이다. 온 몸에 굳은살이 배겨 어지간한 고통은 고통으로 여겨지지도 않는 우리의 이웃들. 묵묵히 물을 주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렸다.

묵직해진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길, 이런 아픈 역사가 더 이상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이어지지 않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했다. 더불어 이렇게 가까운 현장을 탐방하여 지나온 역사를 되짚어보고 평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인천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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