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기원하며, 민간인학살 현장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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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기원하며, 민간인학살 현장을 찾다
  • 이희환 대표
  • 승인 2014.07.24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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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이념에 따른 학살, 지금은 멈췄는가?”

 고양 금정굴 민간인학살 현장
 
온나라가 세월호 참사로 참담한 고통을 겪고 있던 7월22일,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 주최로 인천과 경기지역 민간인학살 현장을 둘러보는 답사에 참여하게 됐다.

"평화를 기원하며, 인권의 소중함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1박2일간 진행된 '인천, 경기지역 민간인학살 현장 탐방'은 20인 정도의 시민들이 궂은비가 내리는 가운데, 고양 금정굴 민간인학살사건 현장을 시작으로, 김포 하성초등학교 부역혐의자 학살사건 현장, 그리고 교동도 고구리 학살사건 현장 등을 둘러보는 시간으로 진행됐다.

처음 방문한 곳은 고양 금정굴 현장이었다. 1950년 10월6일부터 25일까지 고양 금정굴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집단학살사건은 전국적으로 벌어진 민간인집단희생사건 가운데서도 그나마 유족들이 일찍부터 진실을 찾아 활동해온 탓에 1995년 금정굴에 대한 발굴이 이뤄져, 153구의 희생자 유골이 발견된 곳이다.

당시 유족회를 이끌었던 서병규 전 회장은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금정굴 현장에 나와 인천에서 온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15세의 나이로 부친과 세 형이 한꺼번에 집단학살된 전후과정과 이후의 신산스런 삶, 그리고 금정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고양에는 6·25전쟁 때 큰 전투도 없었고, 서로가 다 아는 사이였는데도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어요. 저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평생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1995년 무렵 유족회를 처음 결성해 금정굴을 발굴하고, 또 가해자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유골의 발굴 이후 우려곡절을 거쳐 진실규명이 이루어지고 지금은 국가로부터 배보상도 이루어지고 유족들이 보상금 중 5%씩을 출연해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을 설립했지만, 아직도 유골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고양에 평화공원이 만들어져 이 땅에 다시는 이와 같은 끔찍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평화를 널리 전파해야 합니다."

근 10여 년을 이 일에 매달려온 서병규 회장은 온갖 스트레스로 청력도 잃고 몸도 쇠약해졌지만, 그러나 근 한 시간 동안 열정을 다해 산적한 진실규명의 과제와 평화공원 조성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설명해줬다.

고양을 떠나 찾은 곳은 김포 하성초등학교 앞이었다. 이곳에서 강화, 김포지역 민간인학살을 오랫동안 조사한 최태육 목사를 만나 김포지역에서의 민간인학살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김포는 시 전역에서 9·15인천상륙작전 후 부역혐의자에 대한 집단학살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중의 한 곳 하성면 소재지였던 화성초등학교와 나란히 하성파출소와 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이 과거 하성지역 민간인학살의 본부역할을 했던 하성지소와 치안대 사무실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김포지역의 민간인학살에서는 특히 아이들이 많이 처형당했다고 한다.

"왜 아이들이 처형당했을까요? 엄마, 아버지와 같이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희생당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유아 혹은 어린이가 학살당한 것은 하나의 현상이었습니다. 김포지역에서는 면 단위로 평균 3~4곳의 학살지역이 나타나는데요. 그곳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처형이 이루어졌고, 그때마다 아이들의 학살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최 목사는 이 정도까지만 설명하고, 서둘러 교동도로 넘어가자고 했다. 그곳에 가서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자고 했다.

7월 초에 개통된 교동대교 앞은 지금도 여전히 해병대에서 신분확인 후 통행을 허락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아침 6시 이전에는 교동도에서 나올 수 없고 밤 8시 이후에는 교동도로 들어갈 수 없게 통제하고 있는데, 북쪽 황해도와 1㎞ 남짓 떨어진 교동도에는 한국전쟁 당시 많은 월남민들이 들어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졌다.

교동도의 북단에 위치한 고구리 해변으로 들어가는 길은 차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외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곳 해병대 초소와 바로 인접한 해안에는 '을지타이거여단 충혼비'가 약 좌우폭 20m 정도의 큰 규모로 조성돼 있다. 그곳은 실상 1950년 10월경 벌어진 민간인학살의 현장이기도 했다.
 

 

교동도 민간인학살의 현장이었던 해변에 조성된 '을지타이거여단 충혼비'

1950년 10월3일 교동면을 비롯한 13개 면에서 강화치안대가 조직됐다. 이들은 당시 부역혐의자를 A, B, C로 분류해 A는 즉결처분했다.

그런데 교동에서 9살이었던 최고유라는 아이를 연행, 조사, 분류, 처형하는 과정이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적용됐다고 한다.

당시 부역혐의로 분류된 처형된 212명 중에서 10세 미만의 아이와 유아가 무려 33명이었다.

"트루먼이 만든 냉전이념이 강화도 벽촌 고구리까지 작동한 것이죠. 멸공이라는 냉전이념은 유아와 아이들까지도 학살한 것입니다. 민간인학살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냉전이념이 만든 끔찍한 범죄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오늘날까지도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린 유아와 아이들까지 적으로 간주해 학살했던 고구리 현장의 '을지타이거여단 충혼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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