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 20년을 회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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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 20년을 회고하며
  • 김용구(인천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 승인 2014.09.26 01: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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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 새로운 발견] 6
 
올해는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 20년이 되는 해이다. 1990년 안면도, 1994년 양산 및 울진 핵페기장 반대 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 발표 이전에 덕적주민 250명은 자발적으로 ‘덕적도 핵폐기장 반대투쟁위’를 구성하고, 약 2주후엔 덕적도에서 소야도, 문갑도, 울도, 백아도 등 다른 도서의 주민들까지 투쟁에 참여한다. 지도부는 권위와 집행력을 확실하게 갖추었고, 각 마을별 연락체계가 탄탄했다고 한다. 당시 조직을 만들고 이끌었던 덕적도 핵폐기장 반대투쟁위원회 허선규 사무국장(현 경실련 해양위원장)과 이상길 서포교회 목사(현 남인천교회 목사)를 만나 동력은 무엇이고, 주민들은 어떻게 참여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주민들 스스로 핵폐기장 반대투쟁위를 결성

1994년 11월 25일, 인천시의회에서 최용규의원이 굴업도에 핵폐기장시설이 들어선다는 질의를 하자 이영래 인천시장은 중앙부처로부터 어떠한 사전협의나 통보를 받은 바 없다고 밝혔다. 12월3일 과기처가 조영장 국회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굴업도를 핵폐기장 입지 선정 대상으로 검토한 바 없다고 공개하였다.

그러나 1994년 12월 15일 MBC 저녁뉴스에서 ‘굴업도가 핵폐기장 최종 후보지로 유력하다’는 보도하였다. 당시 동영상을 보면,
 

12월 16일, 옹진군청 직원과 기획단은 면사무소에서 덕적면 노인회 회원과 마을 유지 그리고 새마을 지도자 등 약 20-30여명의 주민들에게 설명회를 개최하였다. 설명회에서는 주로 ‘핵폐기장이 들어서면 덕적도는 잘 살게 된다. 지역개발을 위해 500억 원의 기금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를 주민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조사해보니 굴업도는 핵폐기장 부지로 최적지다’등의 내용으로 주민을 설득하려고 했다.
 
12월 17일, 환경운동연합 김혜정 국장과 일행이 덕적도를 방문하여 핵폐기장 건설에 대한 주민의 의견을 청취하고 핵의 위험성과 다른 지역의 경험 등 실상을 주민들에게 알려주었다. 그 자리엔 허선규 와 이상길목사도 참여하였다.

허선규는 “면사무소에서 우연히 김혜정 국장을 만나 핵폐기장의 위험성을 알게 되었고 고향 앞바다에 핵폐기장이 들어서는 것은 용납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서포1리 청년들을 모으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핵폐기장 위험성을 홍보하였다.”

“저도 뉴스 보고 처음 알았지요. 사실 저는 핵에 대해 자세히 모르지만 부정적인 시각을 늘 가지고 있었지”(이상길목사)

이날 저녁 56명이 모여 ‘굴업도 핵폐기장 결사반대 서포1리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서명 작업을 실시하였다.
 
12월 18일, 환경련 조사팀과 서포1리 청년들은 서포2리, 북1리, 북2리, 진1리, 진2리 등을 돌며 주민을 상대로 노상설명회를 개최하고, 총리실 기획단 과 반핵운동본부 양측에 덕적면사무소에서 주최한 설명회를 주민 200여명과 함께 참석하였다. 핵폐기장 예정지에 주민 참여가 배제된 것과 핵에 대한 정보 제공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부의 신뢰성에 문제제기를 하였다.
 
12월 19일, 굴업도 전 주민 9명은 핵폐기장 유치를 찬성하는 건의서를 옹진군청에 제출하였고, 정부는 핵폐기장 최종후보지로 굴업도, 울진, 영일로 압축한다고 발표하고 그중에서 굴업도가 주민들의 반대가 적고 지층이 암반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핵폐기장 부지로서 적지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덕적주민 250명은 면사무소에 모여 ‘덕적도 핵폐기장 반대투쟁위’를 구성하고, 서포1리 14명, 서포2리 5명, 진리1리 8명, 진리2리 7명, 북1리 7명, 북2리 5명, 소야도 5명 등 마을 대표 37명을 선출한다.

“마을에서 나이, 경륜, 존경받는 분들 중심으로 조직을 했고요. 그 때 자료는 제가 준비 했습니다. 환경연합운동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서포2리 유병수 목사님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가급적 모든 공식 직함도 교인들보다는 일반 주민들로 채우고, 내가 나서는 것보다는 도와주는 게 좋겠다는 판단했다. 서재송 사목회장님 중심으로 가장 논의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얘기가 잘 통했다, 그래서 천주교인들이 숫자는 적었으나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이상길 목사)
 
12월 20일, 옹진 군수가 핵폐기장에 관한 설명을 하려고 하자 주민들이 항의하여 면사무소 밖으로 퇴장하였다. 주민 200여명은 집회를 갖고 5개 항목의 결의서를 채택했다.
1. 우리는 생존권을 빼앗아가는 굴업도 핵폐기장 보관시설건설을 강력히 반대한다.
2. 우리의 생존을 빼앗으려는 모든 무리는 덕적도를 떠나라.
3. 정부는 모든 공권력으로 우리의 의견을 탄압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4. 정부는 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굴업도에 핵폐기물을 유치하는 이유를 낱낱이 공개하라.
5. 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핵폐기물처리장을 건설한다면 그 후의 사태에 대하여 정부는 책임을 져야 한다.
 
 
12월 22일, 정부는 방사성폐기물 종합관리시설 부지로 굴업도를 확정 발표하였다. 김시중 과학기술처 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굴업도가 방사성 물질 흡착력이 뛰어난 응회암을 주암종으로 해 암반균열이 적은 단일암체로 형성되는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우수한 지질적 부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굴업도를 최종후보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편 김시중 과기처 장관이 그 시각에 전투경찰 1,500명으로 총경 급을 단장으로 한 ‘인천경비단’ 창설식을 거행하고, 경찰병력 250명을 태운 해경 경비정 2척이 덕적도에 상륙하기 위해 진리포구에 진입하자 주민들이 진리부두에 배를 대려는 경찰을 몸으로 막자 경찰은 우회하여 인근 포구에 배를 대고 마을에 진입하였다.

동영상 보기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44607_13446.html
(12.22 주민반대 동영상)
 
12월 23일, 덕적본도, 소야도, 문갑도, 백아도, 울도 등의 9개 교회에서 모인 300여명의 신자들은 진리중앙교회에서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를 위한 연합예배 및 주민결의대회’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 핵폐기물 유치 반대 추진위원회(위원장 박진호 장로)의 결의 대회를 마친 주민들은 꽃상여를 앞세우고 진리 마을회관까지 약1㎞ 평화행진을 하였다.
 
12월 24일, 덕적면 반대투쟁위원회 주민 350여명은 면사무소에서 대규모 항의 집회를 갖고, 11시경 대표 30여명이 인천으로 나와 옹진군청을 방문하여 주민 476명의 서명이 담긴 서명용지를 군수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민만 탑승할 것을 요구하자 주민들은 환경단체 및 기자와 함께 승차할 것을 요구하며 인도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비대는 시위 중인 덕적도 주민 6명, 학생 6명, 목사 1명 등 총13명을 연행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12월 26일, 주민 300여명은 인천 연안부두에 모여 집회를 갖고 14시 40분에 옹진군청까지 행진하다가 인천경비단 과 몸싸움을 벌였다. 주민 4명이 부상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4시 50분에 차량으로 군청으로 이동하여 시위를 계속 진행하여 주민 1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12월 27일, 공보처 주최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원자력 폐기물 관리시설 건설에 관한 공개토론회’가 개최되었다. 덕적주민 250여명은 이날 토론회에 참석하고 명동성당까지 도보행진을 하여 도착한 후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12월 28일 덕적주민들은 서울탑골 공원 등지에서 항의 집회를 가졌다. 덕적도 주민 및 반핵운동본부 회원 400여명은 집회 후 명동성당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1995년 1월 3일, 덕적도 6개리 대표들은 면사무소 회의실에 모여 그동안 위원장이었던 차두회씨가 사임을 하고 원로 5인을 공동대표로 하는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송은호씨를 수석대표로 선출하였다.
 
1월 4일, 울도 주민 30여 명 중 18명, 백아도 30여 주민 중 15명, 진리주민 200여 주민 중 90여명 참석하여 북리에서 주민 설명회를 개최하였다. 굴업도 이외의 전 지역에서 반대 분위기가 고조되고 극소수 인사와 굴업도 주민을 제외하고 다른 섬 주민들까지도 반대 의지가 확고하였다.
 
 
굴업도 옆서(인천핵대협이 제작한 우편엽서, 10만장 제작하여 1장에 100원씩에 판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유?
 
“당시 덕적도는 감리교가 60~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행사하면 마을 이장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후원도 해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마을과 아주 관계가 좋았어요. 예컨대 서포2리 교회(제일교회) 리모델링할 때 주민들이 마을의 행사로 인식하여 주민들이 나서서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 목사들이 마을에서 뭐 하자 하면 이견들이 거의 없었어. 동네잔치를 하면 교회가 역할을 해주고 참 좋았던 관계였다.

또 다른 일화는 서포리 해수욕장 주변에 도로 포장이 안 되어 도로가 파헤쳐지면 내가 삽 들고 나오면 동네 아이들이 다 쫓아 나왔지. 바닷가에 나무와 쓰레기들이 많이 널려 있으면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쓰레기를 수거했지. 그래서 마을주민들은 교회를 좋게 보았고, 부면장님이 서포리에 사셨는데 면사무소에서도 교회 이미지가 좋아 마을에 일이 생기면 교회가 앞장서니까 협조가 좋았던 것 같다“ (이상길 목사)

“1962-76년까지 덕적도에서 최분도 신부님이 주민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지. 신부님은 미군 함정을 인수해 병원선으로 개조하여 서해5도를 순회하며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고, 섬마을에 전기 들어오고, 상수도시설, 김 양식 등 (종교적)마을공동체를 구축하셨지. 마을주민들은 신부님과 혼연일치 되에 마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셨지. 송은호 어르신이나 서재송 사목회장님 분들이 대표적 인물이지. 그분들은 존경과 신망이 두터웠고 마을의 어려움이 닥치자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의 중심에서 활동하셨지”(허선규)
 
(인천주보, 서포1리 하천공사를 하고 있는 최분도 신부(맨앞 왼쪽)
 
1972년 당시 덕적면(덕적도, 소야도, 문갑도, 굴업도, 백아도, 울도) 인구는 7,190명 중에서 감리교 신자는 1,797명(25%), 천주교 신자는 1,584명(22%)이다. 그러나 1988년 1월 감리교 신자는 661명(37.2%), 천주교 신자는 155명(8.7%)으로 감리교 신자는 12% 증가한 반면 천주교 신자는 13.3% 감소한다.
 
 
1988년 덕적도 본섬만 국한하여 보면 인구는 1,128명이 거주하고 있으나 이들 가운데 학업 등으로 타지에 거주하고 있는 인구를 감안하면 덕적도 실제 거주자는 약 600-700명 정도로 파악된다. 이들 주민의 70% 가량이 기독교인이며 교회와 마을이 유기적인 관계 맺고 있었다. 천주교는 1976년 최분도 신부가 덕적도를 떠나고 1980년 주안1동 본당 관할 공소로 편입되어 그 후 신자 수는 감소한다.
 
“처음에는 정부에서 하는 사업을 우리가 반대해서 이길 수 있나 하는 회의적인 반응이 있었지만 주민 모르게 밀실에서 추진한 것에 대한 주민들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지. 그리고 핵폐기장이 들어오면 관광과 수산물이 판로가 어려워 질것에 대한 불안감은 많았다. 그래서 ‘핵폐기장이 있는 곳에 누가 관광하러 올 것이며 수산물을 사 먹겠느냐?’고 주민에게 설명하였지. 한번은 소야도 어민들이 연안부두에 굴을 팔러 갔는데 상인들이 ‘앞으로 소야도에서 생산된 굴은 핵이 포함될 수 있어 팔기 어렵다’고 이야기 하자 소야도 어민들이 합류하여 반대투쟁의 중심축을 형성하였다“(허선규)
 
“목사님들과 신자 등 교회가 하나가 되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새벽기도회를 통해서 매일 기도를 드리니까 그것 자체가 홍보였지. 사실 초창기에는 믿음으로 이끌어갔어. 핵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다. 핵에 관한 문제는 하나님 소관이라고 생각한다고 교인들에게 설득해서 소야리나 다른 섬까지 하나로 동참하였지. 가장 큰 원동력은 목사님들과 신자, 심지어 마을주민들도 한마음이 되었지”(이상길 목사)

당시 연합예배에서는 첫째, 창조신앙 위배되는 핵폐기물 반대한다. 둘째, 생태계를 파괴하는 핵쓰레기 반대한다. 셋째, 주민생계 위협하는 핵폐기장 결사 반대한다. 넷째, 주민의 의사 무시하는 어용관리 물러가라. 다섯째, 주민여론 오도하는 어용언론 물러가라 등의 결의를 하였다.

“대외적이나 우리가 육지에서 행사할 때 시민단체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 시골 교회가 굉장히 어려운데 비용 같은 것은 교회에서 많이 댔습니다. 예를 들어 배를 탈 때에 돈이 많이 드는데 그런 부분은 교회에서 십시일반 여러 교회에서 능력 되는대로 돈을 모아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많이 내주었고, 강제성이 없었다. 목사님과 교인, 주민들에게 굉장히 고마웠지” (이상길 목사)
 
이처럼 주민들이 초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의 밀실정책으로 인하여 덕적 주민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정부는 굴업도가 무인도에 가까울 만큼 인구가 적고(9명), 육지와 멀리 떨어져 인근 대도시 주민들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둘째, 주민들은 핵폐기장 인하여 환경파괴 및 관광수입, 수산물 판매에 대한 불안감이 많았다.

셋째, 최분도 신부와 감리교 목사들은 마을과 함께하는 사목활동으로 (종교적)마을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공동체를 통해 송은호 수석대표, 서재송 사목회장, 박진호 장로 등 마을 지도자들이 만들어졌고 마을에서 존경과 신망이 두터웠다. 그들은 마을공동체가 위기를 맞이하자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의 중심에 서서 활동하셨다.
 
글을 마무리 하며

요즘 마을공동체, 마을만들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런 마을공동체가 왜 중요하며, 마을지도자들은 지역현안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굴업도 핵폐기장 투쟁에서 보여주고 있다. 마을공동체 사례를 다른 나라나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이서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또한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으로 인하여 핵폐기장에 반대했거나, 찬성한분들도 다 피해자 들이다.

“지금도 가장 가슴 아픈 것이 서로 마음이 나뉘었다는 것. 저도, 000분과 이웃해서 잘 지냈고 참 좋게 지냈는데 제가 그 분한테 모진이야기를 다 했다. 예컨대 겨울이 다가오니까, 그분이 기름을 안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유병수 목사님과 제가 인천에 나와서 주유소마다 다니면서 이러한 사정을 하자 기름 탱크를 원가로 주었지. 그분은 생업이었는데 어쨌든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설득하여 기름을 나누어 쓰게 할 걸,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많다” (이상길 목사)
 
1995.12.16. 원자력 위원회는 굴업도 핵폐기장 지정 고시를 철회 한다. 이후 주민들의 갈등해소를 위해 정부나 지차체, 심지어 시민단체까지 갈등해소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는가?

올해 20년이 되는 12월 덕적도에서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갈등해소를 위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기를 기원해 본다.
 
 
선갑도에 핵폐기물처리장 시설을 추진하였다
『선갑도 핵폐기물처리장 건설관련사업 추진실태』 감사결과

구 과학기술처에서 1992년 선갑도에 「중?저준위 폐기물 영구처분시설」 건설사업을 추진하면서 위 처분시성을 국가종합관리시설과 별도로 건설하고자 할 때에는 원자력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방사선폐기물관리기금으로 사업부지를 매입하여야 했는데도, 1992년 10월 위 위원회 의결 없이 비공개로 위 시설을 별도 건설하기로 하고, 그 사업부지로서 당시 법원경매 중이던 선갑도를 000씨에게 빠른 시일 내에 재매입하여 준다는 약속 하에 12얻 7,200만원에 매입하게 한 후

1996.6.29 한국해양연구소로 하여금 000씨가 경락받은 선갑도의 1/2지분을 서해임해연구기지 건설사업부지 용도로 23억 4,000만원에 재매입하게 하였고 그 후 위 연구기지 건설사업마저 폐기됨으로써 위 부지매입금액이 장기간 사장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감사원 2004. 3. 15
 
<그 이후 투쟁일지>
 
1995.01.25. 총리실 기획단에서 공청회 개최, 공청회를 참여하려는 덕적주민과 인천시민들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셔터문을 내리고 입구를 봉쇄.

1995.01.26. IAEA의 전문가 아널드본 박사, 도널드 세어 박사는 24일 헬기편으로 굴업도에 들어가 5시간 조사활동을 벌여 굴업도가 처분장 부지로 적합하다고 검사결과를 발표. 덕적반투위 대표, 과기처에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용 인감증명 568매를 접수.

1995.02.04. 총리실 기획단, 지정 고시를 하기 위한 전단계 지역협의회 구성. 7명의 찬성측 인사

1995.02.08. 덕적 부녀회원 80여명 면사무소 2층 회의실을 점거하고 농성

1995.02.08. 덕적부녀회원 면사무소 점거 농성 해제. 국회체신과학기술위원회 위윈들은 덕적도 및 굴업도 현지 조사 활동, 덕적주민 300여명의 반대 집회

1995.0216-17 덕적주민 영광 핵발전소 주변지역을 방문하고 피해현장을 직접 목격

1995.0218-23 덕적면 반투위 조직 결속을 위해 각리 사랑방 좌담회 개최

1995.02. 25 인천핵대협과 원자력 연구소 공동주최로 굴업도 방사성페기물부지선정에 관한 공개 토론회. 덕적주민 4-500여명은 공개토론회에 앞서 인천시민회관에서 집회를 갖고 경기은행 본점까지 가두시위 후 토론회 참석

1995.02.27. 굴업도 핵폐기장 및 덕적도 핵연구단지 지정 고시

1995.02.28. 덕적 주민 200여명은 면사무소 민원실을 재점거하고 농성. 주민들은 점거 중에 문제의 각서 400매 가량을 발견, 각서는 ‘정부시책에 적극 호응할 것을 다짐하며 이에 각서를 제출한다’는 내용이 적힌 것으로 국무총리앞으로 제출하는 것으로 되어있었음.

1995.03.01. 주민들 덕적 진리 부두에서 각서규탄대회 및 출정식

1995.03.02. 덕적주민 200여명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굴업도핵폐기장 지정고시 철회’요구 시위

1995.03.03. 덕적도에 들어간 200여명의 주민들은 각서해명을 요구하며 면사무소로 진입하던 중 전경의 최루탄 발사로 인해 폭력사태가 유발하고 4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 주민 21명은 명동성당 철야농성

1995.03.04. 덕적주민들은 ‘각서 파동’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면사무소 앞에서 무기한 밤샘농성, 경찰은 주민대표 검거 작전.

1995.03.06. 송은호 (덕적면 반투위 수석대표), 김경민(홍보부장) 구속됨

1995.03.10. 인천핵대협은 “인천앞바다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본부 발대식”을 개최. 덕적주민을 포함하여 400여명이 참석, ‘각서파동 및 덕적주민 경찰만행을 규탄한다“ 성명서 발표, 동인천역까지 시가행진을 한 후 가두서명운동을 전개, 서명운동은 한달만에 10만명 서명.

1995.03.18. 덕적 주민들, 덕적 면사무소앞 농성을 풀고 인천 가톨릭 회관에서 무기한 농성
인천핵대협 서명운동과 굴업도 엽서 판매 및 홍보활동 전개

1995.03.25. 인천핵대협 인천시민회관 광장에서 ‘인천앞바다 핵폐기장철회를 위한 제1차 인천시민궐기대회’를 개최, 각계인사, 시민, 대학생, 노동자 등 2000여명에 참석.
인천 부천청년연합 소속대학생 동인천 및 부평역 광장에서 각각 집회를 열어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키로 결의하고 거리행진을 벌인 후 궐기대회에 합류

1995.04.14. 주안 시민회관 앞 광장에서 인천 부천지역총학생회연합 주최로 굴업도핵폐기장 철회촉구 대회를 개최.

1995.04.28. ‘굴업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시민대회’가 서울 탑골공원에서 개최, 덕적주민 200여명은 대학로까지 행진.

1995.04.29. 인천핵대협 ‘인천앞바다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제2차 인천시민궐기대회’를 동인천역 광장에서 개최, 3,00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

1995.05.01. 덕적면 반투위 사무국장 허선규 구속

1995.05.11 덕적 주민 300여명 덕적도 전역을 한바퀴 도는 경운기 시위 전개

1995.05.15. 11일 시위에서 반대투쟁에 중심적인 주민 3명 강제 연행, 정창준, 김인심 구속

1995.05.16. ‘인천앞바다 핵폐기장 건설 결사 저지를 위한 청년학생결사대’ 소속 대학생 11명이 인천시장실의 집기, 유리창 등을 부수고 옥상에서 농성을 벌이다 전원 구속.
1995.05.20. 1500명이 참석한 3차 궐기대회, 학생들과 덕적주민들은 답동성당까지 평화 행진을 하였고, 차량통행을 차단한 채 연좌 농성. 경찰은 6시 50분경 페퍼포그 발사를 하는 등 시위 대열 앞뒤의 사람들은 심한 구타와 폭력으로 다수가 부상당하고 연행됨. 7시 40분경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학생들을 연행, 8시경 시위대의 산발적인 행진이 계속되었고 9시경 또다시 전경과 백골단의 구타와 연행, 9시 30분경 답동성당안에 다시 모인 인부총련 학생들이 정리집회를 하는 과정에서 전경과 백골단이 성당안에 있는 대열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고 돌을 던져 부상당한 학생발생.
10시 30분경 중부경찰서에 도착한 200여명의 학생들이 항의를 하자 백골단이 심하게 학생들을 구타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다수가 부상당했다. 이날 50여명의 중 경상자가 발생했고, 134명이 연행되었으며, 학생 4명이 구속, 2명이 불구속, 9명이 즉심에 회부됨.

1995.05.30. 인천핵대협의 공동대표단 등 지도부의 장외집회 거부 방침에도 불구하고 ‘인천환경운동연합’, ‘인천연합’, ‘인천경실련’ 등은 경찰만행을 규탄하는 동인천 집회를 공동 주최

1995.06.27. 지방선거 실시, 그 결과 군의원에 덕적면 반투위가 추대한 김기배씨가 찬성측 인사 김건태씨를 540 : 379라는 표차로 누르고 당선

1995.06.30. 덕적발전복지재단에 500억기금을 출연하기로, 정부는 핵폐기장 건설을 강행

1995.07.03. 서총련과 경인총련 소속의 200여명의 대학생들 덕적도에서 농활

1995.09.02. 덕적면 반투위는 면사무소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어 정부의 500억기금 출연과 주민 회유를 규탄.

1995.10.07. 구본영 과기처 차관 기자회견을 통해서 “지질조사 결과 굴업도 주면 반경 3㎞ 이내 해저에서 2개열의 활성단층 징후가 발견됐다”며 “활성단층으로 최종 확인되면 공학적인 보수가 가능한지를 판단한 후 부지지정 취소 여부를 결정 하겠다”고 밝혔다.

1995.11.30. 과기처 구본영 차관은 “굴업도 3㎞ 이내 해저에서 최소 2개열의 활성단층이 최종 확인 되었으며 그중 1개열은 굴업도 북쪽 육상부 단층과 연결돼 있다. 올 2월에 이지역을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지구로 지정 고시했던 것을 해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어서 그는 “굴업도 주변지역을 지원할 덕적발전복지재단 도 적법절차에 따라 해산하고, 500억 특별지원금을 회수할 것이며, 굴업도 주민들의 경제적 손실 보상 약속함.

1995.12.09. 덕적면 반투위는 ‘주민 보고 대회’를 면사무소 마당에서 개최.

1995.12.16. 정부는 원자력 위원회를 개최하여 굴업도 핵폐기장 지정 고시 철회를 결정, 굴업도핵폐기장 설치 반대 투쟁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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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천사 2014-09-26 11:52:42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자료 수집하여 정리하여 글 쓰시느라 고생하셨겠습니다. 학생이던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안타까운 것은 지금 우여곡절끝에 선정되어 공사하던 '경주방폐장'이 지하수 문제로 계속 문제를 야기 하고 있으니 그게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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