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인천 사회주의운동의 숨은 실력자 김요한
상태바
[발굴] 인천 사회주의운동의 숨은 실력자 김요한
  • 이성진(인천근현대사 연구자, 영화여자관광경영고 교사)
  • 승인 2014.09.15 0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성진의 발굴-인천근대인물열전] 3

김요한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모를 따라 어릴 때부터 인천내리교회를 다녔으며, 자연스럽게 내리교회 안에 있는 인천 영화보통학교(1922년), 서울 배재고보(1925년)를 졸업하였다.

배재고보 9회 졸업생으로는 길영희(제물포고등학교 교장), 갈홍기(목사, 초대 문화공보처 장관), 유홍수(영화초등학교 교장), 이보운(남로당 인천시당 위원장) 등이었으며, 1년 후배로는 이성국(개풍상회 사장), 서정익(동일방직 설립자), 엄홍섭(대중일보 편집국장), 권충일(인천인민위원회 고문) 등이 있었다.

김요한은 탁월한 리더십과 치밀한 기획력, 친화력을 겸비한 인재로 배재고보를 졸업한 후, 그 해 인천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동경제국대학교 상과대학으로 입학해 큰 화제가 되었다.

그는 동경제국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사회주의 경제학을 접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참혹한 현실을 깊게 인식하고,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회체제를 모색하였다. 이후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그는 1927년 8월 15일 여름방학을 맞아 인천으로 돌아와 인천 일본 유학생회 조직을 주도하였으며, 초대 운동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그의 해박한 경제지식으로 당시 경제침체로 인한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경제예측에 대하여' 라는 연제로 창립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28년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인천으로 돌아와 인천지역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학습을 통한 의식화 교육을 면밀하게 주도하였다. 그런 한편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여 1929년 내리교회 권사로 임직하기도 하였다. 배재고보 동기인 이보운이 내리엡웟청년회 회장을 맡고 있어 함께 활동을 주도하면서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는 인천 개풍상회 사무장으로 일제의 사회주의 탄압을 피해 암약하면서 사회주의운동을 지속하였다. 인천에서 적색노조운동을 전개한 이주하와 김삼룡과 일본경찰의 체포를 피해 인천으로 들어와 아지트에 숨어 활동한 박헌영, 이재유 등을 연대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37년 7월 조선공산당 청년동맹 재건사건에 연루 체포되면서 그의 실체가 비로소 드러나면서 인천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개풍상회 사장 이성국도 배재고보 1년 후배로 사무장 김요한을 절대 신임하여 조선공산당 청년동맹 재건사건의 핵심조직원 강탄구에게 거금의 자금을 지원하여 지하활동을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당시 인천상공인명록(1936년판)을 살펴보면 개풍상회는 인천부 내리 34번지에 위치하며 고무신, 운동화 도소매업을 운영해 영업세액이 286.00원에 이르렀고 가장 폭넓은 전국 판매망을 확보하고 있었다. 치밀하고 탁월한 경영으로 거래품목을 명주, 면사, 옷감 등으로 확대해 만주지역 무역을 전개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이 중심에 사무장 김요한이 있었다.

엡웟청년회 회장과 내리소년척후대 대장 박남칠이 조합장으로 있는 인천미곡상조합 조직활동과 경영사업에도 깊이 관여하였고, 이승엽이 사무장으로 채용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45년 12월 31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른 5년 신탁통치 결정 반대 시민대회 결의문 작성 기초위원으로 김용규(인민위원회 위원장), 이보운(인민위원회 총무부장), 곽상훈(한민당 인천지부장), 손계언(인천신문 기자회부위원장)과 함께 선임되었다.

이후 좌익진영에 대한 미군정청과 경찰의 체포, 우익단체의 백색테러 등을 피해 박헌영, 이승엽과 함께 월북하였다. 북한에서도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 있어 김일성도 그가 면담을 요청하면 즉각 응할 정도로 대단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월남하여 경기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다시 월북하였다가 1953년 박헌영, 이승엽과 함께 반혁명범죄자로 숙청당하였다.

1920년 중반 동경제대에서 공부를 한 명석한 두뇌의 수재로 1920년대 후반부터 인천에서 거주하면서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을 전개하여 이보운, 박남칠 등 미곡상을 비롯 상공인과 사회주의 진영에 절대적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또한 남한에서도 북한에서 버림을 받은 비극의 인물로 역사 속에서도 사라져 버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