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대중일보]의 창간 정신은 경인일보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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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대중일보]의 창간 정신은 경인일보와 다르다”
  • 배영수 기자
  • 승인 2014.10.0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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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의 대중일보 역사 승계 논란에 대한 인천시민 및 비전문가의 의견

지난 7일 열린 대중일보 창간 69주년 기념식 사진 ⓒ인천일보

수원에 본사를 둔 경인일보가 작년부터 창간 연도를 돌연 바꾸면서 인천에서 창간된 대중일보를 자사의 직접적인 뿌리라고 주장하고 이에 대한 기획기사를 연이어 쏟아내고 있는 상황은, 인천지역 모든 언론인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인천in]을 비롯해 인천일보와 시사인천 등 지역 언론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도해왔다. 그런데 정작 이 문제와 관련해 갑론을박을 벌인 사람들이 대부분 지역 내 언론인들이다 보니, 그들의 시선을 중심으로 하는 기사들만이 주로 게재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에 [인천in]은 대중일보의 존재를 아는 일부 시민들이, 경인일보가 대중일보의 역사를 자신들만의 역사로 주장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이어 인천 시민이나 과거 타지에서 필자 생활을 했던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연락을 취해 대중일보의 존재를 아는지의 유무, 그리고 최근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을 골라 그 의견을 들어 보았다.

아직은 모르는 시민들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몇몇 아는 시민들이 있었고, 생각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경인일보의 무리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취재를 하면서도 적잖이 놀랐던 부분이었다. 이에 그들의 의견 중 비교적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의견을 잘 풀어냈다고 판단되는 네 사람의 코멘트를 이 지면에 기사화했다.

다만, 이들의 시선은 현직 인천지역 언론인 등 전문가의 시선이 아닌 일반인의 시선인 관계로, 소위 ‘전문성’에 해당하는 부분은 절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 둔다. 또한 글이나 말이 다소 부족했던 타자들의 의견들이 모두 이 네 사람의 의견 내용에 포함되어 있었던 관계로, 굳이 따로 빼어 게재하지는 않았음을 함께 밝힌다.
 

대중일보의 신문 원본. 현재 미추홀도서관이 소장 중이다.

류화정 (인천 계양구 거주, 전 EBS 및 인천시 인터넷방송 작가)

근/현대기의 신문발간은 한국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최초의 근대신문’ 혹은 ‘최초의 한글신문’과 같은 타이틀을 매겨 신문의 발간을 중요하게 다루는 건, ‘신문’이라는 존재가 역동기 근/현대사회의 역사나 민족성과도 얽혀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최초로 신문을 접했던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신문은 대중에게 사실을 알리고 진실을 밝혀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신문과 같은 언론이 기반으로 한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신문(혹은 언론)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인천 시민으로 살아온 세월이 참 짧지도 않으면서 인천 최초의 신문이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 잘 몰랐었다. 그러다 최근 경인일보가 자사의 창간을 변경하며 과거 최초의 인천 신문을 승계하려는 문제를 접하면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이는 인천시민들이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백과사전의 정보에 의하면, 인천 최초의 신문은 [대중일보]다. 대중일보는 1945년 창간사에서 “사회 정의의 옹호와 시민문화의 건설을 도모하여 결연히 인천을 기반으로 한 일간신문”이 될 것이라 했다. 또한 인천시민에게 국내외의 소식을 신속하게 보도하여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 갖추어야 할 식견 함양의 길잡이가 될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이들 표현을 보면 ‘인천을 기반으로’, ‘인천시민의 식견 함양’ 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대중일보는 엄연히, 그리고 명실공히 ‘인천의 신문’이다. 한국전쟁과 같은 역경의 현대사를 겪으며  그 명칭은 ‘인천신보’에서 ‘기호일보’로, 다시 ‘경기매일신문’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유신정권의 언론 통폐합이라는 아픔의 역사 속에 결국은 ‘경기신문’으로 억지 통합되었다. 내가 알기론 그 후신이 지금의 경인일보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경인일보가 자신의 뿌리를 대중일보라고 주장함으로써 인천 언론인과의 마찰이 발생한 것이다.

여러 단계의 명칭 변경과 통합을 거치면서 지금에 이른 경인일보의 주장도 일면 그럴 듯하다. 또한 어떻게 보면 그 주장대로 대중일보가 경인일보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는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뿌리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내 생각은 ‘NO’다. 대중일보는 인천에서 창간돼 인천시민의식 함양을 표방한 인천의 지역신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경인일보는 수원에서 발행되는 경기/인천지역의 일간지다. 경인일보가 더 넓은 지역을 다루고 인천을 포함시켰다고 해서 대중일보의 창간사를 따르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기반과 표방하는 것이 대중일보와는 분명히 다르다.

나는 언론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대중일보의 후신이라면 전제사항은 세 가지여야 한다고 본다. 1. 뿌리는 인천에 있다. 2. 지금도 인천이어야만 한다. 3. 재정난 혹은 정치적 압박으로 통합되었다고 해서 뿌리가 이동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문에 내 생각으로는 경인일보가 기껏해봤자 대중일보의 ‘가지’이며, 또다른 의미에서는 ‘아류’에 불과하다. 뿌리는 인천에 콱 박혀 있는데 이런저런 압박으로 인해 인천에선 대중일보의 줄기가 눈에 띄게 성장할 수 없었고, 대신 힘겹게 뻗어나간 가지가 새로운 가지를 만나 가지치기에 성공해 탄생한 게 경인일보가 아닐까 생각한다.

신문이란 건 창간의도가 중요한 법이다. 최초의 신문들을 보더라도 그 최초란 개념엔 그 신문만의 의도가 있었다. 신문사를 흡수하더라도 그 의도를 정확히 계승할 때 비로소 ‘뿌리 계승’이란 정통성이 생기는 게 아닐까. 백과사전에 기록된 정보에 따르면 대중일보는 엄연히 인천의 신문이고 인천의 언론이다. 편협한 생각이라 할지라도 정의는 정의인 것이다. 인천의 언론이 아닌 경인일보가 그 뿌리를 대중일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구 대중일보 사옥 앞에서 대중일보에 대해 설명하는 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김성환 (인천 남구 거주, 교사 및 음악문화 평론가)

한국어 위키피디아 사이트에 명기된 사실을 보니 ‘경인일보(京仁日報)’의 모태인 (현재의 인천신문과 다른) ‘인천신문’(1968년부터 ‘경기연합일보’로 제호 변경)의 창간 년도는 1960년으로 나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기록에 근거할 때 기본적으로 대중일보의 계보를 잇는 경기매일신문은 해당 신문과 별개로 운영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1970년대 초반 유신 정권에서의 언론 통폐합으로 인하여 1973년 대중일보의 후신인 ‘경기매일신문’이 인천신문에 통합된 부분은 사실이나, 그것이 경인일보가 해방 직후 창간된 대중일보의 전통을 자신들만이 계승한답시고 독점할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인천광역시에는 여러 언론 매체들이 지역 언론의 구실을 충실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천 지역 신문의 역사적 조명과 기념은 비록 중간에 맥이 끊겼더라도 인천 지역의 매체들에게 맡겨야 하고, 만약 자신들의 출발지가 인천이니까 굳이 인천지역도 포괄하는 경기 언론이라고 자처하는 모양새라면 인천 지역 매체들과 연합하여 기념하는 방식을 취해야 옳은 것이다. 때문에 ‘대중일보’는 인천지역 모든 언론의 원조인 것이지, 경인일보 한 매체의 원조로만 남을 수는 없다.

이승희 (인천 서구 거주, 의류업 종사)

대중일보에 대한 이야기는 일전에 지인을 통해 한 번 들은 바가 있었다. 그에 따르면, 해방 후 대중일보는 인천지역의 정론지로서 서울 중심의 언론에서 벗어나 지역 사회의 소통과 발전 그리고 시민사회 성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 할 수 있었던 신문이었다. 한국의 신문 역사에 있어서도 그 의미가 중요할 테고.

나는 본디 언론인이 아니기에, 사실 그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직접적으로 체감하지는 못한 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973년 박정희의 유신정권에 의해 일어난 언론통폐합은 한국의 언론 역사에서 너무나 큰 쓰라림이라는 것이다. 언론인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지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어렵지 않게 직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독재 정부의 산물인 언론통폐합을 이용한 경인일보의 선언은 역사적 사실을 묵과한 채 당시 유신언론의 행태를 고스란히 답습하는 일방적인 선언이나 다름없다. 아픈 현대사의 단면이기도 한 언론 통폐합 조치의 피해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이며, 제대로 된 언론사라면 한국 언론역사에서 소위 ‘흑역사’로 치부되는 이 과거를 이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언론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한 마디 하자면, 도대체 양심이 있는 것인가. 나는 경인일보에 그것부터 묻고 싶다.
 

구 대중일보 사옥 건물 위치(왼쪽 실내포장마차 건물이 사옥이었던 곳이다)

한명륜 (안양시 거주, 전 [STUDIO24] 피처 에디터)

오래 인생을 산 것은 아니지만 나름 ‘회사’라는 조직을 경험해본 바에 의하면, 어떤 회사든지 자신들의 창업 당시를 신화화하는 작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건 언론사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정론직필의 지상 가치인 것 같지만, 기실 언론사야말로 지향과 상징성이라는 부분에서 이 작업은 필수불가결할 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작업에 한국의 근현대사를 겹쳐보면 논의는 복잡해진다. 한국의 근대사 장면은 여러 곳이 파손된 채 아귀가 안 맞는 그림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일제 강점과 갑작스런 해방, 그리고 1973년의 언론 통폐합 등 언론사의 해체와 재구성이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정통성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게 된 것이다.

지령 승계는 의외로 낯선 사건이 아니다. 특히 지역지의 경우 종종 보이는 일이다. 2008년 12월 창간한 울산광역일보가 광역일보의 지령을 승계한 사건을 두고 2009년 다소간 공방이 있었다. 그보다 전인 1995년에는 광주 지역의 한 건설사가 경영난에 빠진 무등일보를 인수하면서 지령과 제호를 그대로 승계한 경우도 있다.

이런 부분들이 법정공방으로 가거나 언론인들 간 분쟁으로 번지는 까닭은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약칭 ‘신문법’)에 이 승계와 관련한 조항이 적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 법률 14조에 ‘승계’에 관한 포괄적인 의미를 규정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업 전반에 대한 내용일 뿐으로, 지령 승계 등의 상징적인 문제를 다루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법적으로만 본다면 지령이라는 것이 실체를 갖지 못하는 사안일 수 있다.

최근 불거진 경인일보의 대중일보 지령 승계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다. 생각 외로 더 많은 논의가 있어 사실 좀 놀랐다. 개인적으로 이 아쉬움의 방향은 경인일보 쪽을 향할 수밖에 없다. 대중일보가 가진 해방 후 지역 언론의 효시라는, 그 ‘상징성’을 계승하고자 했다면 굳이 이런 무리수를 둬야 했을까. 설마 이게 명성을 이용한 마케팅이라면, 경인일보는 그야말로 ‘시대를 잘못 읽은’ 것이다.

냉정하게 봤을 때 현재 인천의 지역언론들이, 경인일보가 대중일보의 승계를 두고 공격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경인일보가 대중일보의 상징성을 정말 마케팅의 전기로 삼고자 한다면 그 순간 언론으로서 경인일보의 미래는 추해질 것이다. 지난 해 ‘용인 CU편의점주 자살 및 CU 측 사망진단서 변조’로 지역취재부문 기자상을 받은 자신들의 탐사정신이 굳이 지령에 빚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애초에 자신들의 것이 아닌 지령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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