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적도, 굴업도 민어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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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 굴업도 민어파시
  • 김용구(인천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 승인 2014.08.22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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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 새로운 발견] 4
 

민어는 백성 민(民)자를 쓸 정도로 예로부터 백성의 사랑을 받아온 물고기이다. 민어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물고기이다. 재사 상에는 숭어와 함께 길게 자리를 차지한다. 양념을 발라 구운 민어는 맛이 담백하고 감미롭다. 민어회는 살이 희고 고소하여 단맛이 돈다. 민어는 얼큰하게 찌개를 끊여도 맛이 좋고 시원하게 말간 국을 끊여도 담백한 맛이 돈다. 민어살을 떠서 말린 민어를 설탕?간장에 담궈다가 그늘에 말려 술안주로 쓰면 비할 것이 없다. 민어알은 설탕?간장에 담궈 그늘에 말려 술안주로 쓰는데 쫄깃쫄깃하게 씹히고 혀에 닿으면 스스로 녹아 그 맛으로 술꾼들은 말술을 마시게 된다. 민어의 부레는 가구제작에 쓰이는 풀을 만들기도 한다. 민어 미역국은 산모의 젖을 샘솟게 하기도 하며 삼복더위에 복달임으로 이만한 보신탕이 없다(월간 샘터, 1990,9)

민어는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각각인데 서울과 인천에서는 네 뼘 이상을 ‘민어’, 세 뼘 이상은 ‘상민어’, 세 뼘 내외를 ‘어스레기’, 두 뼘은 ‘가리’, 그미만은 ‘보굴치’라 했다.
우리나라 민어어장은 완도, 진도, 칠산, 격음열도, 인천, 진남포, 연평도 주변, 압록강 등이고 이중에서 태이도, 금강입구, 군산근해 및 압록강이 유명했다고 한다(한국수산지,1권,1910).
 
덕적도, 서해안 교통·행정 중심지
 
덕적도는 인천에서 약 82㎞ 떨어져 있으며 서해안 연안도서의 교통·행정 중심지이다.
덕적도 인구 변화를 보면 1954년 12,788명에서 1972년 5,274명, 2007년 1,765명, 2013년 4월 1,947명으로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1954년 12,788명중에서 원주민은 6,039명, 피난민은 6,749명으로 피난민이 좀 더 많았다. 피난민은 1.4후퇴 전후 황해도 옹진방면과 서해안과 남하했던 사람들이다. 피난민은 북리가 1,009명(세대수 253세대)으로 가장 많고, 진리1구 886명, 진리2구 713명, 서포1구 765명, 서포2구 187명 순으로 나타났다. 피난민 중에서 약 81%가 무직으로 무척 어려운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덕적도는 어업전지기지로 중선이상 배로 북으로는 평안북도 의주앞바다까지, 서쪽으로는 대연항로에 따라 황해일대에, 남으로는 전라도 칠산까지 출어를 했다. 덕적도 어기는 3월에 시작해서 3월?4월 중순경은 연평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기잡이’, 5월부터 7월까지 ‘민어잡이’와 7월 한 달은 육젓용 ‘새우잡이’, 9월부터 10월까지 추젓용 ‘새우잡이, 11월은 ‘숭어잡이’, 12월에는 대청도?소청도에서 낚시질로 ‘홍어’를 잡는다고 한다.(서해도서조사보고, 1957, 국립중앙박물관)
 
 
덕적도 서포리해수욕장은 1957년 개장하였고, 1977년 3월 서해안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최근 2008년-2012년 관광객 입도현황은 2009년 55,257명 최고를 기록 한 후 2010년 8월 15,950명, 2012년 8월 21,097명으로 2009년 대비 38%가 감소하였다. 2014년 8월 8일 서포리해수욕장을 방문했을 때 관광객은 몇십명에 불과하였다
 

덕적도 서포리 해변
 
약 400년 전 임진왜란 전후에 충남서산에서 덕적도로 이주한 은진 송씨 후손인 송은호 어르신(83세)은 “연평도 조기잡이가 5월말 경 끝나면 용매도(북한지역) 근방의 새우잡이가 시작되고 8월 초순경부터 덕적, 굴업, 백아도 근방에서 조기, 민어잡이”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굴업도, 덕적도 민어파시
 
굴업도는 조기어장으로 유명했을 뿐만 1916년 민어 안간망 어장을 개척한 후 민어파시가 형성되어 1920년대 조기와 민어 주요 어장이었다. 성어기인 매월 7-8월경이 되면 어선이 300척 이상으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1923년 8월 큰 태풍이 덮쳐 ‘선박파괴 이백 여척, 바람에 날린 가옥이 일백삼십 호, 행방불명이 이천이백 명’(동아일보, 1923.08.16자)으로 대 참사를 기록하였다.
 
(안간망 어업)
안간망 어업은 조류가 빠른 곳에서 조류에 의해 어구가 밀려가지 않게 고정해 놓고, 어군이 조류의 힘에 의해 어구 속으로 밀려가도록 하여 잡는다. 어구의 형상은 입구가 넓고, 길이가 긴 자루 모양의 그물로 구성되어 마치 아귀처럼 되었다고 하여 안(鮟아귀안)간망 이라 부른다.
  
“굴업도 참사로 민어파시는 철시되고 1927년 근거지를 덕적도 북리로 옮겨왔지. 1931년 8월18일-25일까지 큰 폭풍우에 어민 55여명이 사망하자 도민들 사이에서 축항개발운동이 일어났어” (송은호)
 
1930년대 인천근해에서 조업을 하는 어선과 운반선은 일본선 276척을 포함해 2,382척에 달했다. 7월 한달 어획고는 239,500관(貫) 155,489전으로 전년 동기 30% 증가되었다(동아일보 1937.8.27)
 
“1930년 중반 울도 어장에서 잡은 새우를 중국 청도, 대련으로 수출하기 시작하자 1937년 경 북리축항 기공식을 시작했고, 1940년 선미도 등대를 완공했지. 그러나 6.25 사변 등 우여곡절 끝에 북리항은 35년 만인 1973년 축항공사를 완성하게 되었지”

“60년대 5?16이후 개발정책으로 어업에 대해 자금융자와 면허를 많이 내주었지. 덕적도에서는 3명이 배를 건조했는데 우리는 선미호(18톤급)를 건조하여 70년 중반까지 운항했지. 선미도, 울도, 굴업도, 백아도 근처가 주 어장이지. 60년대 당시 나일론으로 만든 일본 어망 수입과 어법이 안간망에서 유자망이 보급되어 몇 십 배 이상의 고기를 잡아 올린거야.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 특히 덕적도나 백아도?주문도 근처에서 대형 민어들을 주로 잡았는데 몇 년 잡으니까 멸종되고 말았지. 60년대 말 서해에서 조기, 민어등 주 어종이 멸종되는데 그 이유는 유자망 때문이라 볼 수 있지”(송은호).
 
유자망(流刺網, drift gill net)
 
기다란 띠 모양으로 된 직사각형 그물감의 상단과 하단에 각각 발돌을 부착하여 상하로 전개되도록 한다.
조류를 따라 그물을 흘려보내 물고기가 그물코에 걸리거나 감싸게 하여 사용하는 어망 도구
 
실제 1952년부터 1972년까지 우리나라 민어 어획량을 보면 1959년 1,184톤에서 1964년 4,174톤 최고를 기록한 후 감소하기 시작하여 1971년 967톤으로 1964년 어획고의 77%가 감소하였다. 통계는 송은호 어르신이 말씀하신 “정부 개발정책에 따른 자금융자 및 대형어선 증가, 나일론 어망 등장과 유자망 보급”에 따른 결과를 뒤받침 해주고 있다
(자료: 국립수산과학원)
 
1968년 연평도에 어로한계선이 확대되자 서해어로지도본부가 연평도에서 북리로 옮겨왔다. 사람들은 과거 민어파시 영광을 기대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국내에서 어종이 고갈되자 1970년 초 48시간 이상 배를 타고 동중국해(양쯔 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갈치, 병어, 갑오징어를 주로 잡았지. 그 당시 중국 어업 기술은 우리보다 못하고 안간망으로 조업을 하고 있었지. 그런대 우리 어선들이 중국 그물을 끊어 와서 만석부두(연안부두가 개발되기 전 부두)에 자랑하듯이 전시하기도 했어”
“1958년 9월 4-6일 태풍 그레이스가(사람들이 잘못 인식한 건데 58년 사라호 태풍은 남해안이나 부산근처에 피해가 커지) 덕적도를 중심으로 지나가는 바람에 새우잡이 배들이 태풍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지. 배가 부서지고 조그만 배들은 바람 따라 쫓아가다보니 북한으로 넘어 갔지. 그때 대부분 북한에서 돌아왔는데, 당시 북한에서 회유하고 조금 잘해주니까 거기서 산사람도 더러 있어”(송은호)
 
당시 동아일보(1962.8.18.)는 보면 ‘태풍 그레이스 인하여 이재민 1만3477명, 덕적도 피해액이 1천1백9십 만원’으로 기록하였다.
 
민어가 사라진 자리 원양어선이 채우다

1980년 이후 민어 국내어획량은 1980년 2,311톤, 1990년 2,389톤, 2000년 1,999톤으로 평균 약 2,500톤 정도다. 그러나 원양어업으로 잡은 민어는 1983년 203톤을 시작으로 1988년(4,529톤)부터 급격하게 상승하여 시작하여 국내 어획량보다 10배 정도 차지하고 있다.
 
자료:통계청
 
같은 시기 인천연안 민어 어획량은 1981년 242톤, 1985년 109톤, 1990년 중반부터 급격하게 감소하고 2012년에는 겨우 12톤 어획량을 기록한다. 1958년 민어 전체 어획고는 1,527톤 이고 그중에서 인천 근처에서 잡힌 민어는 650톤으로 전체비중의 42.6%를 차지하여 조기와 함께 서해안의 대표어종 이었다.
 
 자료:통계청
 
굴업도와 덕적도 민어 파시는 사라진지 오래고, 민어는 어르신들의 이야깃거리로 존재한다. 1980년 이후 북리 사람들은 대부분 인천으로 이주하였고 북리항은 한적한 포구가 되었다.
 
북리항 전경
 
최근 북리항은 요트계류지로 논의되고 있는데 민어파시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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