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아들을 둔 항일운동가 갈형대
상태바
친일파 아들을 둔 항일운동가 갈형대
  • 이성진(인천근현대사 연구자, 영화여자관광경영고 교사)
  • 승인 2014.10.19 22: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성진의 발굴-인천근대인물열전] 4

갈형대의 아들 갈홍기
 
갈형대는 강화군 교동도에서 태어났으며, 교동에 처음 기독교를 전파한 권신일 목사를 만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강화읍교회(현 강화중앙감리교회) 권사 이동휘 장군은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교동에는 전도유망한 기독청년으로 점자 훈민정음을 만든 박두성과 갈형대라는 걸죽한 인재가 있었다. 이동휘 장군은 박두성을 서울로, 갈형대를 강화읍으로 불러냈다.
 
갈형대는 이동휘 장군이 설립한 강화읍 보창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강화 전역으로 보창학교운동이 확산되도록 많은 헌신을 하였다. 그 헌신을 크게 인정받아 이동휘 장군이 함흥으로 떠나갈 때 그에게 강화 보창학교장을 맡길 정도로 큰 신임을 얻었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강화 보창학교가 폐교할 때까지 민족교육을 지속시켰다.
 
갈형대는 강화보창학교가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방해로 페교를 하게 되자, 김포 통진으로 나와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지속하였다. 1915년 일제가 사립학교법을 제정하면서 소규모 민족학교의 학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경영의 어려움이 더해져 공립학교로 전환시켰다.
 
 
이후 갈형대는 인천으로 나와 인천 내리에 객주를 열고, 내리교회 전도사(장로)로 장사와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1920년대 초 신앙의 아버지 권신일 목사가 화수리에 위치한 화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자, 내리교회를 떠나 화도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그리고 미곡상을 통해 얻은 재산의 일부를 여자 아동을 위한 학교사업에 기부하여 오버먼 선교사가 영화여자보통학교 부속 화도여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교육사업을 통해 화수리 청년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으며, 권신일 목사의 아들 권충일이 이승엽 등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탄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1920년 중반부터 인천 신화수리와 화수리 일대는 인천청년운동의 메카가 되었다.
 
그의 아들 갈홍기는 강화 보창학교 재학 시절 조봉암과 함께 다녔으며. 이후 배재고보,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영화여자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은지 6개월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인재였다.
 
부친을 따라 화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일학교 교사로 하고, 권충일과 함께 청년회 활동을 크게 활성화시켰다. 좌익성향의 청년들도 교회 청년회 활동을 활발하게 할 정도로 기독교와 사회주의간의 심각한 갈등을 상쇄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배재고보 동창 진우촌을 꽃섬여학교(영화여자보통학교 부속학교) 교사로 재직하도록 하면서 다양한 연극활동을 통해 화수리 일대 청년문화를 정착하도록 하였다.
 
1934년 미국 시카코대학 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모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화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 인천 창영교회 초대목사로 초빙되어 2년간 시무하였다. 1943년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의 연성국장이란 직책을 맡으면서 감리교단의 지도자급 인물이 되었다.

그후 갈홍기는 정춘수, 이동욱, 심명섭과 함께 감리교의 대표적 친일목회자로 나섰다. 황도기독교의 수립과 전쟁지원을 역설하는 지방순회 연설회를 다녔으며, 서울 상동교회를 폐쇄하고 세운 황도문화관 관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감리교단 내에서 그의 친일행각에 대해서 비판이 일어나자, 교단과는 손을 떼고 숙명여대 교수로 잠시 재직하다가 미국 유학시 친밀한 관계를 맺은 이승만이 초대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초대 공보처장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충복이 되었다. 특히 사사오입 개헌 때 종신 대통령제 도입을 운운하면서 노골적으로 옹호하여 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갈홍기 공보처창 임면권


갈홍기의 저서 <세기의 위인>
 
1955년 공보처장 재직 시 저술한 《대통령 이승만 박사 약전》에서 이승만을 예수나 석가모니와 같은 성인에 비유하며 찬양하는 등 이승만 대통령의 이념적 대변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1967년 말레이시아 대사, 아스팍 사회문화센터 사무국장을 지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에서 노년을 보내다가 사망했다.
 
항일운동가로 평생을 살다간 갈형대 장로와 이에 반하는 삶을 살다간 아들 갈홍기. 우리 인천 근현대사가 갖는 슬픔이자, 아픔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