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씨 4형제의 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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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씨 4형제의 숨겨진 이야기
  • 이성진(인천근현대사 연구자, 영화여자관광경영고 교사)
  • 승인 2014.08.08 0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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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의 인천 근대인물열전 2]
주현숙 구술, 이성진 정리

 주현숙 선생님(왼쪽)

1. 아버지 주씨 4형제(주명기, 주봉기, 주정기, 주원기) 인천 정착 이야기

제 아버지는 주봉기 씨로 경동, 제가 어렸을 때는 중국 사람들도 장사를 해서 삼리채라고도 했어요. 또 싸리재라고 했습니다. 지금 애관극장 앞 장외과 뒤에서 포목점을 크게 하셨습니다. 큰 아버지는 주명기 씨로 1920년대부터 유동에서 주명기 정미소를 운영하셨습니다. 나중에 협신정미소, 환일정미소로 조선인이 운영하는 정미소로는 꽤 큰 규모가 있었습니다. 정미소에서 나오는 쌀은 환일미라는 상표를 붙여 일본으로 수출하는 등 품질이 매우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셋째 작은 아버지 주정기 씨는 인천상업학교를 나와 명기 형님과 함께 정미소를 경영했습니다. 그 분은 장면 정권 시절 전국미곡협회 회장까지 지낸 분입니다. 그리고 막내 작은 아버지 주정기 씨는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회장을 하셨지요. 정치인 김종필 씨가 보이스카우트 회장을 맡기 직전에 했어요. 그 양반은 통이 크신 분이라 사교성이 제일 좋았어요. 별 고생은 안 하신 편이죠. 형님들이 다 공부시켜주고 했으니까 말입니다. 시의원도 하시고 참 많이 하신 분입니다.

아버지 형제분들의 고향은 원래 인천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크셨습니다. 대대로 관직을 지냈던 집안이었는데, 할아버지 대에 와서 벼슬을 하지 못해 가산을 탕진하셨다는 얘기를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큰아버지 주명기씨 옛날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큰 계급장 장식이 달린 관모를 쓰시고, 역시 계급장과 훈장이 달린 관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그때는 관직생활을 하셨다는 정도였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 선생님이 주신 자료를 보니 구한말 경무학교를 졸업하시고 경성 서감리서에서 순찰장교로 근무하셨더군요. 내가 직접 봤던 사진이 그 시절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관직생활을 하셨던 큰아버지 주명기 씨는 1900년대 초 나라의 운명이 이미 기울었다는 판단을 하고 아래 3형제분을 제물포로 재빨리 데리고 오셨다고 합니다. 아마 개항장 제물포는 아버지 형제분들이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주명기 큰아버지는 제물포로 내려 오시자마자, 그 당시 제물포에서 가장 큰 포목점 서흥태 점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서흥태 포목점은 내동에 있었는데, 주명서, 장내흥, 김응태 세 분이 동업 운영했습니다. 상점 이름도 세 사람 이름 끝 자를 따서 서흥태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일본산 면직물과 중국산 비단이 판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서흥태 포목점은 일본인, 중국인 포목점과의 경쟁을 해서는 실패할 수 없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고 비단, 배자, 남바위, 털토수 같은 고급 옷감보다는 광목, 옥양목 같은 수입 옷감과 삼베, 모시 같은 토종 옷감을 팔아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고 합니다. 포목점으로 자리를 잡은 세 사람은 물산객주로 진출해 더 큰 성공을 했습니다.

큰아버지 주명기 씨는 워낙 기품이 있으시고 부지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좋아하셔고 마음 씀씀이도 너그러운 편이어서 항상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서흥태 동업자에게는 절대적 신임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세 사람이 물산객주 사업으로 확장 진출하면서 아예 포목점 운영을 큰아버지에게 일임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미 큰 아버지는 서흥태 점원으로 안주하는 것보다 직접 포목점 사업을 하고자 하는 큰 꿈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점원으로 있으면서 세 사람의 탁월한 상술과 거래처 등을 하나하나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삼흥태 주인에게서 엄격한 상도덕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구제사업과 교육기부 등 사회적 공헌을 하는 선행을 배웠다고 합니다.

아버지 주봉기 씨는 1886년 생으로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워낙 좋으셔서 목공일을 배우셨습니다. 눈썰미가 좋으셔서 한번만 보면 그대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 편리하게 만드는 재주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항상 세상을 보는 안목이 앞선 관계로 그 당시 다른 목수들이 하지 못하는 물건을 만들고 처음 만져보는 장비를 구입해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워낙 손 솜씨가 뛰어나고 꼼꼼해서 대충 일을 하지 않아 너도나도 목수 일이라면 아버지께 맡겼습니다.

주명기 큰아버지께서 1906년 서흥태 주인인 장내흥(후에 개명해서 장석우가 됨)에게 400원을 빌려 닭전거리에 형제상점을 개업하십니다. 장내흥이란 분은 우리집안과 그때 처음 인연을 맺기 시작해 나중에 고모 사촌이 됩니다. 포목점, 물산객주 등 사업을 하셔서 많은 돈을 육영사업에 많이 기부하신 분입니다. 해방 전 아들 장광순 씨가 학교를 세워 보자고 해 부평에 소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세우셨습니다. 그 학교가 지금의 박문여중고입니다. 그 분의 아들은 장광순이란 분으로 일제시대부터 채미전에서 청과물시장을 운영한 분입니다. 인천시의원을 지내시기도 했습니다.

큰 아버지 주명기 씨는 독자적으로 포목점을 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점원 월급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 장내흥 어르신께서 주씨 형제가 일하는 모습을 줄곧 지켜보면서 너무 감동해 보증도 없이 그냥 400원이라는 돈을 그냥 빌려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삼흥태에서 독립해 포목점을 열었다고 합니다.

 

보이스카웃 활동 중인 주원기 씨

2. 주명기, 주봉기 형제-싸리재 포목점 형제상점 운영

1906년 싸리재에 형제상점이라는 상호로 포목점을 개업합니다. 포목점 운영은 두 분 형제가 하셨습니다. 두 분은 워낙 우애가 돈독해 어려움이 와도 인내하고, 온순한 성품을 갖고 계셔서 성심성의껏 일을 해 크게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닭전거리는 주명기상점이 들어서면서 서흥태, 정순택, 최의방, 이청문, 김태성 등이 포목상점을 열기 시작하면서 커다란 포목시장을 형성했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세계 정보를 습득하시는데 일가견이 있으셔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본 동경 및 대판에서 직수입한 화양잡화를 염가로 판매해 손님을 엄청나게 끌었다고 합니다. 또한 친절하게 대접하고 일상에 접할 수 없는 행사를 열어 재미까지 더해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그 해 장내흥 어르신에게 빌린 400원을 갚았을 뿐만 아니라 점원 5명을 고용할 정도로 수천원의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1911년에는 내동 일대 128평을 매수해 대지주로 부각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내동 일대와 신포동 일대는 일본사람하고 중국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는 번화가라 집값이나 땅값이 최고로 비싼 곳이기 때문에 그 당시 한국사람 중에도 어지간한 돈을 갖지 않고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금싸라기 땅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도 그랬습니다.

특히 아버지 주봉기 씨는 서울에서 싱어 재봉틀을 갖고 내려와 인천에서 처음으로 조끼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당시 한복에는 주머니가 없어 허리에 전대를 차고 다녀야 했습니다. 돈 지갑, 담배, 성냥 등 소지품이 늘어나면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던 차에 주머니가 있는 한복 조끼를 만들어 판매하니까 사람들이 그 조끼를 살려고 상점 앞에 줄서서 기다렸습니다. 양복 조끼를 보고 한복에도 있다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상점에 돌아와 재봉틀에 앉아 직접 디자인을 하셨습니다.

아버지 주봉기 씨는 가만히 게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집에서도 일찍 일어나셔서 집밖을 다 청소하시고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목점에 점원들보다 30분 정도 일찍 나오셔서 포목점 앞과 바깥 창을 일일이 다 청소하셨습니다. 집안이나 포목점 안은 절대 청소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나름대로 철학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내가 할 일의 영역을 정해 놓고 말없이 하십니다. 그러면 집안에서는 가장이 집 밖 청소를 아주 깔끔하게 매일 하시는데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집안 청소를 안 하겠습니까? 또 포목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원들이 주인이 가게 앞과 창문을 닦아 놓는데, 포목점 안을 깨끗하게 청소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주봉기 씨는 이렇게 하시면서도 집안에서 하는 일에 관해서 되도록 간섭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집안 대사는 간여를 하셨지만 그 외는 전혀 안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제가 집 살림을 맡아할 때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집안 가구나 집 손질은 남에게 맡기시지 않고 직접 다하셨습니다. 그러니 목수들이 일반적으로 만드는 그런 가구가 아니라 집안에 정말 맞을 뿐만 아니라 색깔도 너무 칙칙하지 않고 비교적 밝게 내셨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봐도 정말 멋지고 튼튼하게 만드셨습니다. 집을 지으실 때도 아버지께서 직접 나서서 하셨으니, 목수들이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자기들보다 더 많이 아시고 잘 하시기 때문에 꼼짝 못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아버지만 유독 하신 것이 아니라 주씨 네 형제분가 다 그랬습니다.

아버지 주봉기 씨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집밖 청소를 하고 가게로 나갔으며, 집안일에는 전혀 간섭하거나 직접 관계를 하지는 않았지만 집안에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찾아서 빈틈없이 처리함으로 자연스럽게 집안에서도 아침 일찍부터 청소를 시작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안의 가구나 집 손질은 남에게 맡기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처리할 정도로 꼼꼼하고 근면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버지 주봉기 씨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주씨 형제 모두가 다 그랬어요.

아버지 주봉기 씨는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셔서 형제상점에 세계 각국 의상을 입은 인형을 설치해 볼 것을 마련해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눈요기 거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물포 포목점에 그 당시 서민들이 구경하기 힘든 일본 빅터 유성기를 들여왔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축음기를 보면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는 상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OK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이동백, 정정렬, 이화중선, 홍도화 같은 명창의 레코드를 틀면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상점 앞으로 와서 한참 듣고 가거나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부녀자들도 몰래 와서 듣고 갔다고 합니다.

“저것 봐 참 잘도 하지 궤짝 속에서 광대 생소리가 나오니 필시 숨어서 소리를 하는 것 아냐? 참 잘도 하고 신통도 하지”

나팔 달린 유성기 앞에 나오는 명창들의 수심가, 단가, 판소리 등을 듣고 경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륜 오토바이를 처음 들여와 상점 안에 주차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등 당시 제물포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는 항상 남보다 앞서 가는 상술을 갖고 있었으며, 새로운 물건을 들여와 사용한 것도 그가 목수를 한 경력이 있어 손재주가 탁월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획기적인 사건은 포목점 상호를 형제상점에서 주명기상점으로 바꿨습니다. 나중에 실제로 포목점을 맡아 운영한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소유는 주씨 4형제 중에서 장남인 큰 아버지 주명기 씨 명의로 올렸습니다. 주명기상점으로 상호를 바꾼 후, 곧장 ‘주명기상점상보’를 발행했습니다. 전에는 집안에 몇 장씩 돌아다녔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 못했고, 6.25 전쟁 때 집안에 국군 장교가 있었습니다. 계급은 대령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인민군들이 와서 문제를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해 집안에 있는 사진이나 문서를 대부분 소각했습니다. ‘주명기상점상보’를 통해서 고객들에게 상점과 상품에 관한 정보와 인천지역의 경제 정보를 제공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3. 주명기, 주봉기 두 형제 분의 성격

제가 본 주봉기, 제 아버지는 성질은 팩 하는 성향이 있어 때로는 불같은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경우도 있으나. 뒤 끝은 절대 없는 분이셨습니다. 항상 어머니로부터 질책을 당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화를 내실 때는 어머니는 절대 대꾸를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듣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시간이 지나 감정을 수그리시면 어머니께서 당신께서 하실 말씀을 그때 하십니다. 왜 남의 사정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화부터 내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목조목 말씀하시면 아버지는 곧바로 수긍하시곤 했습니다.

제가 본 큰 아버지 주명기 씨는 명절 때 잠깐 뵙고, 평소에는 잘 뵙고 하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렇다고 큰집에 내 집 드나들 듯 하지도 못했습니다. 큰 어머니는 완고하시고 남이 집에 오는 것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기억하고 있는 큰 아버지 주명기 씨는 1920년대 초 인천에서도 내놓으라는 부자였습니다. 유동에서 주정기정미소를 경영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큰 부자가 되셨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하거나 위시하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남이 갖지 못하는 특유의 온후한 성품을 갖고 계셔 사람을 괜히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언제 보아도 머리를 단정히 빗고 계셨으며, 옷도 아주 단정하셔서 단아한 태도를 갖고 있어서 품위있는 분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는 그냥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와준다고 해서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시려고 노력하신 분이었습니다.

 

4. 아버지 주봉기 씨의 잡화상 독자 운영

아까 말을 했습니다. 두 형제분은 탁월한 장사 수완을 발휘하여 많은 부를 축적했습니다. 주명기 큰 아버지는 1920년대 초반 정치국, 심능덕, 구창조, 정순택, 장석우, 최승우, 유군성, 이흥선, 장세익 등과 함께 10대 부자가 되셨습니다.

주명기 큰 아버지는 다양한 상술과 뛰어난 손재주를 갖고 있는 아버지에게 주명기상회를 완전 맡겼습니다. 그리고 이미 매입한 땅을 기반으로 정미소를 설립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버지가 정미소 사업을 하시게 되면서 포목점을 독자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경동 외관극장 앞에 포목점을 보다 확장해 잡화상을 운영하셨습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 인형을 가게 앞에 세워 놓기도 하고, 축음기를 틀어 명창 소리도 듣게 해 손님을 유치하는데 주력했을 뿐만 아니라 한복 조끼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어 더 많은 재산을 버셨습니다. 그리고 내리 131번지에 잡화상을 내시면서 면사, 면직, 기타 직물, 기타 잡화를 판매하면서 금전대부업도 하셨습니다. 금전대부업이란 서민들에게 돈을 대부해주고 이자를 받는 것으로 이자를 적당히 받으면 되는데, 고이자를 받아 결국 대출한 서민만 쪽박을 차도록 하는 악덕 금전대부업자로 인해 별로 평판이 좋지 않았는데 왜 아버지가 금전대부업을 하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금전대부업이 일본인이 먼저 손을 대 한국 사람들 속에 깊숙이 침투해 폭리를 취하는 등 횡포가 심해 사회 문제로 부각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금전대부업에 손을 대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제가 본 아버지는 결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야박하게 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구제 활동도 하셨던 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합니다.

또한 아버지는 인천포목상조합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게 동아일보에 1922년이라고 나옵니다. 일본인 포목상의 덤핑 등 불법거래로 한국인 포목상들을 지키려는 취지에서 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버지께서 텍사스 석유회사와 연결해 인천대리점을 인천포목상조합 내에 세워 각 한국인 포목점을 통해 석유를 판매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조합운영비를 증대시켰으며, 포목점의 수익을 증대시켰다고 합니다. 해방 후에도 아버지는 텍사스 석유회사 한국대리점을 운영하려고 하셨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고 우리집이 폭격으로 인해 파괴되면서 유야무야한 일로 되어 버렸습니다.

 

5. 큰아버지 주명기 씨의 정미업 진출

큰아버지 주명기 씨는 유동에 주명기 정미소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일본 대형 정미소를 보호하기 위해서 한국 사람들이 정미업에 진출하는 것을 막았는데, 1920년에 들어서면서 한국 사람의 정미소 진출을 허용해 매갈이 방식의 정미소를 많이 세웠다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셋째 작은 아버지 주정기씨의 환일정미소에 가보면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올라온 벼가 수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그때 작은 아버지는 이렇게 쌓아 놓은 벼를 보면서 일본인들은 농민들에게 헐값에 사들여 정미를 해 일본에 비싼 가격으로 수출해 많은 이익을 챙겼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정미소는 커다란 흙맷돌을 돌려 빻는 매갈이 정미방식으로 소규모 영세 정미소를 운영했다고 합니다. 큰아버지 주명기 씨는 특유의 상술로 이흥선, 유군성 등과 함께 인천 한국인 정미업계 3인방으로 부각되셨습니다.

정미소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작업을 거부하고 농성을 하면 큰아버지 주명기 씨가 그곳에 들어가셔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요구가 관철되기 위해서 이렇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중재를 해서 문제 해결을 빠르게 하는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일본인 정미소와는 규모가 작아 인부 임금을 원하는 대로 올려주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한 이해를 구해서 작업거부 농성을 풀도록 했다고 합니다. 제가 자료를 보니까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주명기정미소 광고


6. 셋째 작은 아버지 주정기의 정미소 사업에 합류 

1925년 셋째 작은 아버지 주정기 씨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시고 큰 아버지 정미소에 들어와 함께 일을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신식 공부를 하신 분이어서 큰 아버지 주명기 씨의 정미소 운영 방식하고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 아버지 주명기 씨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주시고, 셋째 작은 아버지 주정기 씨는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이시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뜻을 펼치는 아량을 보여주었습니다. 큰아버지 주명기씨와 셋째 작은 아버지 주정기 씨가 합자한 합명회사로 전환해 주명기정미소로 명칭도 바꿉니다. 그리고 전통방식인 매갈이 정미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기계 정미방식으로 바꿉니다. 그러면서 일일 정미 생산규모가 100가마가 되는 중견 정미소로 발전한 것입니다. 큰 아버지와 셋째 작은 아버지 두 형제의 사람 됨됨이는 정미소가 잘 나갈 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을 때 잘 드러납니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공황이 옵니다. 그래서 많은 군소정미소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년 연속 흉년으로 인한 정미소 일거리가 급격하게 감소됩니다. 20 여개의 정미소에서 일하던 10,000명 정도의 정미공이 실직상태에 놓여 있는데, 주명기정미소는 이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2년간 500여명의 정미공을 실직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셨습니다.

이런 노력은 주정기정미소 정미공들에게는 생계를 보장해 주고,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는 정미공으로부터 커다란 신뢰를 받으면서 최고의 정백미를 생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미 언급한 환일미 상표로 조선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했으며, 일본에도 수출되어 최고의 정백미로 극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직원들을 정리해고 하는데 그렇게들 하지 말고 고용을 보장해 주면 누가나 감사한 마음을 갖고 내 일처럼 할 것인데 말입니다. 이미 우리 주씨 집안에 했던 경영 방법인데 그런 것은 안 배우고 말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해일 겁니다. 1936년에 자본금 25만원으로 대표인 큰 아버지가 20만원을, 막내 작은 아버지가 2만5천원, 막내 아버지가 1만 2천 5백원, 광현이 오빠(주명기의 장남)가 1만2천5백원을 지분을 갖는 가족 합명회사로 협신정미소로 개명했습니다. 그리고 경제가 어려울 때임에도 불구하고 정미업, 곡물 새기 가마니, 미곡위탁 매매업, 금전대부업을 업종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7. 막내 작은 아버지, 주원기의 사업 참여와 환일정미소 운영

막내 작은 아버지 주원기 씨는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셋째 형처럼 본격적으로 정미소 경영에 참여하면서 조선 정미업계의 동향을 예측해 조선정미회사와 합병해 방계회사인 환일정미소로 개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39년 일본인을 대표이사와 이사를 대거 편입시켜 일제의 조선인 경영 회사에 대한 탄압과 간섭을 피해갔습니다. 이것이 친일행위에 해당하느냐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회사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일제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회사 허가를 취소하는 조치를 취하는 관계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결국 조선정미소 대표로 일본인 소림원의웅(小林原義雄), 상무이사로 주원기, 이사로는 가등평태랑(加藤平太郞)이 함께 일을 했다고 합니다. 환일정미소는 상임이사인 막내 작은 아버지가 전면에서 경영을 했습니다. 이는 큰아버지께서 건강문제로 일체의 공사직 활동을 그만 두시는 데에 따라 막내 작은아버지께서 합류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막내 작은 아버지께서 계속 환일정미소를 운영하시게 됩니다.

 

8. 아버지 형제분들의 자선 활동

아버지 주씨 형제들은 매우 어렵게 사셨던 분들이고 자수성가하신 분들이라 어려운 사람들에게 야박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집으로 구걸하러 오는 거지도 그냥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밥 한 그릇을 주저라도 아주 따뜻하고 웅숭하게 대접을 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거지가 오더라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들도 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거지가 된 것이지 원래 거지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 됨됨이를 봐서 일자리를 주시곤 했습니다. 아버지 4형제는 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 인민군과 지역 빨갱이들이 지주나 부자들을 인민의 피를 빨아먹은 반동으로 몰아 인민재판을 했는데, 우리 집에는 얼씬 거리지 못했습니다. 특히 우리 집안에 국군 대령이 있어서 반동집안으로 몰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도 인민군이나 지역 빨갱이들이 우리 집에 와서 못되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민군에게 협조하거나 동조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그동안 아버지 형제분들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 못했지만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야박하게 대하지 않고 되도록 그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아까와 하지 않고 도울 때는 팍 도와주는 아버지 형제분들의 선행이 크게 작용했던 것입니다. 좀 아쉽다는 것은 인민군 세상이 될 때, 아버지 형제분들의 사진, 서류 등을 우리집 마당에서 다 태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집안에 국군 대령이 있는 까닭에 빌미가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없애야 한다고 해서 없애 버린 것입니다. 그게 지금 생각하면 몹시 아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버지 4형제 분들은 인천에 내려와 포목점(후에 잡화상)과 정미소 경영을 통해 정말 많은돈을 벌었습니다. 그렇지만 돈을 많이 벌었다고 그것을 자랑하거나 남을 업신여기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4형제분들은 딸인 제가 보더라도 참 돈독한 관계를 갖고 계셔서 큰 아버지 주명기 씨 중심으로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재산을 큰 아버지 명의로 해 놓는 것을 당연시 여겼고 그렇게 했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아버지 4형제분들은 큰 아버지 명의로 모든 일을 했습니다. 큰 아버지와 제 아버지는 나이 차이가 많지 않고, 인천에 내려와 같이 고생한 까닭에 임의롭게 지내셨지만 셋째, 넷째 작은 아버지 주원기 씨는 나이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공부를 두 형님이 시켰으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큰 아버지 주명기 씨와 제 아버지 주봉기 씨는 한 형제이지만 성격이나 스타일이 완전 달랐습니다. 큰 아버지 주명기 씨는 온화한 성격을 갖고 계시면서도 일을 추진하시는 데는 무서울 정도로 결단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무척 사회활동 하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부의원으로 선출되어 인천 지역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는 말을 어렸을 때 많이 들었습니다. 동구청으로 가는 송림로도 큰 아버지가 부의원을 하실 때 길을 내도록 추진하신 신문기사를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제 아버지 주봉기 씨는 뭐라고 할까 어머니 같은 스타일이었습니다. 앞에서 나서서 일을 하는 것을 싫어 하셨습니다. 큰 아버지 주명기 씨가 밖에 나가서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드리고 하나하나 챙겨드리는 일을 하신 분입니다. 아버지 4형제가 큰 부를 갖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 포목점을 맡은 것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큰 아버지 주명기 씨가 정미소 사업을 새로 시작할 때도 아버지 주봉기 씨가 뒤에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정미소 건축하는 일이나 기계를 들여올 때도 아버지 주봉기 씨가 그런 부분에 재주가 있으셨던 관계로 분명 관계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포목점을 하시면서 남다른 상술을 가지고 고객들에게 큰 주목과 호응을 얻는 일을 계속 하셨습니다. 여기까지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큰아버지 주명기 씨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신문에서도 큰아버지 주명기 씨는 나와도 아버지 주봉기 씨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주명기정미소의 환일미 보도기사

아버지 형제분들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항상 갖고 어려움을 돕는 일에 언제나 앞장서는 독지가들 이였습니다. 큰 아버지께서는 1920년경 조선인 상공인들이 중심이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취지로 결성한 인천자선회에 참여하셨습니다. 그 당시 조선인촌 빈민들을 돕는데 큰일을 하셨습니다. 1924년 인천 자선회가 회원 간의 회비 납부 실적 저조와 방만한 기금관리로 문제가 발생해 회장 장석우가 사퇴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미 말했지만 장석우라는 분은 아버지 형제에게는 은인이었고, 고모 사촌이 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아버지 주명기 씨 명의로 인천자선회의 쇄신을 위해 삼십원을 기부했습니다.

큰 아버지 주명기 씨는 1924년 4월 인천 소년군에서 주최하는 소년연예대회에 참석하여 소년군을 위한 기부금 5원을, 1925년 7월 영명학원(편집자 주: 새로운 사립학교령에 의해 공주 영명학교과 인천영화학교가 통합되어 영명학원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두 학교는 정규학교로 인가받을 수 있었다) 주최 소년소녀가극대회에도 5원을 기부했습니다. 1927년 2월 인천 화도유치원 주최 음악회에도 참석해 유치원 운영을 돕기 위해 자진해서 10원을 희사했습니다. 1928년 전인천소년야구대회에 5원을 기증했습니다. 1929년 6월 인천 사정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해성고아원에 20원을 기부도 했습니다. 1931년 12월 인천공립상업학교 교우회와 동교 동창회에서 주최한 재만동포 돕기 음악회에 주정기는 5원을 희사했다. 1936년 송현리 대화재로 재산 피해를 입은 이재민을 위한 동정 의연금 50원을 부청사회과에 기부했습니다.

 

[후기] 2009년 7월 5일 주봉기 씨 딸 주현숙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인터뷰 전에 주씨 4형제 관련 신문기사와 문헌자료를 전하고 이를 토대로 후손들에게 궁금한 점은 물어보고 확인한 후 인터뷰를 가졌다. 기억력이 좋으신 편이어서 세세한 내용까지 구술해주었다. 인천근대사 자료로 재정리하여 소개한다.(이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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