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업도 땅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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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업도 땅콩
  • 김용구(인천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 승인 2014.09.05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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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 새로운 발견] 5

 
진리(덕적도)에서 출발하여 굴업도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이었다. 약 5분 모래밭을 걷다보니 보기에도 빈한한 가옥이 수개 눈에 뛴다. 한집에 들어가 물으니 주인은 옹진방면에서 내려온 피난민이라 한다. 굴업도 현재 세대수는 원주민 6가구에 피난민 9가구 총 15가구 이다. 피난민들은 일정한 생계도 없는 구호대상자들이며 가옥도 비와 이슬을 간신히 막아낼 정도이다. 원주민들의 주업은 어업이지만 원주민들이 소유한 배는 소형 낚싯배가 두 척 있을 뿐, 대부분 어업노동자로 품팔일 신세라 한다. 농업은 산록(山麓)과 평지 모래사장에 밭은 좀 있으나 미미하다. 다만 이 섬은 방목지(放牧地)로 유명하여 일제강점기 말기에 최고 97두의 방목된 소가 있었으나 현재는 약 20두 정도라고 한다. 대체로 보아 굴업도가 덕적군도 중에서 가장 빈한하여 활기 없는 곳 같이 보였다 (서해도서조사보고, 1957, 국립중앙박물관)
 
굴업도
굴업도는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90㎞, 덕적도에서 13㎞ 거리에 있다. 지명은 섬의 형태가 사람이 엎드려서 일하는 것처럼 생긴 데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1994년 핵폐기장으로 지정되었다가 활성단층이 발견되어 취소되었고, 최근에는 골프장 개발 건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섬으로 유명하다.
 

 (1919년 일본이 발간한 지도)
 
이 섬에서 나고 자란 이장용 전덕적면장(83세)은 “①은 현재 굴업도 선착장이고, 원래 옛날 포구는 ②으로 현재 선착장에서 목기미 해변 바로 앞에가 원래 포구였지. 오른쪽 해변이 원래는 ‘제주장불’이었는데 그 어원을 보면 제주해녀가 여기에 와서 일하다 죽었는데 근처에 묻혀서 그렇게 부른 거야 그런데 언제부턴가 ‘지주장불’이라 부르고 있지. 조금 더 지나 바위가 있는데 원래 남대문 바위로 불었는데 핵폐기장 반대집회이후 사람들이 장군바위 또는 코끼리바위로 불러지고 있어”
(장불: 썰물 때 드러나는 너른 모래밭의 전남 방언)
 
  
(옛날 포구, 제주장불, 남대문바위)

“옛날 어른들 말씀에 의하여 선착장 주변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민가, 술집 등이 많이 있었고, 여름에는 주재관이 파견되고, 그것도 모자라서 왼쪽에도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지. 지금도 모래 사구를 파 보면 집터(구들장) 등이 나오지. 1923년 8월 민어파시 기간 중에 폭풍으로 배가 전부 파괴되고 어부들도 많이 실종되고 가옥들도 전부 파괴되었지. 그 후 굴업도 민어파시는 철시되고 1927년에 덕적도 북리로 옮겨갔으나 한동안 굴업도에서 민어를 많이 잡았다고 해” 이장용(83세).
 
1926년부터 1959년 까지 우리나라 민어 생산량을 보면, 1928년에 9,315톤으로 최고의 생산량을 보이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점차 감소하다가 1947년 1,690톤 기록, 그 이후 2,000톤 이하의 어획량을 보이고 있다.
 
 
“내가 덕적에서 굴업도 분교로 전학 온 해인 1945년 6월(당시 13살), 일본 큐슈에서 출발하여 상해로 가던 수송선 및 보급선이 태안반도 근처에서 연합군의 습격을 받아 전원 사망하여 서남풍을 타고 여기 굴업도 앞바다까지 많은 시체가 떠밀려 왔지. 몸속에 사진과 메모지가 비닐로 쌓여 있었는데(그때 비닐을 처음 봤지) 세 살 정도 된 딸과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에 이름이 요코아이나사라 적혀있고 간단한 항해일지 기록되어 있어 기억이 나지. 시체를 수습하여 묻어두었는데 1964년 한일국교 정상화이후 일본인 단체와 이등서기관이 찾아와서 내가 안내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가져갔지” 이장용(83세).
 
굴업도 땅콩농사
1971년 굴업도 들어가 11년간 땅콩농사를 지은 김굉배(74세)씨는 ”당시 굴업도는 20가구 정도 살고 있었지. 들어갈 당시 밀가루 6포 보리쌀 3가마 빚내서 들어가 한동안 감자만 먹고 살았어. 처음에 땅콩생산은 2-3가마 정도 수확했지. 조금 지나 6가마 생산하다 백남원씨네 아버지 땅을 사고 산을 개간하여 15-16가마 늘었고, 나중엔 20가마 정도 수확했지, 땅콩 15가마를 생산하다 보니까 생활이 나아 진거지“.

다음 자료는 덕적도 인구와 두류(콩, 땅콩) 생산량이다(내무부 1972년)
 
면적(㎢) 인구(명) 두류(톤) 면적/두류(톤) 인구/두류(kg)
덕적도 21.9 5,274 21.4 1.0 4.1
소야도 1.13 857 4.3 3.8 5.0
문갑도 216 530 5.2 0.0 9.8
백아도 3.15 270 2 0.6 7.4
울도 1.6 181 1.1 0.7 6.1
굴업도 1.83 78 13 7.1 167
승봉도 4.36 574 5 1.1 9
 
섬의 면적 대비 두류(콩, 땅콩) 생산량은 덕적도 1.0톤, 소야도 3.8톤, 승봉도 1.1톤, 굴업도는 7.1톤을 차지한다. 또한 1인당 두류(콩, 땅콩) 생산량은 덕적도 4.1kg, 소야도 5.0kg, 문갑도 9.8kg, 백아도 7.4kg, 울도 6.1kg, 승봉도 9.0kg, 굴업도 167kg을 수확하고 있다.
굴업도 1인당 땅콩생산은 167kg으로 다른 섬 보다 상당히 높은 수확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땅콩은 쌀의 2.5배로 비싼 편이었지. 굴업도 전체 생산량은 대략 가구당 평균 15가마 생산하고 20가구가 살았으니 일 년에 한 200-300가마 정도 생산한 것 같아. 수확한 땅콩은 우리가 직접 팔거나, 덕적도로 가지고 나와서 최분도 신부님소개로 천주교회를 통해서 팔았지“ 김굉배(74세)
 
매일경제(1981.01.13.)는 ‘한동안 보합세를 보이던 땅콩 값이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산지로부터 반입량이 딸려 75kg들이 가마당 5천원이 오른 12만 5천원에 도매되고 있다. 상인들은 지난해 땅콩생산이 좋지 않아 산지재고가 많지 않기 때문에 수입땅콩의 대량방출이 이뤄지지 않는 한 당분간 강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경향신문(1987년 07, 01)은 ‘굴업도에서 생산되는 땅콩은 연평균 1백50가마 정도이고, 고소한 맛이 뛰어나서 지난해에도 가마당 17만원씩 팔아 2천5백만 원의 소득을 올렸으며’ 그리고 ‘사람들이 고기 먹고 싶을 때 마을사람들끼리 모여 돼지 1마리를 잡어 먹고 그 값은 가을 땅콩 수확 후 현물로 계산한다고’ 하였다.
 
“내가 굴업도에 있는 동안 태풍피해나 사고 같은 것은 별로 없었고, 파도가 심해 배들이 많이 깨지고, 선착장에서 배가 거꾸로 넘어가고 사람도 직접 죽는 것도 봤지. 1994년 핵폐기장 건설한다고 했을 때 굴업도는 수심이 얕고 파도가 높아 위험 할 것 같아 나도 전적으로 반대를 했지” 김굉배(74세)

“농사는 땅콩 말고 소도 많이 키웠지 한집에 보통 2마리 정도로 전체 6-70마리 정도였지. 뱀도 많았지 까만 먹구렁이 같은데 뱀이 새까맣고 반질반질해 잡아다 팔았어. 경상도 사람들이 굴업도 앞바다에 새우 철이 되면 새우 잡으러 400-500척 정도 왔지. 그 사람들이 바람 불게 되면 우리 집에서 놀면서 닭도 잡아먹기도 했어. 그리고 굴업도에는 산미나리와 더덕이 많았지 나도 더덕을 캤는데 큰 것은 화장지 정도로 몇 만원에 팔고 그랬지. 취나물도 많았고 둥굴레도 많아서 많이 달여 먹었지. 그렇다가 1986-8년에 땅콩 값이 많이 하락하자 많은 사람들이 굴업도를 떠나는 바람에 나도 덕적도로 나왔지“ 김굉배(74세)
 
1986-8년에 땅콩 값이 하락한 이유를 보면, 1981년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수입개방 요구에 따라 공산품 및 농산물도 개방하였다. 땅콩의 대체품목인 아몬드 수입이 1985년 3백45톤, 1986년 6백21톤으로 크게 늘어났다. 아몬드 수입이 큰 폭으로 증가하여 땅콩의 영역을 잠식하자 땅콩 생산량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올해 땅콩수매 정량은 모두 2천9백17톤으로 전체 생산량의 28%에 지나지 않아 농민들은 최소 5천6백 톤은 수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농민들은 정부가 지난봄 땅콩수매예시 가격고시와 함께 생산자금 12억 3천만 원을 융자지원 전량을 수매하겠다고 발표해 놓고 생산량의 28% 수매에 그치는 것은 농민들 기만한 행위라고 반발하고 있다’(동아일보 1988.11.26.)
 
땅콩 수입 증가와 대체품인 아몬드를 대량 수입하자, 땅콩가격은 하락하였고, 여기에 정부 수매 감소 정책이 겹치면서 굴업도에서 더 이상 땅콩을 구경하기 어려웠다.
 
그 이후 소득증대사업으로 정부는 염소를 사주고 연평산, 덕물산, 마을근처에 염소입식 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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